사랑하다 죽다 - 정사情死의 정치학 혹은 지독한 순정이나 아련한 절망의 형식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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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사전에는 정사(情死)“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든가 또는 다른 사정으로 함께 자살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죽은 경우에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한쪽이라도 살아남게 되는 경우 자살의 방조 혹은 교사 여부를 따져 자살관여죄(형법 제252조 2항)가 성립되며, 정사를 가장한 위계(僞計)·폭행·협박 등의 위력(威力)으로 자살을 결의하게 한 때에도 살인죄(제253조)나 미수범으로 처벌(제254조)된다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형태의 죽음이 때로는 동정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향인데, 정사의 경우는 적지 않은 경우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정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형태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어 죽은 이들의 사정이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형태에서 차지하는 정사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사에 관한 분석적 글을 읽기 어려운 이유일 것 같습니다.

 

‘정사의 정치학 혹은 지독한 순정이나 아련한 절망의 형식’이라는 부제를 단 <사랑하다 죽다>는 서원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박종성교수님의 이러한 정사의 한계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호사가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위한 주제가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정사사건을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이후로 구분하여 시대별 발생빈도나 사연들을 비교하였습니다. 앞서 논한 것처럼 정사 가운데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건들만 기록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사망신고에 따른 통계자료의 집계가 가능했던 일제강점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정사라는 죽음의 형태가 신고형식에서 구분해낼 수 없는 바, 조선시대에는 실록을 포함한 각종 기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언론매체 등에 의존하여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신분제가 엄격했으며 삼강오륜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가 사회적 규범으로 통하던 때였던지라 사랑이 완성될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교적 윤리의식이 많이 퇴조하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서구문화와 전통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일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江戶時代:1653~1868)의 관습과 규범의 속박으로 정사하는 사례가 많아 연극과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런 풍조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심지어는 정사를 예찬하는 분위기가 일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해방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 일기 시작한 의식구조의 대변화로 인하여 정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이 줄기도 했지만, 정사를 시도할 만큼 절박한 사랑도 많이 줄어든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누군가와 사랑하다 함께 죽는 것보다 하루라도 더 죽도록 사랑하는 삶이 먼저”라는 정재복교수님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 때문일까요?

 

그런데 저자는 정사를 굳이 정치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굳이 같이 가려는 추구의지를 담았기 때문일까요? 설명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만, “사랑이 ‘관계’ 개념에서 파생하는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자 하필이면 둘만의 선별적 정념이 빚어내는 감정의 숙성과정이라면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곧 ‘정치’다.(37쪽)”라고 명쾌하게 정의하고 나선 저자이고 보면 정치학을 전공하는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빚어낸 반짝이는 결정체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실록 등의 자료를 통하여 도출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열녀’에 관한 기록을 시대상을 반영한 정사의 한 형태로 보았습니다. 유독 추종의 형태가 많은 열녀의 죽음은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 그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는 등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은근히 죽음을 강요받았거나 살해 후 자살로 위장한 사례는 없었는지 의문이 생긴다는 점을 굳이 감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죽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대 아무리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다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끝내 그 관문을 넘어서는 과정도 시대적 차이가 있을 것라 짐작합니다. 다만 다양한 정사의 방식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준 ‘떨림’과 ‘울림’의 인문학에까지 생각이 미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저자의 사념의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정사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비교검토하는 이유는 최근 들어 보기 어려운 정사를 예찬하고 권장하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색다른 주제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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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그대에게
M. 스카펙 지음, 최은경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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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삶은 없다”라는 부제가 달린 <길을 묻는 그대에게>는 작가에서 사상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영적 안내자로 발전해나간 스캇펙 박사가 쓴 책입니다. 스캇펙박사는 오래 전 안락사를 주제로 한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을 통하여 친숙해진 터라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그의 명쾌한 해답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목을 두고,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가진 독자에게 주는 정답을 담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책장을 열었다가 “뭐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제가 책을 열고 어리둥절했다는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제별로 한 페이지에 두 꼭지씩으로 된 짧은 글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 그 글의 숫자가 365개 이니 하루에 한 꼭지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생이란?’으로부터 시작해서 ‘평화란?’으로 끝나는 질문은 모두 91개이지만 ‘사랑이란?’ 질문이 제일 많아 9개나 되는 것처럼 중복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머리글에서 저자는 이 글들은 일일 묵상의 형식으로 제시한 것으로, 정신과 의사로, 인간행동의 관찰자로 또는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것, 특히 영적 세계로 향한 저자의 여정을 담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책의 글들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개개인의 생애와 경험 속에서 새로운 문맥과 의미를 찾았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며 희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명상의 기도 형태 중 흔한 형태는 한 구절을 얼마 동안 명상하는 것이다. 유태교, 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글이라면 흔히 송서의 구절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마도 짧은 난해한 어휘, 즉 화두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저자가 불교에 귀의해 불교도로 지내면서 행한 명상시간에 화두로 가졌던 사념들을 정리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자는 이 글들이 슬쩍 스쳐 읽히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은 고요와 정적 속에서 묵상을 통하여 반추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이 파고들라. ‘글과 함께 성장하도록 하라.’ 글의 지혜와 여러분의 지혜 속으로 깊이 파고들라, 모순 속으로도 파고들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생, 자아, 도전, 정직, 영적인 삶, 결정, 두려움, 자기훈련 등 자기계발에 관한 주제로부터 자식, 결혼, 행복 등 다른 이와 얽히는 삶으로 주제를 확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 종교, 신, 은총, 기적, 믿음 등 종교에 관련된 주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과학, 진화와 같이 종교와 대척점에 있는 주제도 다루고 있어 저자의 생각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고의 편중을 우려한 듯한 일면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죽음과 영원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빛은 동시에 파동이며 분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과학과 종교는 모순이라는 같은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87쪽)”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가 물과 기름처럼 녹아들지 못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보입니다. 예를 들면, “신에 대한 믿음에서 우리가 성숙되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제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신에 대한 믿음 속으로 성숙해 들어가는 것도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다.(86쪽)”라는 글이 바로 그러합니다.

 

신의 섭리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의 입장에서 오늘 날의 인류가 진화의 결과라는 과학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싶습니다만, 저자는 “인류는 진화적 도약을 하는 중이다. ‘도약에서 우리가 성공하는가, 안 하는가는 여러분의 개인적 책임이다.(128쪽)”라고 적고 있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계’라는 화두를 두고, “싸우는 것이 분열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151쪽)”고 적은 글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의 갈등이 꼭 우려할만한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갈등이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고 소통으로 이어져 잘 봉합되는 수순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지요. 갈등의 요인이 된 점들에 대하여 사회구성원들이 진실을 깨달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양측에서는 거짓으로 대중을 속이려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진실된 근거를 바탕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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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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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탄생 200주년이 되는 2009년을 전후해서 진화론을 다루는 다양한 글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책을 읽다보니 유전자수준에서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리처드 도킨스교수의 <이기적 유전자>가 읽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읽고난 느낌을 정리해보면, 의학을 전공한 도움과 최근 읽은 진화론 관련 서적들을 통하여 얻은 동물행동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덕분에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생각이 자꾸 꼬이면서 읽기에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859년 찰스 다윈이 진화의 이론을 세울 당시의 과학이 쌓아온 방법론 등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다윈의 진화론이 학계나 사회에 던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넘게 이루어온 유전학을 비롯하여 생물학적 발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진화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빌면, 1976년 <이기적 유전자>가 출판된 이래로 30년을 넘겨오면서 지금까지 책의 내용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출간 이래 제기된 비판을 수용하여 1989년에 출간한 제2판에서 보주를 달아 초판에 제기된 비판과 초판 이후의 연구성과를 보충하는 주를 달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읽어가면서 생각이 꼬이게 된 이유는 아마도 책 뒤편에 따로 둔 보주를 들추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책읽기를 마친 다음에 한번에 읽을 요량으로 건너 뛴 탓이라고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보주까지 읽고나서의 느낌은 역시 불편하다입니다. 본문을 손대지 않고 보주로 땜질하는 것으로 독자들이 충분하게 이해할 것이라 믿는 것은 저자의 오만함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컴퓨터 체스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장 잘된 프로그램도 아직 명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113쪽)”라고 적었을 뿐 아니라 보주에서도 1988년 10월의 기사를 인용하여 체스 프로그램의 미래를 점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벌써 16년이나 된 1996년에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 딥 블루는 체스 세계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에게 한 판의 승리를 따냈는데, 이 정도면 명인의 경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초판의 서문에서 저자는 “나는 동물행동학자이고 이 책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책이다.”라고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을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지구상의 생물의 진화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당신들은 진화를 알아냈는가?”라고 물어볼 것이라 생각합니까? 우주의 다른 별에서 지구까지 올 정도로 고도의 과학수준을 가진 생물체라면 우주의 생성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요? 도킨스교수가 말하는 진화의 개념이 우주의 시원에까지 미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체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개체의 이타주의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집단선택설에 근거한 지금까지의 설명이 오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체선택설에 따르면 이기주의적 개체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개체가 잘 살아남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읽어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를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기주의적 개체만으로 구성된 생물계를 결국 파국을 맞기 마련이므로 이타주의적 개체을과 규형을 맞추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시지구환경에서 정말 우연히 만들어진 유기물분자 가운데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 오늘날 지구상에 다양한 생물들이 출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인데, 생물종을 연결하는 존재가 충분치 않아 진화론이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잇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분자생물학적 기술을 바탕으로 한 유전학의 발전은 드디어 생물체의 유전자배열을 해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유전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일종의 휴면계좌라 할 수 있는 이런 기능하지 않는 유전자들에 진화의 증거가 숨겨져 있는 것 아닐까요?

 

제3장 ‘불멸의 코일’편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생존기계다”라고 정의한 부분에서도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물을 단지 ‘자기복제자’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생기가 넘치는 생물체를 피동적인 기계에 비유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생물체에 대한 저자의 인식에서 밈(meme)이라는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를 창안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문화는 인간에 고유할 수도 있지만, 생물계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개념으로 개체 사이의 관계에서 발전하는 무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킨스교수가 이와 같은 문화도 모방되고 복제되어 전파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을 담은 단어로 밈(meme)이라는 용어를 새로 제안한 것으로 유전자(gene)과 발음이 유사한 그리스어의 어근으로 만든 미멤(mimeme)을 줄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등이 밈의 예가 되겠는데,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323쪽)”는 도킨스교수의 설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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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 개의 연극 - 유럽 연극의 수도에서 삶을 뒤흔든 작품들을 만나다
박철호 지음 / 반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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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너무 강렬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이 잠시 연극판을 기웃거렸던 옛날 기억을 채어낸 낚시라도 되었던 모양입니다. 저자가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면서 관람한 연극에 대한 감상들을 정리하여 소개한 책입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본 유럽 무대예술을 제대로 소개하는 첫 번째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연출가이자 비평가인 박철호님은 MBA를 공부하러 간 뉴욕에서 언어를 익히려 신청한 연극수업이 계기가 되어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수업을 통하여 뒤늦게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날아가 파리, 베를린, 그리고 마드리드 등에서 연극과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술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자신의 예술세계를 세우기 위하여 다른 이들의 작품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다른 작품들을 많이 감상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배울 수 있는 장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저자와 비교하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연극에 관한 저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제가 대학 연극동아리에 참여하게 된 것도 예과2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그 즈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동아리가 신입생환영공연으로 준비하던 조해일작 <건강진단>의 연습실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크숍 등을 거쳐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이해하고서는 장 아누이가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쓴 <안티고네>를 올리는 가을 대공연 준비에 참여하였습니다. 연극에 빠져있던 친구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이론을 입에 달고 지냈지만, 연기력은 논할 처지가 안되고 시작도 늦은 저는 스태프로 참여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니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연극공연이 많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도 극단에서 올리는 상업극에서 대학극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되는대로 관람하고 무엇이든 배워 우리 무대에서 활용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의과대학과 신학대학만으로 된 대학이고, 엄청난 분량의 수업에 치이는 학창생활이었지만, 다양한 동아리활동이 펼쳐지던 때입니다.

 

우리 대학의 연극동아리는 당시 종합대학교까지 포함해서 대학연극 3대 동아리에 든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셰익스피어, 몰리에르와 같은 극작가의 정통 희극작품들을 주로 올려 작품마다 장안의 대학생들 간에 화제를 모았습니다. 연기하는 단원의 경우 시쳇말로 아이돌처럼 많은 팬들이 있어 공연 때마다 몰려들곤 했습니다. 드라마센터에서 올린 작품의 경우는 몰려든 관객들로 인하여 유리창이 깨지는 불상사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저도 제작에 참여했던 <안티고네>의 경우도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여 나름대로의 표현방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유럽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10년 동안 1,000편이 넘는 작품을 관람하고 그 느낌을 빠짐없이 기록했다는데, 그 가운데 엄선한 16편의 연극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일작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소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합니다. 심지어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연습을 하면서 작품을 구성하여 작가가 따로 없는 아리안 무누슈킨연출의 <레 제페메르(하루살이 같은 삶들)>도 있습니다.

 

연극은 같은 대본을 가지고도 연출자의 해석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는 종합예술입니다. 그리고 같은 팀의 공연이라도 매회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배우가 같은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를 하는 요즈음 시스템에서라면 당연히 배우에 따라 등장인물의 표현이 차이가 나고, 심지어는 같은 배우가 연기하더라도 매회 마다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작품 곰브로비치의 <이본, 부르군트의 세자빈>을 읽은 느낌을 소개합니다. ‘이토록 흉측한 신데렐라’라는 표제를 달아 놓은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스토리입니다. 흉측하고 못생긴 이본이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왕자의 손에 이끌려 왕궁으로 들어가지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왕자마저 등을 돌리고 말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자가 이 작품을 맨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 같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베를린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다.(19쪽)”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베를린에서 처음 본 연극이라는 이유로 맨 처음 등장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16편의 연극이 모두 나름대로의 맛을 가지고 있으니 소개하는 순서가 작품의 우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첫 번째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든 첫 작품을 읽은 소감은 불쌍한 이본의 삶을 연출가가 어떻게 표현하더라는 것보다는 <베를린, 천개의 연극>이라는 책을 쓴 작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김철리단장께서 ‘단기 베를리너이자 이방인으로서의 저자의 일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 베를린 사람들의 삶과 사회가 베를린의 현대 연극 무대가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고 추천의 글을 쓰신 이유가 실감됩니다. 먼저 연극을 감상하던 날의 작가의 일상으로부터 공연장으로 들어가 연극을 감상하기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작가와 함께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극단들이 제공했다는 좋은 질의 공연사진들을 곁들여, 작품과 등장인물을 소화한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같이 엮어서 베를리너 앙상블의 객석에 앉아 작가와 같이 한편의 연극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덧붙이는 이야기에서 소개하는 이야기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글재주가 뛰어나지 못한지라 하루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편하게 풀어보았다.(11쪽)”고 지나치게 겸양을 떤 저자의 글솜씨에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작품을 다 읽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낀 저자의 글솜씨는 ‘바로 짧게 끊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짧게 끊어 쓴 글은 읽는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연극을 공부하러 간 곳이 “왜 베를린이었는가?”도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베를린에는 약 50개의 극장이 있는데, 베를린연극의 특징은 레퍼토리극장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베를리너앙상블, 도이체스테아터, 폴크스뷔네, 샤우뷔네 같은 유명한 레퍼토리극장이 베를린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도이체스테아터의 200편, 베를리너앙상블의 80편을 포함에서 4개의 레퍼토리극장에서 올리는 연극은 2년 동안 매일 다른 연극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베를린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정말 섹시하다”라고 한 것처럼 베를린을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라고 부를 만 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책에 빠져든 또 다른 이유는 저자가 소개하는 16편의 연극들 가운데 <고도를 기다리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파우스트> 그리고 <한여름밤의 꿈> 등, 4편은 비록 국내에서지만 이미 관람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두어도 한판의 바둑’이라는 바둑해설자가 흔히 하는 말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연극이란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연출가가 해석하는 작품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니 한판의 바둑과의 비유가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설이 길어지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오이디푸스의 테베왕국은 오이디푸스가 성을 떠난 뒤, 두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잔을 벌이고 결국 동생 에테오클레스가 차지하게 됩니다. 자신이 차지할 왕위를 빼앗긴 폴리네이케스는 외부의 세력을 빌어 테베를 공격하다가 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고 오이디푸스의 동생 클레온이 테베의 왕이 됩니다. 클레온은 테베를 배신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벌판에 버려두고 누구든지 이를 매장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립니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사랑하는 오빠의 시신이 벌판에서 썩어가는 것에 분노하고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여 클레온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클레온은 아들 하이몬의 약혼자이기도 한 안티고네를 처형해야 하는 운명이 괴롭지만 국가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결국은 안티고네를 처형하게 되고, 하이몬 역시 안타고네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하이몬의 어머니 에루리디케 역시 자살을 하고 마는 비극으로 극이 마무리됩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쓴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독일 제3제국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는데,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정의로운 일을 감행한 뒤 마침내 죽음을 택한 안티고네와,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고도 자신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전후 독일의 나치 군인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108쪽)”이라고 작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문학을 보면 신의 뜻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신화에서 만나는 그리스의 신들이 항상 정의로운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들이 신의 뜻을 빌어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외세를 빌어 고국을 공격한 오빠를 묻어주어야 한다는 인륜을 내세운 안티고네의 무모함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은 아닐까요? 세월이 가면 클레온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새롭게 해석한 안티고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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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3-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4599
 

 

언젠가 명동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서점인 명동서점이 문을 닫았더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명동에서 누군가 만날 약속을 했는데 시간이 남았을 때 새로 나온 책도 구경하고,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책을 손에 넣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아내와 인연이 엮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새로 나온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릇처럼 서점에 들르곤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야 신문,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을 통하여 얼마든지 새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서점보다는 인터넷이 편리하다는 생각이 굳어진 탓에 서점에 나가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한 대형화된 서점들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동네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힘들어진 탓에 하나 둘 문을 닫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아직도 동네서점이 두어 곳 남아 있습니다만, 참고서의 판매에 의존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지난 달에 학회참석차 동경에 갔을 적에 거리에서 새롭게 느낀 점은 조그만 서점들이 참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점에 따라서는 DVD나 성인용 만화를 주로 파는 곳도 있었습니다만, 학술서적을 파는 조그만 가게에서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 보이는 가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새 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기몰이를 하는 책들에 대한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가지 인터넷에서는 책 내용의 일부라도 직접 읽어보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서가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살피다가 눈길이 가는 책을 뽑아서 목차와 머리말을 읽고 다음에는 본문을 조금 읽다보면 흥미가 일어 책을 사게 되는 아날로그적인 추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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