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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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영된 KBS 2TV ‘KBS 전국민 합창 대축제 더 하모니’에 출전한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이 결선무대에서 김태원씨가 작곡한 ‘사랑이란 이름을 더하여’를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이 차오르는 경험은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도 드물지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그림과 눈물>의 저자인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질문이 제게 왔더라면 아마 기억하는 모든 순간을 뒤져보아도 그런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제가 미술분야에는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카고, 필라델피아, 뉴욕, 파리 등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 뿐 아니라 작은 도시에 있는 소소한 미술관에도 가보았습니다. 무명 혹은 유명화가의 작품을 보면서 눈물이 맺혔던 기억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이 그림을 감상하시던 분들 가운데 눈물바람을 하시는 분들 본 기억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작품 앞에서면 분위기를 다잡고서 감상하지만, 흥분을 한다거나 당혹스러워한다거나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제임스 엘킨스교수 역시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을 찾아보기로 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경험담’을 들려달라 요청을 했다는데, 놀랍게도 4백 통이 넘는 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들의 글을 읽고 또 별도로 연락을 통하여 그림과 눈물의 관계를 풀어간 끝에 <그림과 눈물>을 완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리크 바우츠의 1460년작 “울고 있는 마돈나”를 담은 표지를 열면 모두 7개의 미술작품을 담은 원색도판을 실었습니다.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울고 있는 마돈나”는 저도 혹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엘킨스교수는 들어가는 글의 제목을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의 그림에 대하여”라고 적은 것처럼 우리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감성이 그만큼 메말라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제 우리 영혼의 용량은 리큐르 잔으로 재야 할 겁니다.”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건조해졌는지, 간혹 무언가를 느낄 때도 그 작은 감정들에 조차 얼마나 인색한지에 대한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멋진 대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을 보고 운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등 애매한 이유로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도 한다는데,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이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 걸려 있는 귀도 레니(Reni)의 ‘베아트리체 첸치’ 그림을 감상하면서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19세기에는 그림을 보면서 발작적인 반응, 혹은 격앙된 눈물의 홍수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1989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정신과 과장 그라지엘라 마게리니가 이런 환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증상을 묶어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병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탕달 신드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마크 트웨인 질환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림의 음침한 잔래”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눈물이 앞을 가려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다빈치는 <파라고네>에 “화가는 감동으로 웃게 하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않는다. 눈물은 웃음보다 감정을 훨씬 더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171쪽)“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사사한 빌 비올라는 “예술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라면서 눈물을 주제로 다룬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독교가 유럽에 뿌리를 내리면서 울음과 눈물은 예술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수난을 슬퍼하고, 개인의 회개와 구원을 청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회개의 눈물은 기쁨과 슬픔, 욕망과 후회, 참회와 헌신과 사랑과 희망이 뒤섞인 씁쓸하고도 달콤한 홍수이다.(257쪽)”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사조는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가 17-18세기에 다시 귀환하였다고 합니다.

안 뱅상 뷔포는 <눈물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63823>를 통하여 18-19세기의 프랑스 문화사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눈물이란 열쇠글로 18~19세기 프랑스 문화사를 살핀 매우 독특한 책. 우리의 가장 은밀한 태도들 가운데 하나인 이 눈물을 역사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감동의 형태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섬세하거나 혹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사실을 성찰한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우리의 눈물없음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20세기 회화는 건조한 접근법이 썩 잘 맞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조(思潮)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이 화려한 모습으로 귀환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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