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심리학 - 당신의 감정, 판단, 행동을 지배하는
데이비드 맥레이니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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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분야가 주목받게 되면서 다양한 심리학 관련 서적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심리학을 전공하시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결과 혹은 임상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심리현상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은 분명 심리학전문가들과는 달리 쉽게 읽힌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심리학 블로그’를 표방한 자신의 블로그(http://www.youarenotsosmart.com; 사진)를 통하여 소개한 글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반인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즉 검증된 글발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짧지 않은 세월동안 블로그를 운영해온 저로서도 부럽기도 하고,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고, 역시 책읽기를 마치고서는 확실한 무엇을 손에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인간의 망상을 기념함(A Celebration of self delusion)’이라는 문패를 걸어두고서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오해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을 올리는데 당연히 심리학 혹은 뇌과학에 관한 전문가들의 연구논문을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상식과 관습에 시시콜콜 딴지를 거는 내용이 방문객들의 폭발적 반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블로그에 담은 그의 글들은 출판쪽의 주목을 받게 되고, <착각의 심리학>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블로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느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블로그 글은 지나치게 길면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데 실패하기 쉽습니다. 저의 경험에서는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 아니 그보다도 화면을 이동하지 않아도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면 딱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글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요약하는 글쓰기 솜씨가 필요한 것입니다.

 

<착각의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문제 제기에 이어 주제에 관한 관련분야의 논문 혹은 텍스트를 요약하는데, 이 부분 역시 두 세 개 정도의 대표적 논문을 인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실은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주제에 관한 저자의 생각 혹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반 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특히 이 부분을 붉은 글씨로 강조하는 특별한 기획으로 독자의 눈을 붙들고 있습니다.

 

‘인지적 편견’, ‘발견적 학습’ 그리고 ‘논리적 오류’의 주제에 속하는 모두 서른아홉 꼭지의 이야기를 1. 착각하는 자아, 2. 억측에 가까운 예측, 3. 어설픈 경험, 4. 허점투성이 논리, 5. 관성화된 습관 등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를 펼치고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새로운 주제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인지적 편견과 불완전한 발견적 학습, 그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논리적 오류 덕분에 시시각각 자신을 속이며 현실과 타협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18쪽)” 정말 그런가?

 

금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으니 “도대체 왜 사람들은 정치인의 빤한 거짓말에 속는거야?”라는 제목으로 된 ‘제3자 효과’편을 보면 세상의 관찰자이면서도 자신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당신을 ‘나는 대중이 아니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세뇌시키기 위하여 어떤 감언이설로 속이고 있는지 냉정하게 검토해보라는 저의 해석을 덧붙여 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예측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첫 단계가 늘 현재 상황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시작되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행동은 상황이 진짜인양 행동하다 보면 예측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재미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읽어보시고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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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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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런 책 읽으면, 일단 울컥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 대단하다!’하는 독백이 이어지게 됩니다. 울컥하는 이유는 ‘왜 나는 이렇게 못할까?’ 자조(自嘲)하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이 책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방송국에 출근하는 평일 5일중에 이틀은 집에서 생활하고 사흘은 작업실에서 지낸다. 퇴근하면 바로 작업실로 가서 잘 때까지 작업을 한다. 대신 집에서 지내는 이틀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 지낸다. 주말도 마찬가지. 여행을 가지 않는 한, 토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온종일 있고, 일요일은 종일 글을 쓴다.(115쪽)” 이렇게 해서 이재익 작가는 한해 평균 4~5권씩의 소설을 낼 수 있었던 것이고,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SBS FM의 간판프로 <두시탈출 컬투쇼>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처럼만 한다면 반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재익 작가는 한 가지도 힘들다는 창작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그리고 방송사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분을 ‘크리에이터’라고 한다고 하는데, 다음 사전에 나오는 “① 창조자 ② 조물주 ③ 신”으로 해석되는 creator의 뜻이 딱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인지 크리에이터라고 적은 이유를 알듯 하기도 합니다.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재익 작가가 살아온 방식을 정리한 자전적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분야에 뜻을 세우고 있는 분들에게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어떻게 당신처럼 될 수 있죠?’라는 의미를 담은 질문을 받다가 별 생각없이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신만의 세계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받고 있는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개념을 잡고, 이어서 자신이 지나온 실전경험을 필드 매뉴얼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어 읽다보면 나름대로의 전략을 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제 경험과 비교하면서 공감했던 두 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소설가도 자격증이 있나요?’라는 작은 제목으로 적고 있는 소설가 되는 길에서는 일단 소설을 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완성된 원고를 어떻게 활자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공모전에 원고를 출품하는 방식은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만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이어서 “이름하여 무작정 문 두드리기. 출판사에 직접 원고를 투고하는 것이다.(51쪽)”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저도 몇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낸 저자입니다. 처음 쓴 원고가 치매를 일반에게 쉽게 알리기 위한 원고를 하루에 10시간 씩, 일주일에 4~5일씩 쓰기를 4달 정도 매달린 끝에 탈고를 한 다음에, 유명한 일간지 출판국 세곳에 목차를 담은 기획서를 보내고 하회를 기다린 끝에 동아일보사에서 연락을 받고서 바로 계약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는데 출판국장님께서 당시 분위기로 보아 치매가 곧 사회적 이슈가 될 것으로 예견하셨던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집안에 치매에 걸린 가족이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출판을 위하여 에디터와 원고를 다듬는 작업은 원고를 새로 쓰다시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결국은 집필을 시작한지 10개월 만에 <치매, 나도 알면 고친다>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한 마인드를 갖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없나요?(68쪽)’라는 질문에 대하여 작가는 나름대로의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쉽게 말하면 일단 관심을 둔 주제에 관한 자료를 꾸준하게 모으는 데, 더 좋은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의견을 요약하여 두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조언에 역시 어줍잖은 제 경험을 덧붙인다면, 자료를 모으는 장소로 블로그를 활용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벌써 8년째 되어가는 제 개인 블로그에는 치매, 죽음, 보건정책 등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숙제에 필요한 자료를 찾는 학생들도 애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뿐 만 아니라 정책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자료를 구하러 방문하시기도 합니다. 저 역시 블로그에 모아둔 자료를 바탕으로 칼럼을 쓰기도 하고, 이런 칼럼들을 모아 책으로 묶어 내기도 한 바 있고, 자료를 토대로 또 다른 책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으니 자료모음은 글쓰기에 있어 일종의 기초공사와 같은 것입니다.

 

제 블로그 친구분들 가운데는 장편소설을 쓰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 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솔직한 느낌을 전하기도 합니다만, 그분들이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꼭 소설쓰기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나 창작에 관심이 계신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보물창고 같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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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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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이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단어를 묶어 제목으로 정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쿤데라는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모두 7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7개의 이야기는 간혹 같은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혀 독립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소설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잃어버린 편지들’이나 ‘천사들’과 같이 같은 제목을 단 이야기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립된 이야기 모음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헷갈릴 수도 있겠다싶었던지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설명하고 나섰습니다.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음악에서 주로 사용되는 변주(變奏)란 ‘음악을 선율적·화성적·대위법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편지들’의 주인공 타미나가 다시 등장하는 ‘천사들’에서 쿤데라는 오랜 투병에 지친 아버지가 손을 잡아끌어 베토벤의 소나타 「op 111」의 악보를 펼처보이면서 “이젠 난 알아!”라고 한 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사상 처음으로) 변주를 최고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그의 가장 아름다운 생각을 집어넣었다.(300쪽)”, “교향곡은 음악의 서사시다. 교향곡은 외부 세계의 무한을 가로질러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인도하며 점점 더 멀어지는 여행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변주에서 베토벤은 탐험할 다른 공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변주는 새로운 여행에의 초대였다.(308쪽)” 음악의 변주가 새로운 영역의 발견이었던 것처럼 쿤데라는 인간이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한 파스칼의 생각을 인용하여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펼쳐 놓은 변주는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308쪽)

 

웃음과 망각에 관한 변주를 통하여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소련의 꼭두각시들에 점령당한 조국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 혹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사람들이 겪는 정체성의 해체과정을 에둘러 혹은 콕 짚고 있다고 읽었습니다.

 

두 개의 ‘잃어버린 편지들’에서는 조국을 떠나지 못한 미레크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감추고 싶은 기록들은 헤어진 연인 즈데나와 주고받았던 끔찍할 정도로 감상적인 편지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잃어버린 편지들’에서는 조국을 등지고 떠난 타미나가 망명길에 들고 나설 수 없어 시댁에 맡겨두었던 편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그리고 있는데, 편지는 죽은 남편과 같이 한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편지들’에서 미레크는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11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옌데 암살은 러시아의 보헤미아 침공에 관한 기억을 금세 뒤덮어 버렸고, 방글라데시의 유혈 사태는 아옌데를 잊게 했으며, 시나이 사막 전쟁은 방글라데시의 울부짖음을 뒤덮었고, 캄보디아 학살은 시나이를 잊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잊을 때까지 사건이 이어졌다.(19쪽)” 쿤데라가 체코 동포들이 쓰라린 기억을 망각해가는 것을 걱정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일본이 지난 세기 우리선조를 비롯하여 아시아 주변국에 저질렀던 만행을 잊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전쟁중에 저질렀던 반인륜적 행위를 철저하게 반성해온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기를 쓰고 부정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과거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천사들’에서 웃음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웃음과 악마들의 웃음을 대비시키면서도 애초부터 웃음은 악마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웃음에는 어딘지 사악한 데가 있으며 또한 웃음에는 편안한 안도감을 주는 측면도 있다.(122쪽)고 합니다. 웃음은 곧 쾌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쾌락의 범위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배뇨하는 것, 만지는 것, 듣는 것, 혹은 그저 존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수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가 수도원의 장서관의 비밀장소에 감추고자 했던 서책이 바로 그리스 희곡을 바탕으로 한 웃음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편’이었던 것은 중세기독교 사회에서는 웃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쿤데라는 웃음으로 대표하는 쾌락주의가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도피하려는 일탈된 행동이라는 비판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엄마’에 서 마르케타와 에바가 카렐과 함께하는 성행위라던가 ‘리토스트’의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외도를 통하여, 혹은 ‘경계선’에서 바바라가 주도하는 집단 성행위 등이 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쿤데라가 웃음을 망각과 관련지은 뜻을 ‘경계선’에서 새길 수 있을 듯합니다. “얀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옛 조국을 떠나서 잃어버린 자유를 위해 투쟁에 모든 시간을 바친 친구들이 있다. (…) 그들은 경계를 보고 경계 너머로 미끄러져 들어갈까 봐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경계 너머에서는 고문당한 그들 민족의 언어가 이매 새들의 지저귐처럼 아무 의미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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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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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독자층이 탄탄하다는 요시모토 바나나씨의 소설을 처음 만났습니다.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막다른 골목의 추억>인데, 재미있는 것은 다섯 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할 수 있는 청춘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목에서 받는 인상처럼 삶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만 같은 상황에 봉착한 인생들이라는 공통점에, 저자는 이들이 어떻게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인생길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한폭의 수채화 그리듯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섯 여인의 다섯 색깔의 사랑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첫 번째 이야기 「유령의 집」의 남녀 주인공은 롤케익점을 하는 남자친구와 가족레스토랑을 가업으로 하는 여자주인공의 특징없는 생활 자체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할 수 있읗 것 같습니다. 가업 이어받기를 거부하는 남자주인공과 역시 가업 이어받기를 거부한 오빠 덕분에 가업을 이어받게 될 여자주인공이 우연히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되고, 일상을 탈출하기 위하여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남자주인공과 헤어지기 전에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미래를 서로를 구속하는 약속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소인 남자친구의 숙소에서 나타나는 노부부 유령의 모습에서 무색무취할 정도로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엄마!」에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소녀가 역시 아무 것도 할줄 아는게 없는 엄마로부터 받은 학대가 마음 한켠에 쌓여있는데, 어느 날 사내 식당에서 주문한 점심에 넣은 독극물(사실 음식에 넣었다는 감기약은 안전영역이 넓은 편이라서 건강에 심각할 정도의 부작용이 생기려면 상당한 양을 복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설정이라고 보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을 복용한 여자 주인공은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 등 응급가료를 받고 퇴원하게 됩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의 희생양이 된 여자 주인공은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받은 학대와 그 사건으로 엄마와 헤어지게 되면서 형성된 보호본능이 발동되는데 퇴원하고서 복귀한 회사업무 상 만난 사람의 지나치다싶은 관심에 다시 보호본능이 표출되면서 감정조절에 혼란을 겪게 되는 ‘막다른 상황’에 봉착한다는 메시지로 보입니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는 남자친구의 무심한 듯한 격려가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장 짧은 스토리 「따뜻하지 않아」는 어린 시절 부잣집 이웃에 사는 남자아이와 함께 했던 기억에 붙들려 있는 여성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널찍한 자기 집보다도 헌책방 2층에 있는 여자아이의 집을 더 좋아했던 남자 아이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가정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생모에 의하여 납치되어 죽음을 맞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맞은 갑작스러운 이별은 오랫동안 여자아이를 미로 속에 밀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거의 기억과 어떻게 화해하는지 또 다른 해결방안은 없었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의 이혼, 그리고 10대 시절 소꿉친구에 의해 강제로 관계를 맺는 등 여자 주인공의 삶은 이미 뒤틀려져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도모 짱의 행복」에서는 5년여의 기간을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이 이루어질까 하는 기대를 걸게 하고 있습니다. 짝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우리들의 편견을 작가가 속 시원하게 깨트려 주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마음에 담았던 짝사랑을 이루지 못한 저의 아픈 기억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점은 유독 이 작품에서만 작가가 소설가로 등장해서 소설 속의 소설로 만드는 결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상처를 담고 사는 여자 주인공이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결말로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약혼한 남자가 떨어진 곳으로 근무를 떠나게 되면서 조금씩조금씩 멀어지다가 결국은 다른 여자가 생긴다는 끔찍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만큼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탓도 있겠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도 있는 상황이고, 좋은 도움말을 주고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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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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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후편은 전편에 이어 발베크가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드렸던 살롱문화는 파리와 같은 대도시 말고도 시골에서도 그곳에서 사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는 살롱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파리의 살롱와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겠습니다. 발베크 부근에 사는 베르뒤렝씨와 그들이 세들고 있는 집의 주인인 캉부르메르씨의 살롱이 등장하는데, 주무대는 베르뒤렝씨댁이지만, 두 집안이 은근히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어 당시 유명 살롱들끼리 참석하는 인사들의 면면에 따라서 수준이 비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사들은 파리의 게르망트공작 살롱이나 스완씨의 살롱에서 이미 낯이 익은 분들이기도 합니다. 휴양지인 발베크로 쉬러온 파리의 인사들을 유치해서 살롱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 싶기도 합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는 몰리에르의 연극과 발자크의 문학세계가 화제에 많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17세기 중반 활동한 몰리에르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몰리에르는 전통적인 희극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대비시켜 이것들의 상호관계에서 희극적 요소를 추출해내는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대학연극반에서도 몰리에르의 <강제결혼>이 레파토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의사 망나니>에서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던지 화가 날 지경이었던 경험도 생각납니다. 몰리에르는 의사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자크는 19세기 초반에 명성을 얻은 소설가입니다. 따라서 프루스트가 사교계에 드나들 무렵 파리의 살롱가에서 화제에 많이 올랐던 것들을 기억하고서 소설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어, 하편에서는 주로 샤를뤼스씨와 모렐씨 사이의 관계를 주로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작은 할아버지댁에서 일했던 사람의 아들인 모렐은 자신의 내력을 감춰달라고 주인공에게 요청하면서도 요청을 승낙하자마자 태도가 일변하여 으스대는 꼴을 보이는데, 이런 자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작가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주인공과 알베르틴의 관계입니다. 전편에서는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과의 연애는 깊어져 혹시 결혼으로 이어질까 어머니가 걱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리고 성장기에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상황을 묘사하던 주인공이 청년이 되어 많은 여성들과의 사랑을 그려내면서부터는 이야기 가운데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별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발베크에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설명은 몇 줄 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틴이 등장한 이후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스케치를 다니는 알베르틴을 위하여 자동차를 세내어 편의를 봐준다든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동숙을 한다거나 하다가도 헤어질 결심을 한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편집광적인 성격을 드려냈던 스완씨와는 달리 주인공은 불안심리가 두드러지는 성격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전편에서보다 동성애자들의 심리나 행동양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제 마음에 드는 이들에겐 열렬히 친절한 만큼이나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이들을 멸시하는 게 성도착자들의 버릇이다.(53쪽)”라는 설명이나 게르망트 공작이 모렐을 꼬드겨서 홍등가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된 샤를뤼스씨가 파리에서 쥐피앙을 불러들어 잠복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자들보다 질투의 정도가 심하다고 들었는데, 새로 생긴 동성애 상대를 감시하기 위하여 옛날 동성애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곳곳에서 고유명사의 어원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숙한 외교관인 오르메송(Ormesson)의 이름에는 베르길리우스가 좋아한 울무스(ulmus, 느릅나무), 또는 울름(Ulm)이라는 도시 이름이 되기도 하는 오름(orme, 느릅나무)이 보입니다.(70쪽)” 아마도 이런 화제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1920년대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프루스트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예언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이 우리의 비잔틴 문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사회 풍조로 된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된 효력에 관해 엄숙하게 토론하다니, 착실한 프랑스 사람, 아니 착실한 유럽 사람이 할 짓이 못 됩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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