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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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편에서 퓌순이 사라진 다음에서야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말이 그녀의 종적을 뒤쫓지만 묘연하기만 하던 그녀와 가족이 사는 곳을 결국은 찾아내게 되고, 그녀가 원했던 자전거와 귀걸이 한짝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영화감독 페리둔과 결혼을 한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기를 2864일... 이 시점에서 퓌순에 대한 케말의 사랑을 재평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집념이라고 매도하기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순수함에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퓌순과의 관계를 시벨과의 결혼과는 무관한 혼외의 사랑으로 가져가려는 단순한 생각이 잘 못된 선택이었기에 먼 길을 돌아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작가는 이러한 케말의 사랑을 집념이라는 값싼 단어보다는 순수함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겠습니다. “독자들이나 관람객들은 내가 그 순간과 상황을 경험할 때는 전적으로 진심이었으며 항상 순수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89쪽)”

 

그러면 퓌순이 케말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편의 끝장면에서 가난한 퓌순이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케말이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도움이 절실해서였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나를 만난다는 것을 이제는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15쪽)” 퓌순의 어머니 역시 그런 소망을 노골적으로 지원해달라 요청하기도 합니다. 케말은 퓌순의 그런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지만 결국은 퓌순과 그녀의 남편 페리둔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케말은 신체적 접촉을 거부하는 퓌순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퓌순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에도 감지덕지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보니 중학생 무렵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가더라도 가끔 바둑을 두기도 하지만 따라 책을 읽던가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편하게 느껴졌던 것인데, 이런 기억에서 케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둔이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촬영에 들어가지만 퓌순은 상대 남자배우와의 신체적 접촉을 꺼려하는 페리둔과 케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배우로 데뷔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퓌순의 미모에 반한 다른 영화감독이 그녀를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역시 두 사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런 정황이 퓌순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한편 페리둔과 퓌순의 결혼생활에는 비밀이 있었고, 결국은 페리둔이 감독한 영화의 주연배우 파파트야와 사랑에 빠지면서 퓌순과 페리둔이 파경을 맞게 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케말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몸을 열었던 퓌순이었지만, 페리둔과의 결혼생활에서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케말과 결혼을 약속하고 있음에도 혼전관계를 거부하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케말은 퓌순과 어머니 네시메고모와 함께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불가리아에서인가 술을 마신 퓌순이 차를 운전하면서 버드나무로 돌진하여 자신은 현장에서 죽음을 맞고 케말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 앞서 배우로 데뷔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으로 보아 퓌순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그래도 케말과 동반자살을 꿈꾸었다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케말은 퓌순이 떠난 다음에 그녀와 연관이 있는 물건을 수집하며 그녀를 기억하려 노력하였는데, 퓌순이 죽은 다음에는 그녀가 살던 집을 아예 박물관으로 꾸며 그녀와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하려 기획하게 됩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113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순수박물관인데, 순수박물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참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치 저자가 이토록 많은 박물관을 방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였을 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케말이 방문한 박물관 가운데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케말의 행적을 그리는 과정이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듯도 합니다. 작가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즉 순간들을 모은 시간이 바로 기억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을 글로 남긴 프루스트는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돌아온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고 있기도 합니다.

 

케말은 바로 시간을 기억하고자 순수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파묵에게 부탁하여 퓌순과의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달라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파묵이 <소설가와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인 것으로 혼동하는 독자들은 무언가 착각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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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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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학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를 읽어가다가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그의 소설 <순수박물관>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집착적인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순수박물관이 출판된 다음 작가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소설과 소설가 40쪽)”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경험을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 혹은 주변인물이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소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수박물관>은 파묵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 쓴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합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을 그려내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집착도 이 정도면 병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975년 터키 이스탄불,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이 넉넉하게 성장한 케말은 역시 훌륭한 신부감인 시벨과 약혼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어렸을 적 가깝게 지냈던 먼 친척의 딸인 퓌순을 만나면서 묘하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를 유혹하여 관계를 맺게 된 케말은 한편으로는 시벨과의 약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약혼식장에 퓌순과 그 가족을 초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게 되고,약혼식장에서 자신이 퓌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퓌순이 잠적하게 됩니다. 퓌순의 종적이 묘연해지자 케말의 일상은 흩어지면서 약혼녀 시벨과의 관계 역시 뒤틀리게 되고 종국에는 거리를 두었다가 종국에는 파경에 이르게 되는데 까지 1부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약혼을 앞둔 남성이 갑자기 등장한 먼 친척 여인을 적극적으로 유혹하여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현실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사회가 혼전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이고 서구문화를 접한 여성이 혼전순결을 지킨다는 터부를 깨는 용감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이 혼전 관계 혹은 혼외정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다소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주인공 케말과 그 친구들은 최근 화제에 올랐던 브이 소사이어티처럼 ‘당신은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라는 케말의 친구 자임의 별명처럼 방탕한 생활이라고 할 정도의 행적을 보이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케말은 퓌순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나는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또 걱정스러웠다. 나의 영혼이 이 행복을 진지하게 여기는 위험과 가볍게 여기는 통속성 사이에 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 머리는 혼란스러워졌다.(86쪽)”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퓌순을 진지하게 사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퓌순을 약혼식에 부른 것은 그의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한편 퓌순이 사라진 다음에 그녀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으로 보입니다. ‘눈에서 벗어나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는 유명한 말처럼 보이지 않으면 불같던 사랑도 조금씩 식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사라진 알베르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27835>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 독백하면서도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 사랑했었노라고 중얼거리는 주인공을 보면 정신이 온전한지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파묵 역시 대화체로 풀어가던 이야기를 사라진 퓌순의 뒤를 쫓는 케말의 행적과 생각의 흐름은 프루스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아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부에서는 사라졌던 퓌순이 최근 결혼한 상태로 다시 등장하는데까지입니다. 다시 나타난 퓌순과 케말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아주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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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업의 선택
짐 콜린스 & 모튼 한센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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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연구의 세계적 석학 짐 콜린스와 모튼 한센의 신작 <위대한 기업의 선택>을 추천받으면서 기업경영과는 거리가 먼 제가 읽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주로 성공한 기업들의 원천적 힘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연구를 통하여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의 작품으로는 처음 읽게 되는 이 책에서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맡게 되는 조직관리업무를 비롯하여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원칙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실제로 기업을 경영하시는 독자라면 기업경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이면서도 결정적인 팁을 요약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우선 여는 글이 아주 강렬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창조할 수 있다.(11쪽)”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미리 가정하여 대응방안을 마련해두면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이를 견뎌낼 수 있다는 실용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들의 삶의 궤적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이를 따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평범한 기업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탁월한 성과를 낸 기업 7개를 선정해서 10X기업이라 이름붙이고 이들 기업의 성공요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0X기업이란 1972년부터 2002년까지 30년간의 기간동안 동종업계의 주가지수를 최소 10배 이상 앞지른 기업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1972년 이들 기업의 주식을 1만달러어치 사들였다면 2002년에 600만달러 이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극점 도달을 두고 아문젠과 스콧이 경쟁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문젠은 남극점을 성공적으로 밟고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만, 스콧은 남극점을 향하여 먼저 출발하였지만, 극점에는 아문젠보다 늦게 도착하였고, 귀환도중에 모든 대원들이 사망하는 불상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대응을 한 두 사람의 전문가들은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저자들은 아문젠과 스콧의 탐험과정을 예로 들어 10X리더들은 맡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델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리더들은 광적인 규율, 실증적 창의성 그리고 생산적 피해망상이라고 하는 세 가지 덕목에 단계5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광적인 규율이라는 덕목이 지나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규율은 엄격한 통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본질적으로 ‘일관된 행동’을 의미하며 가치, 장기적 목표, 행동기준, 일처리 방식 등에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일관성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38쪽) 실증적 행동이라 함은 행동하는데 분석을 바탕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증을 토대로 결단력 있게 행동한다는 것(46쪽)을 의미하며, 생산적 피해망상은 자신이 소유한 무엇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위대하고 자신보다 큰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장애로 등장할 상황에 대하여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51쪽)을 의미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10X리더들을 “피해망상적이고 신경증적이며 괴짜 같은 사람(PNF, paranoid, neurotic, freak의 줄임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보인 여러 행보들 가운데 20마일 행진, 총 먼저 쏘고 대포쏘기, 데스라인 위에서 이끌기, SMaC 레시피 등을 공통점으로 뽑아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정리해보면, 마라톤을 뛸 때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 결승점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담은 20마일 행진, 우리말로 하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의미의 총 먼저 쏘고 대포 쏘기, 배수진을 치면 전투력이 급상승한다는 의미를 담은 데스라인 위에서 이끌기가 있습니다. SMaC 레시피는 구체적(specific), 체계적(methodical), 그리고 지속적(consistent)인 실행방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소위 말하는 ‘행운’이라는 요소도 다루고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행운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매 장의 말미에 앞서 설명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둠으로써 읽는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책의 말미에는 책을 읽으면서 가질 수 있는 의문을 풀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 책은 과거에 대한 것인가요, 아니면 미래에 대한 관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과거를 연구했지만, 이 책은 미래를 앞서가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은 당연히 기업경영에 써먹을 수 있는 전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기업경영과 관련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조직관리 혹은 삶을 살아가는 전략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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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 채소, 인류 최대의 스캔들
리베카 룹 지음, 박유진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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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질이 많은 과일과 채소의 중요성이 지금처럼 강조되었던 적이 있나 싶었습니다. 지나친 육식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서구에서는 육식 중심의 식단이 구성되는데 반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은 채식에 의존하는 식단을 구성해왔기 때문에 육류의 섭취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벌써 육식의 문제점을 논하게 되었으니 금석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육식의 폐해가 논의된 것은 근대 들어서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19세기 미국의 채식주의자 실베스터 그레이엄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에 앞선 ‘엄청난 악행과 끔찍한 폭행은 과도한 육식이 초래한 결과였다.(12쪽)”는 것이며, 19세기 미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콜레라 발생은 고기, 기름, 소금, 향신료, 케첩, 머스터드, 독한 술에 탐닉하는 바람에 신체가 약해진 미국인들이 범죄, 성적 죄악, 정신·육체질환의 위험에 노출된 탓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인데, 의학적으로 검증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리베카 룹이 쓴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에서는 여기 예를 든 것처럼 20종의 야채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망라해서 아주 흥미롭게 풀어놓고 있는 읽을거리입니다. 저자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채소에는, 오이, 셀러리, 고추, 양파, 아스파라거스, 빈(콩), 비트, 양배추, 당근, 옥수수, 가지, 상추, 멜론, 완두콩, 감자, 호박, 래디시, 시금치, 토마토, 순무입니다.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채소들입니다만, 셀러리, 아스파라거스와 같이 최근에 우리 밥상에 오른 채소도 있는가하면 비트나 래디시와 같이 여전히 생소한 채소들도 있습니다.

 

앞서도 동서고금의 자료들을 망라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각 채소들에 엮인 뒷이야기에서 뽑아낸 제목들이 기발하다는 점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옥수수, 흡혈귀를 만들어내다’라는 제목을 읽다보면 옥수수와 흡혈귀가 어떻게 연결이 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참거리로 즐겨 먹는 옥수수에는 라이신과 트립토판이 부족하며 옥수수에 들어있는 니아신이 다른 분자와 단단하게 결합하고 있어 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은 니아신이 부족하기 쉽고, 니아신이 부족하면 펠라그라에 잘 걸린다는 것입니다. 펠라그라병에걸린 환자는 햇볓에 민감하고, 혀부종, 치매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장기간에 걸쳐 이 소모성 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유럽 흡혈귀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옥수수의 제목에 대한 설명은 그나마 어느 정도의 분량을 들여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하는 ‘당근,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끌다’는 제목의 설명은 단지 한 줄에 불과합니다. “아가멤논의 병사들이 트로이 목마 안에서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아작아작 먹었다는 당근도…(186쪽)”가 전부이니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으로 숨은 글씨 찾기라도 하는 기분입니다.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오래된 옛날의 음식 레시피에서부터, 여기 예를 들고 있는 채소들이 원형이 되는 야생종이 언제쯤 우리 밥상에 오르게 되었는지, 야생종을 처음 채소화한 지역으로부터 글로벌하게 퍼져나간 경로(주로 신대륙과 유럽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제한점은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들의 소소한 형제들까지도 들어서 설명하는 친절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라틴어로 된 어려운 학명을 늘어놓다 보니 쉽게 읽혀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채소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탁에서 화제를 풍성하게 해줄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토불이와 제철음식이 좋다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습니다. 대규모 농장에서 재배되어 국경을 넘어서 유통시키는 근래의 식품유통방식으로 인하여 무너져 가고 있는 지역식품과 농장의 쇠퇴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으로 내놓고 있는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자고 하는 캠페인입니다. 지역농산물을 먹는 사람을 로커보어(Locavore)라고 한다니 말입니다.

 

가끔 빈혈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발견한 것도 큰 수확입니다. 시금치가 붉은 고기보다도 철분이 많이 들어있는 채소라는 점입니다. 다만 그냥 먹어서는 전체의 5%밖에 흡수할 수 없어 오렌지 주스와 같이 비타민 C가 풍부한 음식을 같이 먹으면 흡수량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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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철학의 개념과 이해
헨릭 월프 지음, 이종찬 옮김 / 아르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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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시안에 [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 특히 의학윤리와 의학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보겠다는 거창한 뜻을 세웠습니다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의도한 만큼 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소리] 2년차를 여는 책은 덴마크 의학철학계에서 나온 의학철학의 입문서라고 할 <의철학의 개념과 이해>입니다. 초판 서문에서 “의학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24쪽)”라고, 저자들이 밝히고 있어 보다 일찍 이 책을 소개해드렸어야 한다는 자책감도 가지게 됩니다.

 

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술적 성격이 강한 원시종교에 그 뿌리가 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질병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 존재에게 기대기 위하여 주술적 방법을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늘어가면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질병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리스 시대에 이르면서 의학이 철학적 사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싹텄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치유의 기술로서의 ‘의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과정을 거쳐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한편으로 의학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철학과의 인연을 완전하게 끊어낼 수는 없다는 인식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의술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생명윤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체계화되고 있는 생명윤리학에서는 “의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생명윤리학의 주제가 철학과 의학, 법학, 사회학, 공공정책, 교육 및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갈수록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AC 그레일링 지음, ‘새 인문학 사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7909).

 

뿐만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서도 의학과 다시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소리]를 통해서 소개해드렸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4996>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철학과 김정희교수님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사유하는 철학이 인간의 심리적 고통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 사상의 중심개념이라 할 동고(同苦; Mitleid)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 ‘치료의 해석학’으로 정리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의학철학자, 철학자 그리고 정신의학자가 같이 쓴 의학철학의 개념서라고 할 이 책의 원제는 입니다. 제목을 ‘의학철학’이 아니라 ‘의철학’으로 옮긴 것에서 이 책을 번역하신 이종찬교수님의 독특한 해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종찬교수님은 의(醫)가 의학(medicine), 의술(healing), 의료(medical care)의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학은 의(醫)의 지식체계를, 의술은 진료행위를, 의료는 의(醫)의 사회적 실천을 각각 의미하는 것인데, 세 가지 요소가 상호 연관을 맺어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 그 사회는 바람직한 의(醫)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종찬 지음, 한국에서 醫를 논한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979553)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의학은 과학인 동시에 테크놀로지이고 예술’이라고 보고 있어 옮긴이의 견해와 일치한다 하겠습니다.

 

저자들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5326>를 인용하여 ‘의학의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의학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현대의학은 19세기에 비로소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이론은 단순한 사색에 근거하고 있어 동양의학이나 서양의학은 크게 차이나는 점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양의학자들은 19세기 들어서 건강할 때와 병에 걸렸을 때의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세기는 바로 서양의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변곡점이며 현대의학이 전통의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서양의학에서의 기계론적 질병모델은 정상과의 차이를 어디에서 나눌 것인가 하는 역치문제 등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기능적 결손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합리적 기준으로 일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과 질병 사이의 정밀한 선은 대개 학문적으로 정해집니다.(101쪽)”라고 부어스가 말한 것처럼 기계론적 질병모델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임상적 근거를 토대로 하여 기준이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그 정밀하다는 선에도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한계는 피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일부에서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생각은 환상”이라는 반박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역학과 산업의학, 특히 사회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환경요인과 사회적 요인 역시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질병관에 대한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변곡점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학과 사회학 간의 경계영역에서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 질병관이 발전을 거듭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된 치료방법이 임상에서 적용되는 와중에서도 실재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치료방법을 선택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임상의사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비롯하는 느낌이 새로운 방법론이 탄생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임상현장에서는 경험론과 실재론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철학적, 의학적 논리로 설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가운데 정신의학에 대한 논의의 비중이 의외로 큰 것 같습니다. 정신의학이 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점부터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신질환을 정의하는데 있어 기계론적 질병관을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정신의학자인 샤츠는 “정신의학은 정신 질환을 연구, 진단 치료하는 의학의 전문 분야로 정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의미가 없으며 잘 못 내려진 정의이며,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과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관심이 없다. 실제로는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165쪽)”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정신과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질환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안’이 단지 정신적 증상이 아닌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의 근원적인 상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구성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사들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마음속의 동요, 알력, 부조화 내지는 불안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188쪽)”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에서 공감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해석학자들은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연주의적 틀 속에서는 한 인격체로서 인간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불안, 자유, 의지, 이해 등은 인간의 본질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충분하게 분석될 수 없다.(199쪽)”는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여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창된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논함에 있어 저자들은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임상실험>에 의하여 그들의 이론이 항상 검증되었다고 역설한다고 지적하면서 “(정신분석에서의) 매번의 경험은 그때마다 <이전의 경험>에 의하여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추가적인 입증 사례로 간주되었다. 나는 관찰이 무엇을 입증해주는가 자문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의 사례가 그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추측과 논박 1, 79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라고 통박하였습니다.

 

사실 다음과 같이 프로이트 자체가 검증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반대하는 그룹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의 검증을 위한 당신의 실험적 연구를 관심있게 검토해 보았지만, 이러한 검증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관찰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실험에 의한 검증이 불필요하다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34쪽)”

 

저자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몇 개의 증례 정도만 발표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방법이 주목할 만한 유용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의학윤리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의학적 결정이 내려져야 할 것이므로 철학으로서의 의학윤리에 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자들은 덴마크의 한 종합병원에서 경험한 의학적 윤리문제의 심각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가치판단을 내포하지 않은 의학적 문제는 윤리적 문제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분류하여 보았을 때 입원한 환자의 4분의 1에서 치료과정에서 내리는 결정이 윤리적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후가 좋지 못할 만성 환자에게 진단과 치료를 줄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할 때, 또는 운전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된 환자가 자신의 차를 운전하기를 원하는 경우,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전혀 없는 환자가 요양시설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할 때, 그리고 동료의사에게 잘못 치료받은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대한 다른 의사의 견해를 알고 싶어 할 때(247쪽)”, 당신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 의사는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 환자를 위해 어떤 행동이 최선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 의사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의무가 따르는데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 사회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의무 그리고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고민의 결과를 가지고 있어야 막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학윤리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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