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철학의 개념과 이해
헨릭 월프 지음, 이종찬 옮김 / 아르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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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시안에 [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 특히 의학윤리와 의학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보겠다는 거창한 뜻을 세웠습니다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의도한 만큼 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소리] 2년차를 여는 책은 덴마크 의학철학계에서 나온 의학철학의 입문서라고 할 <의철학의 개념과 이해>입니다. 초판 서문에서 “의학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24쪽)”라고, 저자들이 밝히고 있어 보다 일찍 이 책을 소개해드렸어야 한다는 자책감도 가지게 됩니다.

 

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술적 성격이 강한 원시종교에 그 뿌리가 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질병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 존재에게 기대기 위하여 주술적 방법을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늘어가면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질병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리스 시대에 이르면서 의학이 철학적 사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싹텄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치유의 기술로서의 ‘의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과정을 거쳐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한편으로 의학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철학과의 인연을 완전하게 끊어낼 수는 없다는 인식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의술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생명윤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체계화되고 있는 생명윤리학에서는 “의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생명윤리학의 주제가 철학과 의학, 법학, 사회학, 공공정책, 교육 및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갈수록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AC 그레일링 지음, ‘새 인문학 사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7909).

 

뿐만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서도 의학과 다시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소리]를 통해서 소개해드렸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4996>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철학과 김정희교수님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사유하는 철학이 인간의 심리적 고통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 사상의 중심개념이라 할 동고(同苦; Mitleid)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 ‘치료의 해석학’으로 정리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의학철학자, 철학자 그리고 정신의학자가 같이 쓴 의학철학의 개념서라고 할 이 책의 원제는 입니다. 제목을 ‘의학철학’이 아니라 ‘의철학’으로 옮긴 것에서 이 책을 번역하신 이종찬교수님의 독특한 해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종찬교수님은 의(醫)가 의학(medicine), 의술(healing), 의료(medical care)의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학은 의(醫)의 지식체계를, 의술은 진료행위를, 의료는 의(醫)의 사회적 실천을 각각 의미하는 것인데, 세 가지 요소가 상호 연관을 맺어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 그 사회는 바람직한 의(醫)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종찬 지음, 한국에서 醫를 논한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979553)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의학은 과학인 동시에 테크놀로지이고 예술’이라고 보고 있어 옮긴이의 견해와 일치한다 하겠습니다.

 

저자들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5326>를 인용하여 ‘의학의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의학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현대의학은 19세기에 비로소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이론은 단순한 사색에 근거하고 있어 동양의학이나 서양의학은 크게 차이나는 점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양의학자들은 19세기 들어서 건강할 때와 병에 걸렸을 때의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세기는 바로 서양의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변곡점이며 현대의학이 전통의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서양의학에서의 기계론적 질병모델은 정상과의 차이를 어디에서 나눌 것인가 하는 역치문제 등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기능적 결손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합리적 기준으로 일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과 질병 사이의 정밀한 선은 대개 학문적으로 정해집니다.(101쪽)”라고 부어스가 말한 것처럼 기계론적 질병모델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임상적 근거를 토대로 하여 기준이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그 정밀하다는 선에도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한계는 피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일부에서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생각은 환상”이라는 반박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역학과 산업의학, 특히 사회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환경요인과 사회적 요인 역시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질병관에 대한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변곡점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학과 사회학 간의 경계영역에서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 질병관이 발전을 거듭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된 치료방법이 임상에서 적용되는 와중에서도 실재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치료방법을 선택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임상의사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비롯하는 느낌이 새로운 방법론이 탄생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임상현장에서는 경험론과 실재론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철학적, 의학적 논리로 설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가운데 정신의학에 대한 논의의 비중이 의외로 큰 것 같습니다. 정신의학이 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점부터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신질환을 정의하는데 있어 기계론적 질병관을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정신의학자인 샤츠는 “정신의학은 정신 질환을 연구, 진단 치료하는 의학의 전문 분야로 정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의미가 없으며 잘 못 내려진 정의이며,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과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관심이 없다. 실제로는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165쪽)”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정신과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질환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안’이 단지 정신적 증상이 아닌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의 근원적인 상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구성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사들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마음속의 동요, 알력, 부조화 내지는 불안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188쪽)”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에서 공감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해석학자들은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연주의적 틀 속에서는 한 인격체로서 인간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불안, 자유, 의지, 이해 등은 인간의 본질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충분하게 분석될 수 없다.(199쪽)”는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여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창된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논함에 있어 저자들은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임상실험>에 의하여 그들의 이론이 항상 검증되었다고 역설한다고 지적하면서 “(정신분석에서의) 매번의 경험은 그때마다 <이전의 경험>에 의하여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추가적인 입증 사례로 간주되었다. 나는 관찰이 무엇을 입증해주는가 자문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의 사례가 그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추측과 논박 1, 79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라고 통박하였습니다.

 

사실 다음과 같이 프로이트 자체가 검증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반대하는 그룹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의 검증을 위한 당신의 실험적 연구를 관심있게 검토해 보았지만, 이러한 검증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관찰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실험에 의한 검증이 불필요하다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34쪽)”

 

저자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몇 개의 증례 정도만 발표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방법이 주목할 만한 유용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의학윤리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의학적 결정이 내려져야 할 것이므로 철학으로서의 의학윤리에 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자들은 덴마크의 한 종합병원에서 경험한 의학적 윤리문제의 심각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가치판단을 내포하지 않은 의학적 문제는 윤리적 문제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분류하여 보았을 때 입원한 환자의 4분의 1에서 치료과정에서 내리는 결정이 윤리적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후가 좋지 못할 만성 환자에게 진단과 치료를 줄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할 때, 또는 운전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된 환자가 자신의 차를 운전하기를 원하는 경우,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전혀 없는 환자가 요양시설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할 때, 그리고 동료의사에게 잘못 치료받은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대한 다른 의사의 견해를 알고 싶어 할 때(247쪽)”, 당신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 의사는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 환자를 위해 어떤 행동이 최선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 의사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의무가 따르는데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 사회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의무 그리고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고민의 결과를 가지고 있어야 막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학윤리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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