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1 (양장) - 반지원정대 J.R.R. 톨킨 시리즈 (일러스트판) 1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번.김보원.이미애 옮김, 앨런 리 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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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매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암시 혹은 은유를 통해서 관객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저처럼 감각이 떨어지는 관객은 아무래도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전이 따로 있는 영화의 경우는 원전을 읽어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TV나 케이블을 통해서 지금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판타지 영화를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아이들 덕분에 같이 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원전을 통하여 원저자 톨킨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제대로 새겨보자는 아내의 권유로 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모두 일곱권이나 되는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만, 최근 끝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의 은근과 끈기로 읽어나가 볼 생각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느꼈던 것입니다만, 절대반지가 호빗족인 빌보를 거쳐 프로도의 손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책을 읽으면서 풀렸다는 것입니다. 톨킨의 설명에 따르면 호빗족은 “몸집이 작은 종족으로, 난쟁이보다 작다. 다시 말해 실제로 키가 난쟁이보다 작지는 않지만 체격이 좀 더 벌어진 셈이다 그들의 키는 우리 척도로 60센티미터에서 120센티미터 사이로 일정치 않다.(31쪽) 다투기를 싫어하고 또 살아 있는 생물은 장난삼아 죽이지도 않는 그들이었지만, 궁지에 처하면 담대했고 필요할 때는 무기도 다룰 줄 알았다.(39쪽)”는 것입니다. 넉넉한 몸집만큼 온화한 성품이지만 인내심이 대단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배울만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등장인물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호빗족으로부터 인간, 난쟁이 그리고 요정, 여기에다가 모르도르를 중심으로 하는 사우론의 악의 세력에 속하는 트롤과 오르크 등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첫 번째 이야기는 ‘반지원정대’라는 부제가 달린 만큼 절대반지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동안 숨어있던 악의 세력이 절대반지를 손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그들의 야심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절대반지를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는 간달프의 조언에 따라 프로도와 그 친구들이 반지원정대를 꾸려 고향 샤이어를 떠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간달프는 ‘불의 산 오로드루인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산의 틈을 찾아 그 곳에 던져 버리는 것(148쪽)’이 절대반지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해주는데 절대반지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골룸이나 빌보의 행적을 보면 반지는 그 주인의 소유욕을 끌어올리는 등 다양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프로도 역시 반지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를 없애야 한다는 대의에 쉽게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반지원정대와 함께 가는 길, 특히 톰 봄바딜과 그의 아내 금딸기가 사는 곳은 바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금딸기는 강물의 딸이라고 합니다. 프로도의 노래에서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오, 버들가지처럼 날씬하고, 강물보다 맑은 여인! 오, 흐르는 물가의 갈대, 아름다운 강물의 딸이여! 오, 봄 지나면 여름,그리고 다시 봄이 오는구나! 오, 폭포에 이는 바람, 나뭇잎들의 웃음소리!(278쪽)” 한 장면 더... “바로 그때 그들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물결치듯 귓가에 들여 왔다. 바위 턱 바로 위에서 그녀가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현란한 광채를 띠며 휘날렸고, 그녀가 춤추는 동안 발밑 풀잎들이 이슬방울처럼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300쪽)” 마치 눈앞에 펼쳐진 자연에서 어딘가 특별한 장소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출발과 함께 하기로 한 마법사 간달프가 같이 하지 못하는 바람에 묵은 숲, 고분구릉, 달리는 조랑말 여관이 있는 브리 등지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반지원정대는 톰 봄바딜, 성큼걸이 들이 적적할 타이밍에 등장하여 도와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데... 다음 편에는 또 어떤 어려운 장면이 등장하게 될 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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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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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도 다양한 시각이 있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는 일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하기도 하고, 각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어떻거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국민들이 풍요한 삶을 즐길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사는 나라는 왜 잘 살고 못 사는 나라는 왜 못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마다 시대에 따라 흥성하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국운이 기울어 어려운 시절도 있는데, 다스리는 집권층은 변해도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이 흩어지는 경우도 있고 멸종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 한 나라의 성패를 결정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제시되어왔습니다.

 

대표적인 이론은 지리적 위치 가설입니다.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의 열대지역에 위치한 반면 대부분의 잘 사는 나라가 온대지역에 위치하고 있대서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최근 빠르게 경제적 성장을 이룬 싱가포르, 보츠와나와 같은 나라에 적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총, 균, 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0611>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륙간 환경자원의 분포 차이에서 국가간 불평등이 기인한 것이라는 일종의 지지적 위치 가설 역시 인접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현상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적 가설이나 무지설 같은 경우는 인종차별적 시각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논의가치가 없다는 반박도 나오고 있습니다.

 

MIT 경제학과 대런 애쓰모글루교수와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제임스 A. 로빈슨교수는<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통하여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나뉘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로마제국, 마야 도시국가, 중세 베네치아,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잉글랜드,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증거를 토대로 실패한 국가와 성공한 국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지리적, 역사적, 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바로 ‘제도’의 차이라는 간결한 답안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도다. 따라서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인데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착취적 경제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결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의 사례들을 통하여 입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우리나라의 발전모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이 경제를 운용한 시기가 있었지만, 당시 착취적 경제제도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운용해왔기 때문에 지속적 발전이 가능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또한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에서 사람들이 사는 형편이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점을 비교하면서 또한 남한과 북한 사람들의 삶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바로 착취적 경제제도와 포용적 경제제도가 보이는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보도를 통하여 야간에 한반도를 찍은 위성사진에서 불빛으로 환한 윤곽을 나타내는 남한과는 달리 어두움에 빠져 있는 북한의 모습이 나타내고 있는 안타까운 사진이 남북한의 경제수준을 극명하게 비교하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러시아가 미국과 비교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소위 권위주의 정치제도가 실시하는 계획경제는 일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시기가 있을 수 있으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경쟁이 없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역시 러시아 모델을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성장세가 꺽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지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혁신적 경제운영이 가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복지수준을 달성하기 위하여 경제발전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면 권위적 정치가 아닌 사회적 요인에 의한 착취적 경제제도가 운영되는 결과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복지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704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아주 쉽게 쓰여져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고 이론이 단순하기 때문에 이해가 쉽게 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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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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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처럼 책읽는 버릇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 젊어서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옮겨가더니 최근에는 인문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 책읽기에서 비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기도 합니다.

 

소설쓰기를 지망하시는 분들을 위한 안내서나 교육과정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과문한 탓인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거나 젊어서는 독서회에 참여해서 책을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누는 토론회를 통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소설가>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2008년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은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밝힌 자신의 문학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 35년에 달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은 나의 소설 읽기 경험도 담겨 있지만 대부분 나의 소설 쓰기에 관한 내용입니다.(177쪽)”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읽어도 크게 도움이 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라포르시안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이 엄청난 독서양을 자랑하시는 분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독서의 깊이에 놀라곤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그림그리기에서 소설쓰기로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11쪽)” 그리고 보니 파묵씨의 책읽기와 비교해보면 저의 책읽기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이라는 논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는 여러 개의 비슷한 의미로 번역소개되었지만, 옮긴이는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소개하는 이유는 소설을 읽거나 쓰는 사람을 나누는 파묵의 기준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인식하지 않고, 즉 소설을 쓰는(읽는) 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소박한’ 작가(독자)로 규정하고, 반대로 소설을 읽거나 쓸 때, 소설에 사용된 기법과 독서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면 ‘성찰적인’ 작가(독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20쪽)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저자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공감하십니까? 1. 전체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딘가에 있을 모티프와 아이디어, 의도, 중심부를 찾습니다. 2.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하여 책이 말하는 것을 추적해 갑니다. 3. 소설 속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지 상상인지를 궁금해집니다. 4. ‘현실도 이럴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서와 같을까?’를 궁금해 합니다. 5. 단어와 비유와 문장에 숨어 있는 음악을 음미합니다. 6. 주인공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작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7.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며 작가와 공범 관계를 형성합니다. 8.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기 시작합니다. 9.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습니다.

 

집착적으로 보이지만 순수한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순수박물관>을 발표한 다음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40쪽)”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분명 케말이 소설가 파묵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4300>에서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소설의 기능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파묵은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를 꼬투리로 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박물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소설은 기억을 보완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과 기억의 관계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중국 작가 모옌이 수상했다고 해서 스웨덴 한림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내온 인물이라는 이유라고 하는데,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문학의 독립성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과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묘하게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반(半)폐쇄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61쪽)”

 

소설의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작가는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73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주변 풍경과 사건과 배경에 녹아들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배회하고, 머물고, 한데 뒤섞여 그 일부가 되는 순간,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9422>에 등장시킨 괴테를 빌어 다음과 같이 불멸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불멸, 81쪽)”

 

자존감, 차별화 의식, 정치 등을 화두로 한 소설의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도 공감되는 점이 많습니다. 아마도 소설 <순수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순수박물관 권2, 113쪽)” 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사물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소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작가의 눈으로 통하여 언어의 형태로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은 기획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면 프루스트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물론 살롱에 드나드는 인물들의 의상에서부터 말투 등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 역시 최근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국일미디어판으로 읽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민음사판으로 읽을 기회가 생겨서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 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147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작가가 처음 소설을 쓰도록 이끄는 직감, 사고,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의도하는 중심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그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심부를 일찍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중심부가 옮겨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보르헤스가 쓴 <모비딕>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작가의 대표작 <순수박물관>에서 중심부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순수박물관 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제가 ‘약혼녀가 아닌 여성과의 관계가 순수할까?’라는 리뷰제목을 달 정도로 순수해보이지 않은 케말의 행적을 볼 수 있었다면 <순수박물관 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케말의 지순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퓌순의 마음을 다시 얻는데 성공하지만 소설의 중심부는 다시 반전해서 순수박물관으로 대상이 옮겨간다는 정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뜻을 제대로 읽고, 더 나아가 발전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유념할 점들이 잘 설명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소설 읽는 즐거움을 중심부를 찾는 노력에서 시작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목록을 소개하고 있어 앞으로의 책읽기에 참고할 수 있는 덤을 얻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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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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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다보니 걷을 수 없는 신세가 안타깝습니다. 6월에 보스톤학회에 다녀오면서 얻은 무릎부상으로 걷기를 자제하라는 주치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걷기에 좋은 코스를 따라 걷곤 했습니다(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uid=yang412&folder=42). 역시 걷기에는 청명한 가을이 제격입니다.

 

걸으러 나갈 수 없으니 걷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아쉬움을 달래보려 했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의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가 쓴 <걷기 예찬>입니다. 저자 역시 ‘움직이지 않고 오래 걷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걷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금 장소를 탐험과 명상의 장소로 탈바꿈시켜 가지고 그 장소에서 장기간에 걸침 미시적 여행을 시작한다. (…) 비록 공간은 협소해 보이지만 그래도 매우 다양한 여정이 제공된다.(86쪽)” 여기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에세이 모음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은 철학적이고 진지한 글 모음입니다.

 

저자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9쪽)”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걷는 이유는 건강을 위한 목적이 큰 탓에 아직은 걷는 매력을 충분히 느끼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써내야 하는 글이 있는 경우에는 걸으면서 글의 틀을 생각하고 다듬는 경우도 있어 저자가 의미하는 걷기의 즐거움에 가까운 경우도 없지는 않은 듯합니다.

 

<걷기 예찬>에 실려 있는 글들은 성격에 따라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걷는 맛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걷는 맛’에 담겨있습니다. ‘지평을 걷는 사람들’은 구도적 걷기에 나선 분들에 관한 글모음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도시에서 걷는 맛에 관한 글은 ‘도시에서 걷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으면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 승화감은 ‘걷기의 정신성’에 담았습니다.

 

걷는 맛은 어떤 것일까요? 다른 지방을 여행할 때는 대개 비행기나 차량을 이용해서 현지에 도착한 다음 둘러보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장소는 대개 관광지이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걸어서, 조금 발전시키면 자전거로 여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곳의 보통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 생활 그리고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21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걸으면서 동행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저 묵묵히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저자는 이런 경우를 다음 처럼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 걷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동차의 소음과 꽝꽝대는 카라디오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외출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68쪽)”

 

저자는 걷기에 관한 많은 저자들의 다양한 글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도 하고 있어 걷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걷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복잡하고 바쁜 일상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고려하면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도시에서 걷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예기치 않은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취재를 위하여 외국의 도시를 방문하는 대기자는 당장 취재원으로 달려가는 피라미들과는 달리 낯선 도시의 거리를 목적없이 걸으면서 그 도시의 구체적인 삶을 느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처음 방문하는 외국의 도시에 도착하면 거리로 나서기 전에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도시가 안전한지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시골길의 여유로움을 찬양한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바람부는 길에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6006>에서 도시 역시 우리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냄새를 풍기고, 감촉을 느끼게 한다고 하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말에 집을 나서 걷는 경우와 달리 여러 날을 머물게 되는 여행을 하는 경우 여행지에서 겪는 대소사를 글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이런 점을 ‘글로 쓰는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간추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 흐려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여행의추억을 기억에만 갈무리하는 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행하면서 얻은 느낌은 바로바로 글로 정리하고 사진을 덧붙여 놓으면 좋은 기록이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걸을 수 없는 저의 안타까운 시간을 위로해준 좋은 읽을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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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되찾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드디어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읽기를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을 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결승테이프를 끊은 셈입니다. 6월초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장장 4개월이 조금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철들 무렵부터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졌지만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책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신경과학자 조나 레러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를 읽으시고 신경과학에 매료되었다고 적으셨습니다. 당연히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구해서 읽게 되었고, 조나 레러박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에서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구절에서 강한 끌림을 얻었던 것입니다.

 

마침 아내 역시 구입해두곤 펼쳐보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1)>를 서가에서 찾아내 읽기 시작한 것이 프루스트 읽기 대장정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버킷리스트에 0순위에 올라있던 숙제를 마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니 박완서선생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노릇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은 대하소설을 마무리하는 부분인 만큼 프루스트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많은 인물들이 죽고 나이 들어 퇴장하고 있습니다(주인공의 절친 로베르 생 루 역시 전쟁터에서 부하를 구하기 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만, 주요 등장인물들이 전장터에 나설 수 없는 여인들인 까닭에 여전히 무대는 파리에 있는 살롱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보았을 때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될 무렵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최소 2000만명에서 최고 1억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는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이 “지난날 스완부인이 ‘꼼작없이 진저리나는 인플루엔자(influenza)에 걸리고 말았어요’하고 말했듯이…(190쪽)”라는 인용문 하나로 처리되고 있어 놀라울 따름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내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한(恨)을 덜어주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52쪽)”이라고 한탄했던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모두 여섯 편으로 나누어 전개되는 이야기들에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변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되찾은 시간’은 주인공이 노년에 이른 시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요 등장인물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교계를 그려내고 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저 역시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도하여 35년 전에 만든 대학동아리가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그 이야기들이 지금 젊은 후배들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일어 언젠가 그 옛날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려 하였지만, 기억이 분명하지 않거나 사건 현장에 없었던 경우가 난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동아리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옛날을 회고하여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스완네집 쪽으로’에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에 대한 이야기는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한 조각 마들렌의 맛이라거나 콩브레나 발베크를 산책하면서 얻은 느낌은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250쪽)”고 적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중요한 점은 프루스트의 작가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에 대한 저자의 단상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순간이 쌓여 만든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점입니다. 프루스트 역시 좀이 슨 자신의 노트를 인용하면서 “노역으로 분장한 얼굴로부터 잃어버린 시간의 관념이 주어지자마자, 내가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노릇(481쪽)”이라고, 시간에 대한 관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이라도 나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만한 오랜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면, 우선 거기에 공간 속에 한정된 자리가 아니라, 아주 큰 자리, 그와 반대로 한량없이 연장된 자리 ‘시간(temps)' 안에 차지하는 인간을 그려보련다.(499쪽)”고 오래 끌어온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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