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되찾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드디어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읽기를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을 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결승테이프를 끊은 셈입니다. 6월초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장장 4개월이 조금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철들 무렵부터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졌지만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책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신경과학자 조나 레러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를 읽으시고 신경과학에 매료되었다고 적으셨습니다. 당연히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구해서 읽게 되었고, 조나 레러박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에서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구절에서 강한 끌림을 얻었던 것입니다.

 

마침 아내 역시 구입해두곤 펼쳐보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1)>를 서가에서 찾아내 읽기 시작한 것이 프루스트 읽기 대장정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버킷리스트에 0순위에 올라있던 숙제를 마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니 박완서선생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노릇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은 대하소설을 마무리하는 부분인 만큼 프루스트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많은 인물들이 죽고 나이 들어 퇴장하고 있습니다(주인공의 절친 로베르 생 루 역시 전쟁터에서 부하를 구하기 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만, 주요 등장인물들이 전장터에 나설 수 없는 여인들인 까닭에 여전히 무대는 파리에 있는 살롱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보았을 때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될 무렵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최소 2000만명에서 최고 1억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는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이 “지난날 스완부인이 ‘꼼작없이 진저리나는 인플루엔자(influenza)에 걸리고 말았어요’하고 말했듯이…(190쪽)”라는 인용문 하나로 처리되고 있어 놀라울 따름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내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한(恨)을 덜어주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52쪽)”이라고 한탄했던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모두 여섯 편으로 나누어 전개되는 이야기들에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변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되찾은 시간’은 주인공이 노년에 이른 시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요 등장인물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교계를 그려내고 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저 역시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도하여 35년 전에 만든 대학동아리가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그 이야기들이 지금 젊은 후배들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일어 언젠가 그 옛날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려 하였지만, 기억이 분명하지 않거나 사건 현장에 없었던 경우가 난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동아리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옛날을 회고하여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스완네집 쪽으로’에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에 대한 이야기는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한 조각 마들렌의 맛이라거나 콩브레나 발베크를 산책하면서 얻은 느낌은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250쪽)”고 적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중요한 점은 프루스트의 작가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에 대한 저자의 단상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순간이 쌓여 만든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점입니다. 프루스트 역시 좀이 슨 자신의 노트를 인용하면서 “노역으로 분장한 얼굴로부터 잃어버린 시간의 관념이 주어지자마자, 내가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노릇(481쪽)”이라고, 시간에 대한 관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이라도 나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만한 오랜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면, 우선 거기에 공간 속에 한정된 자리가 아니라, 아주 큰 자리, 그와 반대로 한량없이 연장된 자리 ‘시간(temps)' 안에 차지하는 인간을 그려보련다.(499쪽)”고 오래 끌어온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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