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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지난봄에 떠난 발칸여행은 무려 아홉 나라, 아니 공항만 이용한 체코를 포함하면 무려 열 나라를 여행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강행군인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책읽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 루마니아의 브란, 그리고 알바니아가 포함된 여정을 고른 이유입니다. 여기에서는 알바니아의 경우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사실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는 크게 관심을 두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알바니아를 여행하게 된 것은 이스마일 카다레의 영향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읽었던 <돌의 연대기>가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어 읽은 <잘못된 만찬>, <피라미드>, <H파일>, <부서진 사월>에 이르면서 알바니아라는 나라를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발칸여행을 마치고서는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를 읽은 것은 제가 준비하고 있는 <양기화의 BOOK소리-유럽여행>에서 티라나와 함께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티라나를 여행하면서 해설사는 엔베르 호자가 이끌던 알바니아의 공산정권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독재를 펼치고 국민들을 억압했다고 설명했는데,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에서 당시의 알바니아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떠나지 못하는 여자>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극작가 루디안 스테파입니다. 극작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영감에 따라 작품을 쓰기보다는 당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써내야 하기 때문에 심사를 마칠 때까지 전전긍긍해야만 했던 모양입니다. 신작을 준비하던 루디안은 어느 날 당 위원회에 소환을 받았습니다. 작품에 관한 건으로 소환된 줄 알았던 그에게 판사는 ‘한 여성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절인다.’는 말처럼 은밀한 애정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당 위원회에서 문제가 된 여성은 최근에 자살한 린다B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루디안의 책에 저자의 헌사가 적혀있었고, 그녀의 일기에도 루디안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는 이유로 소환이 된 것입니다. 사실 루디안은 린다B라는 여성을 만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애정관계에 있던 미대생 미제나의 부탁으로 헌사를 적어주었을 뿐입니다.
문제는 린다B라는 여성이 구체제의 귀족으로 지방의 작은 도시를 떠나면 안 되는 유배의 형을 받은 상태이며 그녀의 유배형은 5년마다 재심을 받게 되지만 계속 연장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여성과 연관이 되어 있으니 루디안 역시 반역의 죄를 범한 것인지를 밝혀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린다B와 미제나는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로 학교를 졸업하고 미제나는 티라나로 진학을 하게 되었지만, 린다B는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린다B가 루디안을 추앙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미제나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하여 루디안에게 접근하였고, 린다B를 위하여 루디안의 책에 헌사를 받아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빈틈없이 감시를 받는 체제이지만 그 와중에서 이런저런 사랑도 이루어지고 사람들 간에 관계도 형성되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지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겠지요.
루디안이 린다B와 만나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린다B가 유방암영상검사를 받게 된 것과 관련하여 루디안이 린다B와 드리니호텔에서 만나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은 린다B는 이미 자살을 한 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면 루디안이 면담을 하는 정신과 의사가 감시자였고 주기적으로 지도자에게 보고서를 보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5년 뒤 지도자가 실각을 한 듯 광장에 있던 그의 동상이 끌어내려져 끌려 다니고, 루디안은 여전히 극장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린다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헌사를 적어 그녀에게 전합니다. 그가 바라는 대로 여자는 결국 책을 받았고, 죽음의 어둠 속에서 그들의 손가락이 살짝 차갑게 스쳤다고 합니다.
생사를 넘나들고, 이야기가 과거로 넘어가는 등 집중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줄거리를 놓칠 수도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만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도자는 그토록 끔찍한 독재를 펼쳐야만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