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 소소 1
남원상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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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가 한 바퀴 도는 세월을 술과 함께 보냈지 싶습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술을 마셨지만 역시 가장 많이 마신 술은 소주일 듯합니다. 제 나이쯤인 분들은 대체로 막걸리를 처음 마셔보게 될 듯합니다. 저도 그랬던 것 같구요. 소주는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마셔보았던 것 같습니다. 막걸리나 약주보다 훨씬 늦게 마시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주로 마시는 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역사를 챙겨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소주의 역사를 자세히 정리한 책은 처음 만났습니다. 언론인을 거쳐 지금은 홍보관련 일을 하시는 남원상 소장님은 집에서 주류도매업을 하는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막걸리와 약주를 만드는 양조장 사택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막걸리와 약주는 도수가 약해서 비교적 일찍 마실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소주는 독하고 쓰기까지 해서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요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30도까지 소주가 유통되던 시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에서는 소주의 기원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를 비롯하여 소주에 얽힌 선조들의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다루었고,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주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춰냈습니다.


소주 역시 중동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8-9세기 아랍의 연금술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이 고도의 증류장치를 개발하면서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포도소주를 약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아랍에서 개발된 포도소주의 이름은 땀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라크(araq)라고 불렀습니다. 이 증류기술은 세계각지로 전해지면서 원료에 따라서 소주, 고량주, 보드카, 위스키, 브랜디, 럼과 같은 증류주들이 탄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주는 포도소주의 증류기술을 전해받은 원나라에서 말젖으로 만든 아르히(arcki) 제조기술이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지봉유설>에는 소주는 원나라 때 생긴 술인데, 이것은 오직 약으로만 쓰고 함부로 마시지는 않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몽고군이 주둔하던 개성, 안동, 제주 등지에서 전통 소주가 만들어졌고, 개성지방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술이지만 과거에는 부자나 권세가들이나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의 침탈이 시작되면서 일본인이 들어와 소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서민들이 즐기던 막걸리 약주 등 가양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집에서 술을 담가마시기 보다는 소주를 사마시는 것이 쉽게 만들었습니다. 소주는 원래 燒酒라고 적던 것을 燒酎로 적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주는 원래 쌀이나 잡곡 등 곡물을 쪄서 누룩과 혼합하여 발효시킨 뒤에 소줏고리에서 증류하여 제조하는데, 3공화국 출범 직후에 쌀 생산이 줄어들면서 곡물을 소주의 원료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사탕수수의 찌꺼기인 당밀로 주정을 만들다가 그것마저도 고구마로 대체하여 만든 주정을 희석하여 소주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저도 그 과정을 기억합니다. 주정회사로부터 배정받은 주정을 희석하여 제조한 소주가 드럼통에 담겨서 배달되어 오면 1되짜리 유리병에 나누어 담고 세무서에서 찍어온 인지를 붙여서 출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지역별로 소주제조업체가 난립하여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군산에서는 임옥소주를 주로 마셨는데, 70년대 들어 시도별로 통폐합되면서 보배소주에 흡수되었습니다. 시도별로 팔리는 소주 이름은 진로(서울,경기), 보해(광주,전남), 금복주(대구,경북), 무학(경남), 대선(부산), 보배(전북), 경월(강원), 선양(대전,충남), 한일(제주), 충북(충북), 삼원(광주전남) 등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마셔본 듯합니다만, 지방에서 팔리는 상표보다는 전국적으로 팔리는 진로를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시 바뀌어 소주시장은 진로와 처음처럼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만, 취향도 세월 따라 바뀌는 것 같습니다. 내역을 알고 마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읽은 책읽이였습니다만, 흥미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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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
조정우 지음 / 세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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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선조25(1592)부터 선조31(1598)7년 사이에 벌어진 왜란과 관련한 정황을 기록한 책입니다. 임진년 전란이 발발하면서 영의정에 올랐지만 평양으로 향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지만 탄핵 후 면직되었습니다.


징비란 <시경>소비편(小毖篇)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後患)”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7년의 전란으로 백성들이 겪은 참혹한 삶을 돌아보고, 조정이 행한 실책들을 짚어 같은 전란을 겪지 않기 위해 남긴 반성의 기록입니다.

1591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상황을 엇갈리게 복명하였는데, 안이한 쪽으로 해석하여 대비하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왜군이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지원군으로 나온 명나라 장수들이 일본군과 내통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은 정황도 있습니다.


<소설 징비록>은 육지에서 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하여 활약한 정기룡, 곽재우, 김시민, 김덕룡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소설입니다. 왜군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간자들을 파견하여 조선 팔도의 정보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보를 수집했다고 해도 전장의 형편을 잘 아는 수비군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 다룬 정기룡, 곽재우, 김시민, 김덕룡 장군들은 지리는 물론 기후 등 제반사정을 꿰고 있어 왜군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리거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여 비교할 수 없는 전력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왜가 일으킨 전란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15967월 서출 왕족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도록 한 조정은 무얼 했는지 의문입니다. 전란의 와중에서도 당파싸움은 여전해서 잘 싸우고 있는 장수들을 파직시키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니, 아마도 선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수백 명의 군졸을 이끌던 조경장군이 1만이 넘는 왜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8명의 기병을 이끌고 왜군을 헤치고 들어가 조경장군을 구해 나왔다는 무용담은 사실일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마술이 신출귀몰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난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의 정황을 염탐할 정도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왜가 조선에 기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병으로 기병을 제압할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전란 당시 능력이 있는 장군들은 비교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왜군을 맞아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분전이 있어 왜군의 진군을 저지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을 만들었지만, 정작 관군은 적절치 않은 전술로 연전연패하여 밀려 올라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산에서 평양으로 보급선이 길어진 왜군 역시 전쟁을 지속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왜군에 넘어가 협력한 조선인이 적지 않았던가 봅니다. 아마도 조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전란에서 왜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까닭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반한 민심을 그나마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향리에 머물던 명망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전란으로 위기감을 가진 백성들을 규합하여 왜군에 대항하는 의병대를 조직하여 왜군을 괴롭혔습니다. 정규군이 아니면서도 게릴라전을 펼친 것이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뒷날 관직에 오른 분도 있지만,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두거나 전장에서 숨진 경우도 있으니, 선조의 조정은 전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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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석세스 - 폭발적 성장을 위한 50조 사업가의 대성공 원칙
댄 페냐 지음, 황성연.최은아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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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금 90만원으로 세운 회사를 바탕으로 5천억 원의 자산을 일궈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중 한 사람이자 세계적인 비즈니스 성공 코치인 댄 페냐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999년에 그 성공의 비결을 처음 세상에 발표했던 <슈퍼 석세스>를 보완하여 내놓았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비결, 비약적 도약의 이익(Quantum Leap Advantage, QLA)은 기업인수와 매각을 통하여 이룩한 것입니다.


기업을 인수하는데 있어서 핵심은 인수대상 기업의 자산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는 일, 그리고 인수한 기업의 가치를 높여 매각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정도 자세와 목표로는 그저 그런 인생밖에 살 수 없다!”라는 저자의 호통을 들어야 할 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창업을 하고, 남이 일군 기업을 인수하여 매각하는 과정에 생소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가하는 데만 2천만 원이 든다는 그의 기업 세미나는 젊은 사업가들로 붐빈다고 합니다. 기업인이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목적은 모두 다를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업인들이 저자의 말대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부를 노리고 기업을 인수하고 매각하는 일에 나선다면 과연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0의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슈퍼 석세스>는 큰돈을 버는 데 필요한 정신적 강인함과 레이저 광선과 같은 집중력을 기르는 요령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1부 폭발적 성공의 비밀에는 QLA의 기본을 설명합니다. ‘2부 슈퍼 석세스 실천 가이드에는 저자가 실행했던 자료 및 구체적인 조언을 담았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이상적인 국가는 장삼이사로 구성되는 바탕에 중간관리자, 그 위에 최고관리자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장삼이사까지도 큰돈벌이에 나선다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요?


<슈퍼 석세스>는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명제를 잊게 만드는 묘한 마약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치 독일은 새빨간 거짓말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들은 선전구호를 큰 소리로 외쳤고 이른바 문명인들은 잔인한 진실이 뺨을 내리칠 때까지 그들의 범죄를 묵인했다. 오늘날 여드름투성이의 네오파시스트들은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외친다. 그들의 청중이 되길 기꺼이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다.(25)”라는 저자의 말 속에는 저자가 하는 일의 실체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분명 읽어볼 가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기업을 일으키고 남이 세운 기업을 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이나 인력을 동원하는 일, 혹은 관련 법령 등이 우리나라의 실정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비약적 도약이라는 큰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조그만 성공을 일구는데 필요한 요령같은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공의 5가지 원칙 같은 것입니다. 1. 어제의 꿈은 오늘의 현실이다, 2. 지금 바로 꿈꿔라, 3. 시뮬레이션: 나에게 없는 것을 연습하라, 4.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5. ‘열정은 그리스어 엔테오스(entheos)’에서 왔다. 이는 내면의 신이라는 뜻이다, 등입니다.


그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멘토를 고르는 기준이라든가,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규칙,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 등은 큰돈벌이가 아니더라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령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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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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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에서 읽기로 한 <소망 없는 불행>을 미리 읽었습니다. 2019년 노벨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직은 고전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작가 페터 한트케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로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독후감에 작가가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지 금세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해되지 않은 대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시, 소설, 희곡, 연속극과 영화 대본, 수필 등 다양한 계열의 문학작품을 써냈습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나 연극 <관객모독>은 이제 고전 축에 들 만한데도 아직 감상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망 없는 불행>소망 없는 불행아이 이야기두 편의 글로 구성되었습니다. ‘소망 없는 불행1971년 어머니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죽는 일을 겪은 뒤에 쓴 산문입니다. 양친이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셔도 가슴이 먹먹할 일입니다. 게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 남아있는 가족들의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20,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몇 해되었습니다. 돌아가셨을 때는 추모하는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곡, 사모곡이 될 터이니 아마도 생전에 속을 끓여드린 일을 사죄하는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소망 없는 불행의 작가는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척박한 사회환경 속에서 여성으로, 자아에 눈떠가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말입니다. 오스트리아 남부지방의 시골에서 5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작가의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영리하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외증조부가 머슴으로 일하던 농가의 딸이 낳은 사생아가 외조부였으니 가정환경은 그리 유복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여자는 의무교육이 끝나면 가사를 돌보데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어머니는 가출하여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는 등 자기계발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유부남인 독일군 경리장교와 첫사랑에 빠져 저자를 낳았지만, 결혼은 독일군 하사와 했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전후에는 베를린을 탈출하여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삼았던가 봅니다. “모든 책이 자신의 삶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고 독서를 하면서 생기를 얻었다. 독서를 함으로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싼 껍데기로부터 벗어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57)”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61)”고 합니다.


그랬던 그녀가 원인 모를 두통을 앓으면서 시들어갔습니다. 그녀가 변해가는 모습은 마치 조로기 치매 증상으로 보입니다. 감각을 잃어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녀가 51살이 되던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데, 치매 말기에 접어들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은 없는 편이니, 아무래도 초기 상태에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없어 결정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 이야기는 연극배우였던 첫째 부인과 결별하면서 여자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겪을 일들을 적은 역시 산문입니다. 작가는 파리를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옮겨가며 살았습니다. 아이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장하기기 수월치 않았을 것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잠에서 깨어난 작가는 위층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에게 올라가서는 아이의 얼굴을 힘껏 때렸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작가가 아이의 성장과정에 관한 글을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이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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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동서문화사 월드북 51
호메로스 지음, 이상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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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에서 이달에 토론할 예정인 책을 미리 읽었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그리스에서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오던 시를 뛰어난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문자로 정리해냈다고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판소리와 같이 소리하시는 분들을 통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은 조선말에 채록하여 기록으로 보존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케네 문명 시기에서부터 영웅들에 관한 노래와 이야기들이 전해져왔다고 합니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기원전 1200년 무렵에 있었던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트로이 시권(詩卷)’에 속합니다. 트로이 서사 시권에는 <퀴프리아>,<일리아스>,<아이티오피스>,<소일리아스>,<일리오스의 함락>,<노트로이(귀국담)>,<오디세이아>,<텔레고니아> 8가지 작품이있는데, 그 가운데 <일리아스><오디세이아>만 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리아스>만을 놓고 보면 트로이 전쟁이 9년을 넘어 10년째로 넘어가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각각 2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동서문화사에서 합본으로 내놓은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무려 925쪽에 달하는 것을 보면 여기담긴 이야기를 구송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나라의 판소리의 경우도 박동진 명창께서 춘향가를 완창하는데 8시간, 심청가는 6시간, 적벽가는 5시간, 수궁가는 4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엄청난 분량의 가사를 외워서 이야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음유시인들 나름대로 외우거나 공연의 비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큰 틀을 외우고 상세한 내용은 임기응변으로 늘이거나 줄이기도 했던가 봅니다. 청중에 따라서 구송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이 더해지기도 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송되는 서사시를 채록해보면 내용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동서문화사 판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우리말로 옮겨진 것이지만, 서사시 본래의 특성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영화의 경우는 장면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등장인물 중심의 삽화가 끝나면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삽화가 이어지듯이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각각 24개의 삽화로 구성됩니다. 일리아스편을 보면 트로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그리스군의 내분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충돌하면서 아킬레우스가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그리스군이 몰리는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그리스신화를 보면 신계와 인간계가 구분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뒤섞이는 상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트로이전쟁도 파리스의 심판이 발단이 되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파리스와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우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여러 신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그리스군을 돕거나 트로이군을 돕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전장에 직접 개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들끼리는 직접 대결을 벌이지은 않는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여전히 헷갈리고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경우는 전투장면이 이어지면서 몇 사람의 영웅이 상대편 장군들을 죽이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아마도 구송자가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등장인물의 숫자를 늘이기도 줄이기도 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를 중심으로 한 장면이 주로 나오고 오디세우스가 귀국길에 겪는 고초는 짧게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소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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