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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
조정우 지음 / 세시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선조25년(1592년)부터 선조31년(1598년)의 7년 사이에 벌어진 왜란과 관련한 정황을 기록한 책입니다. 임진년 전란이 발발하면서 영의정에 올랐지만 평양으로 향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지만 탄핵 후 면직되었습니다.
징비란 <시경>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7년의 전란으로 백성들이 겪은 참혹한 삶을 돌아보고, 조정이 행한 실책들을 짚어 같은 전란을 겪지 않기 위해 남긴 반성의 기록입니다.
1591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상황을 엇갈리게 복명하였는데, 안이한 쪽으로 해석하여 대비하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왜군이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지원군으로 나온 명나라 장수들이 일본군과 내통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은 정황도 있습니다.
<소설 징비록>은 육지에서 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하여 활약한 정기룡, 곽재우, 김시민, 김덕룡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소설입니다. 왜군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간자들을 파견하여 조선 팔도의 정보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보를 수집했다고 해도 전장의 형편을 잘 아는 수비군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설 징비록>에서 다룬 정기룡, 곽재우, 김시민, 김덕룡 장군들은 지리는 물론 기후 등 제반사정을 꿰고 있어 왜군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리거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여 비교할 수 없는 전력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왜가 일으킨 전란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1596년 7월 서출 왕족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도록 한 조정은 무얼 했는지 의문입니다. 전란의 와중에서도 당파싸움은 여전해서 잘 싸우고 있는 장수들을 파직시키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니, 아마도 선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수백 명의 군졸을 이끌던 조경장군이 1만이 넘는 왜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8명의 기병을 이끌고 왜군을 헤치고 들어가 조경장군을 구해 나왔다는 무용담은 사실일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마술이 신출귀몰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난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의 정황을 염탐할 정도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왜가 조선에 기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병으로 기병을 제압할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전란 당시 능력이 있는 장군들은 비교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왜군을 맞아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분전이 있어 왜군의 진군을 저지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을 만들었지만, 정작 관군은 적절치 않은 전술로 연전연패하여 밀려 올라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산에서 평양으로 보급선이 길어진 왜군 역시 전쟁을 지속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왜군에 넘어가 협력한 조선인이 적지 않았던가 봅니다. 아마도 조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전란에서 왜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까닭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반한 민심을 그나마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향리에 머물던 명망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전란으로 위기감을 가진 백성들을 규합하여 왜군에 대항하는 의병대를 조직하여 왜군을 괴롭혔습니다. 정규군이 아니면서도 게릴라전을 펼친 것이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뒷날 관직에 오른 분도 있지만,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두거나 전장에서 숨진 경우도 있으니, 선조의 조정은 전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