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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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읽은 <해부학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3169>를 읽고서 의학과 관련된 일이 역사적 배경을 뒤쫓는 철저함이나 그렇게 얻은 자료를 글로 풀어내는 솜씨에 반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처럼 혈액과 관련된 분야가 발전해오는 역사적 과정을 뒤쫓는 한편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사, 혹은 특히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환에 관한 이야기, 특히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고 동성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저자로서 관심이 혈액 매개 질병에 관한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섞어 두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새삼 저자의 글솜씨에 놀라게 됩니다.

 

현대의학으로 발전하게 된 유럽의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학, 심지어는 그리스 신화에 이르기까지 혈액에 관한 기록을 뒤쫓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어디에 좋다해서 사슴의 피를 마시는 분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우리나라 사슴목장이 한때 캐나다에서 수입한 사슴으로 인하여 광우병과 같은 프리온질환인 만성소모성질환이 확산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찜찜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피를 보면 쉽게 흥분하는 경향도 있고, 피를 보면 속이 메스꺼워지기도 하는데, 저 역시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는 국소마취를 하고 수술하는 가족을 지켜보다가 졸도지경(?)에 이르는 불상사도 겪었습니다만, 피는 물론 죽은 이를 해부하는 전공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의 제목이 되는 <5리터>는 정상적인 성인의 몸에 들어있는 피의 양이기도 합니다. 로마시대이래 서양의학의 역사에서 히포크라테스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갈렌이 정맥으로부터 피를 뽑아내는 사혈요법으로 환자를 굶기는 치료로 로마의료계를 석권하던 에라시스트라투스 학파를 제압했다는 설명에 관심이 끌렸습니다. 사혈법은 그리스의학의 근거가 되었던 체액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써오던 것인데 갈렌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학에서도 비중있게 사용되던 것이었지만, 혈액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폐기되었던 것인데, 우리네 전통의학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치료법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 벨기에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가 근대해부학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갈렌의 해부학이 오류투성이라는 점을 밝혀낼 때까지 갈렌은 해부학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해부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 빈치가 날조한 내용 가운데서도 가장 기발한 것은 이른바 눈물의 원천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즉 감정을 관장하는 기관인 심장에서 눈물을 운반하는 가느다란 도관이 있다는 것이었다.(47쪽)” 물론 왼손 네 번째 손가락과 심장을 연결한다는 ‘사랑 정맥’은 더 기발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자는 동성애 상대인 스티브가 앓고 있는 에이즈 때문에 일상에서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에이즈와 관련된 혈액정책이나 사건 등의 진행사항도 책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스티브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의무실에서 근무하는 채혈사가 1회용 채혈바늘을 소독도 하지 않고 반복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에이즈나 간염과 같이 혈액을 매개하여 전염되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뒤쫓기도 합니다.

 

여기서 미국에서 혈액정책이 변화된 과정도 소개하고 있는데, 남북전쟁 이후 흑인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남아있던 인종분리정책이 혈액관리사업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1941년에 이르도록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헌혈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하며, 이후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헌혈한 피는 따로 관리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수혈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치는 1960년대에까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혈액관리에 있어서 보수적인 미국정부의 정책은 에이즈의 위험이 큰 집단인 게이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제한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우병예방을 위한 사료정책이나 도축정책 등과 비교해보면 에이즈예방을 위한 혈액관리사업의 사전예방의 원칙은 아주 철저하다는 점을 보면 사전예방의 원칙을 적용하는데 있어 해당 분야에서 위험의 본질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불확실성이 예상되는 경우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인다.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하고, 또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과 글쓰기 모두에 있어 사랑하는 배우자 스티브 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뿐만 아니라 그의 피로-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모두-씌여진 것이기도 하며, 그 덕분에 이처럼 마지막 한 단어까지 빛나고, 솔직하고, 또 진실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416쪽)”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도 위대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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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선물이다 조정민의 twitter facebook 잠언록 1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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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저의 생일이 들어있었습니다. 지난 주 전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위원장님께서 당신 방으로 따라 부르시더니 책을 한권 건네셨습니다. 생일선물이라 하셨습니다. 날아갈 듯한 붓글씨로 축하말씀까지 적어주신 책이 바로 조정민목사님의 <사람이 선물이다>였습니다.

 

‘조정민의 Twitter잠언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처럼 이 책은 트위터를 통해서 정제된 목사님의 생각모음이라고 합니다. 트위터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게 되신 계기를 프롤로그에서 읽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트위터는 점점 ‘긴 말하기 훈련’에 익숙해져 갈 무렵 새롭게 발견한 한마디 광장입니다. 다들 광장에 쏟아져 나와 140자의 틀 속에 생각을 쏟아냅니다. 광장을 거닐다 문득 성경의 잠언이 떠올랐습니다.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를 주시면 또 하나의 땅 끝에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홍수에 마실 물이 귀하다는데 샘물같은 메시지를 전해보자…’(4쪽)”

 

이렇게 트위터를 통해서 전하신 말씀 천여 구절 가운데 365개를 골라서 책으로 묶으셨답니다. 즉, 하루 하나씩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트윗을 시작했습니다만, 아직은 정제된 생각을 적기보다는 문득 만나는 좋은 말씀을 옮겨적거나, 혹은 블로그 등을 통해서 길게 적은 제 생각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읽게 되는 목사님의 트윗글은 140자보다 많지 않은 속에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를 얻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님은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언론사에서 받은 훈련 덕분이라고 겸양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만, 사실 140자로 생각을 다듬기 위하여 정말 많은 시간을 들였을 것이라고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40자로 된 글을 365개는 책 하나로 묶기에 턱이 없을 정도의 분량입니다. 보통 한권의 책을 내기 위하여 쓰는 글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1300매 내외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은 원고량은 오히려 글과 잘 어울리는 삽화 그리고 흰여백이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편집자 역시 꽤나 자유분방한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양면에 하나의 말씀과 삽화를 담기도 하고, 가로쓰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때로는 세로쓰기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세로쓰기 편집방식은 책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읽어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런 편집의 책읽기가 쉽지 않아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도록 변화를 주기도 했습니다. 아주 커다란 활자체로 한면 전체에 말씀 하나를 담은 곳도 있습니다.

 

이런 책을 단숨에 읽어서는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없기 마련입니다. 한 구절씩 읽고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같이 공유해보려 노력하는 것이 바른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즈음 관심을 두고 있는 눈물과 기억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어 준비하고 있는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제 생각에 잘 어울리는 한 대목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나누어야 할 때 나누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않으면 떨어집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그럴 때를 아는 것이 어렵고, 알아도 결단하기는 더 어렵습니다.(200쪽)”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아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옛말씀을 쉽게 풀어내신 글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욕심을 버리라는 간단한 충고를 여러 가지 상황에 맞게 하고 계십니다만, 욕심을 버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본 <인디아나존스>라는 영화에서 절벽 위로 쫓긴 주인공이 절벽에 발을 내미는 순간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딛게 되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버릴 수 있어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요즈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욕심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늦었다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일에 좋은 선물을 주신 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곁에 두고 생각을 곁들여가며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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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2 - 이데아총서 14
칼 R.포퍼 지음 / 민음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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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가 히틀러의 제3제국이 유럽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모습에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분명히하려는 목적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편의 리뷰에서 드렸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 http://blog.yes24.com/document/6501974). 제3제국이 저지른 아리안족 우월주의는 대표적인 닫힌 사회라고 할 종족중심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포퍼는 전편에서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체계라고 주장한 참주정치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고착화하고 사회구성원 간의 불평등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당시의 사료들을 인용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후편은 헤겔철학과 마르크스철학에 담겨진 열린사회에 반하는 요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포퍼가 과학적 분석을 통한 예측과는 달리 역사의 분석을 통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점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의 문제점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역사주의의 뿌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플라톤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데, 전통 그리스철학은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 그리도 데모크리토스 등의 위대한 세대를 지나오면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던 사상적 흐름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닫힌사회로 물꼬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세계의 진행의 추세가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하강하는 것이라고 한 플라톤과는 달리 낙관적이었다고 포퍼는 보고 있습니다. 변증법의 논리로 보아도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를 창조하면서 움직여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각 단계는 앞단계를 넘어서 완전에로 점점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에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민족은 역사무대의 전면에 나서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와 투쟁함으로서 자기의 개별성을 증명할 수 있고, 투쟁의 목적은 세계의 제패라 할 것이므로,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70쪽).

 

헤겔이 프러시아의 후원을 받으면서 독일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적 논리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포퍼의 시각에서 헤겔은 열린사회의 적으로 지목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잠재적 조직의 본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로 인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철학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들 말하며, 철학이 세계의 지혜로 묘사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철학은 그 자신에 있어서, 그리고 독자적으로 진리일 뿐 아니라 세상사에 반영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철학으로부터 그 첫 동력을 얻었다는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90쪽)” 헤겔은 프랑스혁명의 기저에는 철학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후편의 상당부분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철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칭찬하고 있지만, 이를 확대하여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려는 하나의 과학적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철학적 논리를 세우던 당시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장원이 무너지고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대우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는 주장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참된 인도주의적 운동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럽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철학이 나오면서 자본주의에서 종속적 존재에 머물던 노동계급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는 방향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분명 인정받아야 할 점이 있다는 공적을 포퍼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르크스철학에 따라서 계급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것은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럽사회가 아니라 러시아였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에 대한 포퍼의 비판은 혁명을 통하여 주도권을 장악한 계급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이익을 두고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역사를 예언하려 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것은 역사주의의 빈곤에 있다고 포퍼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포퍼는 마르크스가 주장한대로 방만한 자본주의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임은 인정하고 있으나, ‘자유의 역설’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유가 제한되지 않을 때 자멸한다는 점에서 자유를 자율적으로 제한하는 조처를 도입함으로써 자멸을 피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급진적 혁명을 통하여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구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 포퍼가 제안하는 대안은 점진적 사회공학적인 접근방식입니다. 국가에서 적절한 수준에서 간섭하는 것인데 제도적인 측면과 대인적 측면에서 간섭이 가능할 것이라 합니다.

 

역사주의에 대한 포퍼의 비판의 핵심은 다음 구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의미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인류의 역사>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권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다면 사람들 모두에 관한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란 없다.(357쪽)”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전편의 경우는 이한구교수님이 1998년에 번역소개된 이후 주석을 추가번역하고 보완하여 2006년 개정판이 나왔지만, 후편의 경우 이명현교수님의 번역으로 소개된 이후로 아직 보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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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1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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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운동을 주도하고 계신 분들의 책들이 소개되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우선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와 <과학의 변경지대>, 케이스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등이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에도 회의주의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의주의 사조를 주도하고 계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이 강력하게 추천하신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책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을 소개하려 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의 하나로 지목되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칼 포퍼는 빈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4년 <탐구의 논리>를 통하여 과학철학 분야에서 ‘반증가능성’의 방법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게 되는데, 포퍼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먼저 가설의 형태로 제시된다고 합니다.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이란 그 이론이 언제나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하는 반증가능성의 이론을 <탐구의 논리>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 는 1963년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한 이론의 과학적 자격의 기준은 그 이론의 반증가능성, 반박가능성, 테스트가능성이다.”라고 정리되는데, 한 이론이 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려면, 그 이론에 모순되는 관찰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퍼의 철학적 명제는 당연히 과학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을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통제된 사회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오랜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게 되면서 많은 나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믿고 있는 현재에도 우리사회의 성격이 선명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민주공화국이라고 정의되고 있는 우리나라가 진정 추구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국민들이 여망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체계를 추구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표적 철학자 칼 포퍼가 추구하는 열린사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은 194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구상은 진즉부터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들이 유럽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것을 보면서 집필을 서둘렀다고 합니다. 즉, 히틀러가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자유민들의 구속하는 대표적인 전체주의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대 청소년 시절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포퍼는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숨겨진 전체주의적 성격을 발견하고 결별하였다고 합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자유민의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사상사적 배경이 마르크스, 헤겔을 거쳐 플라톤에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02444>로 우리사회가 열병을 앓은 바 있습니다. 샌델교수는 “사회가 정의로운 것인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고 말하고, 정의를 이해하는데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정의는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독자들의 생각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자신이 준비한 답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독자 가운데는 그를 ‘소크라테스를 흉내내는 공동체주의자’라고 규정한 분도 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철학의 흐름 속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인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안고 있는 특성과 한계점들을 지적했다고는 하지만, 특히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와 롤즈의 정의론를 비롯하여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이클 샌델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사회가 정의로운지를 물었다고 한다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원조의 지위를 부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열린사회와 그 적들> 1부에서 플라톤이 주창한 계급의 존재를 전제로 한 참주정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 등 역사주의적 사상가를 이어받아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세웠는데, 우주적 힘이 작용하는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이런 역사적 운명의 법칙을 깨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정치가 퇴화하는 과정을 보면 완전한 국가 뒤에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명예정치체계가 오고, 두 번째로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치체계가 오며, 다음으로는 방종을 의미하는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정치체계가 탄생하고 마지막으로 국가의 종말단계인 참주정치가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국가에서는 세 종류의 계급, 즉 수호자들과, 그들의 무장한 보조원이나 군인, 그리고 노동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공산주의와 수호자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를 들면 영아살해와 같은 우생학적 정책들이 시행되고, 계급간의 이동은 불가능한 사회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미국 작가 로이스 로이의 소설 <기억전달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1323>를 통해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체계에서 평등주의라는 개념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법 앞에 평등’과 같은 정의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고 포퍼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률>에서 플라톤은 평등주의에 대하여 플라톤은 “동일하지 않은 자에 대한 평등한 대우는 불공평을 초래한다.(163쪽)”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플라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동일한 자에게는 평등을, 동일하지 않은 자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공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자기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덕이 ‘정의’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차별화된 계급 혹은 집단을 전제하는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플라톤의 정의는 공리주의적이며 전체주의인 것으로 사회 구성원의 모든 것, 심지어는 지배자의 진실을 알 권리, 진리를 말하도록 요구하는 특권까지도 위압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1부를 통하여 플라톤의 탐미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비판하면서, 열린사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사회라 부르며,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사회라 부르고자 한다.(293쪽)”

 

닫힌사회와 열린사회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열린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높아지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투쟁을 하는 반면, 닫힌사회에서는 계급투쟁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견해서는 닫힌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우월한 것처럼 비칠 수 있으나, 이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닫힌사회에서는 국가가 크든 작든 시민생활의 전체를 규제하려 든다는 특징이 있고, 반면열린사회에서는 이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열린사회에서는 행위의 규범들이 고정불변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약속의 체계에 불과하며,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열린사회를 지지하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30년경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고 한 반면, 80년 뒤에 아테네의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을 비교해 보면 포퍼가 플라톤을 비판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으끔가는 원칙은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지도자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마음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끔 습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든 장난삼아 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쟁 때나 한창 평화로운 때에 그의 지도자에게 눈을 돌려 그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까지도 지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만 잠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씻거나 먹거나 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오랜 습관에 의해 결코 독립적 행동을 꿈꾸지 않고 전혀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되도록 자신의 영혼을 길들여야만 한다.”

 

닫힌사회로부터 열린사회로 이행하게 된 것은 기술과 사업의 발달에 기인한다고 포퍼는 보고 있지만, 기술의 발달만으로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열린사회를 향한 효과적인 행위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비판과 논증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합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게 될 것인 바, “합리주의란 비판적 태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태도요,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이다.(617쪽)라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1부는 1998년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한 것을 2006년에 특히 원저의 방대한 양의 주석까지 번역하여 보완한 개정판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2부는 아직 보완 개정판이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2부에서는 근대철학에서 열린사회를 반대하는 주장을 대표하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적 논리에 대한 포퍼의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번역을 하신 이한구교수님은 읽는 사람들이 포퍼의 분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장의 앞부분에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을 붙였고, 포퍼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도록 ‘포퍼의 생애와 철학’이라는 해설을 책 뒤에 더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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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1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번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학생 때 이미 독서리스트에는 올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요? 그저 막연하게 ‘어려울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새끼가 새끼를 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책읽기도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읽고 추천하는 경우, 혹은 읽은 책에서 느낌이 와서 등의 이유로 읽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오랫동안 새겨두고 있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당구로 치면 쓰리 쿠션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에서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게 되셨다는 말씀에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게 되고, 그리고 프루스트를 꼭 읽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으니 말입니다.

 

조나 레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이 기억에 저장되는 기전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가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부분을 보면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 텍스트에서는 “옛 과거에서, 인간의 사망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69쪽)”로 옮기고 있어 손 끝에 잡히는 느낌이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각에 대한 기억을 논하면서 프루스트가 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기억도 있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집 가까이 있는 제과점에서 만드는 마들렌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자주 사곤했는데, 그 아이가 마들렌을 먹으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느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 두 모금째를 떠 마신다. 거기에는 첫 모금 속에 있던 것보다 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세 모금째는 두 모금째보다 다소 못한 것밖에는 가져다 주지 않는다.(66쪽)”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바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 스완네집쪽으로,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3. 게르망트쪽, 4. 소돔과 고모라, 5. 갇힌 여인, 6. 사라진 알베르틴, 7. 되찾은 시간 등 모두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는 이를 열한권으로 나누어 펴냈는데, 제1권 스완네 집쪽으로(1)에는 특히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번역하신 분이 정리한 글이 더해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을 먼저 읽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은 스완네집 쪽으로(1)입니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 있는 고모님 댁에서의 추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각오를 해야 할 점은 전체 이야기가 끊어짐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책읽기에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점일 듯합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책읽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싶습니다.

 

프루스트는 화자(話者)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고 시작한 글은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때로는 순간 몽롱한 상태로 추억의 영상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상태, 즉 기억에 흔들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 즉 기억을 정리해서 글로 남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도 주목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든 생각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이어서 다른 상황으로 넘어가는데 대부분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마을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를 묘사하듯 말입니다. “우리 앞에 한련꽃을 가장자리에 두른 오솔길이 햇볕을 가득히 받으며 성관 쪽으로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오른쪽 정원은 편편한 지면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둘레의 높다란 수목들의 그림자에 그늘지어, 스완의 선대가 파놓은 샘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가장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역시 자연을 바탕삼아 가공되어 있는 것이다.(195쪽).

 

“내가 독서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의 발견 쪽으로 부단한 운동을 행하고 있는 이 중심적인 신뢰감 다음에, 뒤이어 오는 것은 감동, 내가 참여하고 있는 행동이 내게 주는 여러 감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날의 오후는 일생에 흔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극적 사건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내가 읽고 있는 책 안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였다.(122쪽)”라고 적은 부분에서 독자를 위한 프루스트의 배려를 읽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첫발을 뗀 느낌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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