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읽은 <해부학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3169>를 읽고서 의학과 관련된 일이 역사적 배경을 뒤쫓는 철저함이나 그렇게 얻은 자료를 글로 풀어내는 솜씨에 반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처럼 혈액과 관련된 분야가 발전해오는 역사적 과정을 뒤쫓는 한편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사, 혹은 특히 혈액과 관련이 있는 질환에 관한 이야기, 특히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고 동성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저자로서 관심이 혈액 매개 질병에 관한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섞어 두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새삼 저자의 글솜씨에 놀라게 됩니다.

 

현대의학으로 발전하게 된 유럽의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학, 심지어는 그리스 신화에 이르기까지 혈액에 관한 기록을 뒤쫓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어디에 좋다해서 사슴의 피를 마시는 분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우리나라 사슴목장이 한때 캐나다에서 수입한 사슴으로 인하여 광우병과 같은 프리온질환인 만성소모성질환이 확산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찜찜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피를 보면 쉽게 흥분하는 경향도 있고, 피를 보면 속이 메스꺼워지기도 하는데, 저 역시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는 국소마취를 하고 수술하는 가족을 지켜보다가 졸도지경(?)에 이르는 불상사도 겪었습니다만, 피는 물론 죽은 이를 해부하는 전공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의 제목이 되는 <5리터>는 정상적인 성인의 몸에 들어있는 피의 양이기도 합니다. 로마시대이래 서양의학의 역사에서 히포크라테스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갈렌이 정맥으로부터 피를 뽑아내는 사혈요법으로 환자를 굶기는 치료로 로마의료계를 석권하던 에라시스트라투스 학파를 제압했다는 설명에 관심이 끌렸습니다. 사혈법은 그리스의학의 근거가 되었던 체액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써오던 것인데 갈렌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학에서도 비중있게 사용되던 것이었지만, 혈액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폐기되었던 것인데, 우리네 전통의학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치료법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 벨기에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가 근대해부학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갈렌의 해부학이 오류투성이라는 점을 밝혀낼 때까지 갈렌은 해부학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해부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 빈치가 날조한 내용 가운데서도 가장 기발한 것은 이른바 눈물의 원천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즉 감정을 관장하는 기관인 심장에서 눈물을 운반하는 가느다란 도관이 있다는 것이었다.(47쪽)” 물론 왼손 네 번째 손가락과 심장을 연결한다는 ‘사랑 정맥’은 더 기발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자는 동성애 상대인 스티브가 앓고 있는 에이즈 때문에 일상에서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에이즈와 관련된 혈액정책이나 사건 등의 진행사항도 책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스티브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의무실에서 근무하는 채혈사가 1회용 채혈바늘을 소독도 하지 않고 반복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에이즈나 간염과 같이 혈액을 매개하여 전염되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뒤쫓기도 합니다.

 

여기서 미국에서 혈액정책이 변화된 과정도 소개하고 있는데, 남북전쟁 이후 흑인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남아있던 인종분리정책이 혈액관리사업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1941년에 이르도록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헌혈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하며, 이후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헌혈한 피는 따로 관리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수혈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치는 1960년대에까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혈액관리에 있어서 보수적인 미국정부의 정책은 에이즈의 위험이 큰 집단인 게이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제한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우병예방을 위한 사료정책이나 도축정책 등과 비교해보면 에이즈예방을 위한 혈액관리사업의 사전예방의 원칙은 아주 철저하다는 점을 보면 사전예방의 원칙을 적용하는데 있어 해당 분야에서 위험의 본질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불확실성이 예상되는 경우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인다.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하고, 또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과 글쓰기 모두에 있어 사랑하는 배우자 스티브 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뿐만 아니라 그의 피로-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모두-씌여진 것이기도 하며, 그 덕분에 이처럼 마지막 한 단어까지 빛나고, 솔직하고, 또 진실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416쪽)”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도 위대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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