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트릭 - ‘나’라는 환상, 혹은 속임수를 꿰뚫는 12가지 철학적 질문
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혜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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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갑자기 ‘내가 누구인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고들 합니다만, 정체성(正體性)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또는 그 특성을 가진 존재.(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정체성(正體性)’이란 사람이 ‘환경이나 사정이 변해도 자기가 어떠한 변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또는 ‘그렇게 깨달아진 변하지 않고 독립적인 자신의 존재’라고도 하지만, 대상이 개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사회집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체성이란 다른 의미에서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는 특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특성을 형성하는 주체, 즉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란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심리학에서 자아(ego, 自我)란 “기억·평가·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다음 브리태니커 사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고 한 정체성의 정의와 다소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에고 트릭>은 영국의 대중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나는 왜 나인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자아의 핵심이 존재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신경과학, 종교, 사회학 등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사유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이 치매 혹은 중증의 신경질환을 앓아 기억이나 인식능력 등과 같은 개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퇴화되어 버린 경우에 현재 질병으로 변한 모습의 이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분들이 당면하고 있는 의문에 정해진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가까운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자아가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자아와 육체와의 관계, 뇌의 구조와 기능을 살펴 자아와의 관계를 따지고 있으며, 나아가 기억과 자아와의 관계, 실재여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영혼과 자아의 관계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중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고려하여 다중적 자아라는 개념과 소속된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아에 대하여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올바른 자아관, 즉 ‘자아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는 어떤 것 혹은 특정 부분은 없다. 사람의 육체, 뇌, 기억은 모두 우리 정체성에 중요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사람의 정체성이 머무는 자아의 핵심, 즉 진주가 아니다. 둘째, 사람은 비물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이는 다른 모든 생물체의 구성요소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셋째, 진주 관점을 부인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하나의 구조물임에 분명하다는 의미다. 우리를 현재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단일한 무엇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공조하는 몇몇 부분 혹은 사물들로 이루어진 결과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스스로를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자아의 통일성은 어떤 점에서는 취약하고 한편으로는 강건하다. (…) 우리의 자아의식은 분명 사회적 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식 자체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지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다.(160쪽)”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1. 자아의 통일성은 심리적 속임수가 만든 결과물이다. 2.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다. 3. 속성 자체가 변하기에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세 가지 명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저자는 ‘진주 관점’의 허점들을 제시하면서 ‘묶음이론’이야말로 자아를 보는 올바른 관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의 자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환생이 즉 자아의 생존을 의미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지속을 의미하는지 논하고 있으며 기술의 진화가 자아를 다시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장수사회에서 야기될 자아의 문제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실제 사례를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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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보건의료법정책 세미나 1 리걸플러스 62
송기민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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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사회참여의식이 고조되면서 국가정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특히 보건 복지 분야의 정책방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책을 주관하는 정부당국이나 정책의 영향을 받게 되는 보건의료계 역시 여론의 향배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왜곡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시각은 여전합니다.

 

보건의료정책은 해당분야의 종사자도 집행된 다음에서야 문제점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을 평가하는 방법론 등을 비롯하여 여러 영역에서 아직도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정책당국이나 전문가단체 그리고 시민단체 등이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여 합의에 이르는 성숙된 과정을 통하여 정책이 실행되기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어떻게 보면 정책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같이 고민하는 절차가 생략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관련 자료 역시 학계가 주도하는 전문서적 수준에 머물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마저도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공유할 수 있는 대중서가 없다고 해도 관심주제를 같이 논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명윤리에 관한 학술서에 가까운 <가족의 치료중단요구와 의사의 생명보호의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66052>를 북소리를 통해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최신보건의료법정책 세미나 I>도 유사한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이번에도 마침 같은 송기민교수님의 책입니다.

 

송기민교수는 보건의료정책은 법, 행정, 보건, 의료, 복지 정책 등 다양한 학제의 접근이 필요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우리사회를 달구고 있는 ‘복지’논쟁의 쟁점 가운데 사회보장제도가 있고, 그 핵심에는 보건의료제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건의료정책이 다학제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라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건이 복지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료계인사들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대한의사협회는 보건행정과 복지행정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의 기능을 나누어 인간의 건강에 관한 정책을 다루는 보건분야를 환경분야와 같이 묶고, 복지부문은 노동 여성 가족 등과 같이 묶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보건과 복지는 분명히 다른 영역이라 생각하는 보건의료계인사들과는 달리 복지전문가들은 보건을 복지의 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인식의 차이는 보건복지행정이 보건전문가로부터 복지전문가로 교체되면서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자가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의약분업정책, 보건의료기술발전과 임상시험, 건강증진과 담배사업규제정책, 건강보험과 자동차보험, 사회보험의 권리구제정책, 보건의료인력의 수급정책, 응급의료미수금대물정책 그리고 저출산·고령사회 대응정책 등입니다. 제시한 대부분의 주제는 보건의료역역이라 생각됩니다만, 저출산과 고령사회에 대한 대응방안 마련이 보건의료계의 몫인지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WHO가 주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담배규제기본협약에 관한 주제를 보건의료정책의 범위에서 논하는 것 역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시된 주제를 개별적으로 논하기에는 북소리의 지면으로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에서 민감하다 싶은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의약분업제도입니다. 의약분업의 효과와 타당성, 선진화된 의약관리체계의 구축, 의약분업의 발전방향 등을 제목으로 하여 논하고 있는데, 그 흐름이 주로 정부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관련 이해당사자라 할 의료계, 약계, 시민사회의 견해는 배제되어 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특히 2000년 우리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기면서 시작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실시배경이나 정책도입과정을 살펴보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책의 재평가와 보완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일을 담당할 주체를 보건복지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저자의 제안에 대하여 의약분업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한 부서가 바로 보건복지부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1. 의료기관 이용증가, 2. 건강보험재정지출 증가, 3. 항생제 사용감소, 4. 방문당 투약일수 증가, 5. 의약분업 실시 이후 국민불편 증가, 6. 알권리의 신장 등을 의약분업의 효과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효과 가운데 항생제 사용감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시작한 의약품사용평가의 효과가 결정적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의약분업의 효과라고 내놓을 형편은 아니다 싶습니다. 그리고 처방전 발행을 통해서 국민의 알권리가 신장되었다는 주장은 환자가 최종적으로 복용하게 되는 약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조제내역서 발급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내세우기가 민망한 노릇이라는 의료계의 주장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든 제도가 국민의 입장에서 편의성을 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제도는 국민의 편의성이 외면된 정책이었다는 지적은 국민만족도 조사 등의 결과로 드러나 있습니다. 즉 실효성없는 국민의 알권리를 표면적으로 내세워서 처방전 발행을 의무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대만처럼 병원에 원내약국을 개설하여 환자로 하여금 원내약국 혹은 외부약국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기회를 원천봉쇄한 것은 정책에 큰 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동차사고를 당했을 때 적용되는 건강보험급여제한에 관하여 두 개의 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과실에 의한 자기신체피해 교통사고의 경우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건강보험과 자동차보험이 모두 사회보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자동차보험의 책임보험은 건강보험과 같이 의무가입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서 쟁점은 건강보험과 자동차보험의 수가체계가 독립되어 있고 자기부담부분 역시 두 보험체계가 상이하다는 점도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건강보험은 전국민이 의무가입해야 하는 반면 자동차보험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는 사람만이 가입하고 있는 보험이라는 점이 중요하겠습니다. 따라서 자동차를 운전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상해에 대하여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조성된 재원으로 운용되는 건강보험을 적용한다는 것은 기회균등과 형평성을 고려하였을 때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일단 자동차를 운전함으로써 발생하는 사고의 위험가능성에서 운전을 하는 사람과 운전을 하지 않는 건강보험가입자 사이에 당연히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므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 그만큼의 위험을 고려한 별도의 보험료를 추가로 부과하여 재정부담에서의 형평성이 전제되지 않은 채 자동차운전자의 자기과실에 의한 상해에 건강보험적용을 논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납된 삼호주얼리호 선원을 구출하기 위한 여명작전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석해균선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응급의학체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여명작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주대학교 이국종교수가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응급의학체계를 정립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용두사미가 되어가는 것 아닌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응급의료영역에서 해결되어야 할 또 다른 과제가 바로 응급의료비 미수금대불제도입니다.

 

응급환자 본인 또는 가족이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경우, 응급의료기관에 응급진료비 및 이송처치료를 대신 부담하고 나중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돌려받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응급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응급의료가 경제적 사유로 지연되거나 거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기본취지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는 점이나 이 제도를 통하여 지급된 응급의료비가 제대로 환수되지 않고 있는 문제점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출산·고령화사회 대응정책에 관한 주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수준이 향상되고 여기에 저출산 문제가 중복되면서 우리사회는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고령사회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보건정책 혹은 복지정책의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조차 이해되지 않습니다. 보건의료와 관련된 현상이기는 하지만 인구동태에 관한 사항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의 인식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화에 기인하고 있다고 한다면 보건복지부가 아닌 행정안전부의 소관업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고령자가 늘어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의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평균수명이 연장된 결과이며, 저출산의 문제는 육아 및 교육 등의 부담에 대하여 출산연령에 있는 젊은이들의 인식변화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습니다. 현재 가임연령에 있는 젊은이들은 우리사회가 핵가족화되던 시기에 출생하여 부모들의 과보호 아래 자랐던 세대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으로 키워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출산 역시 자기중심적 사고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인구구성을 보면 경제적 활동인구가 되는 청장년층이 노인층을 지원하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완만한 기울기의 산형이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항아리형을 지나 뒤집힌 호리병형모양 노인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상황으로 사회의 퇴화가 우려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양할 노인층이 두터워지면 청장년층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노인이 되는 세대가 자녀를 적게 낳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회구조를 만든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갈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의 부담을 나누지 않은 사람이 사회의 과실을 동등하게 나누는 것에 대하여 대립되는 의견이 있습니다. <발칙한 경제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2223>에서 사회적 이슈를 엄격한 비용-편익의 관점에서 바라본 스티븐 랜즈버그는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 사람이므로 당연히 그들 모두가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과 우리에게는 우선 번식을 할 도덕적 의무가 없고, 우리가 생명을 줄 의무가 없다면 그들에게 부를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령화사회에서 노인복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자녀수에 따라서 차등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복지에 형평성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회적 부담을 나눈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같은 틀에서 복지의 과일을 나누는 것은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글머리에서 잠깐 언급하였습니다만, 보건의료와 복지문제에 일반인의 관심이 많은데 반하여 공유할만한 자료가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쉽게 쓰인 보건의료정책관련 도서가 보다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저자가 제시한 주제에 관하여 같이 논의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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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30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926
 
발칙한 경제학 -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관한 불편한 진실
스티븐 랜즈버그 지음, 이무열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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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를 통해서 <경제학자 철학에 답하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8853>를 읽고서 저자 스티븐 랜즈버그에 매혹되어 읽게 된 것이니 책읽기에도 우연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섹스를 많이 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라고 표지에 쓰여 있는 유혹적인 문귀('More sex is safer sex'라는 원제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뿐입니다)에 오히려 가볍게 버릴 수도 있었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부제가 강하게 마음을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학자 철학에 답하다>에서도 예감한 것처럼 <발칙한 경제학>에서는 저자의 자유롭고, 대담하며, 발칙하기도 한 사유의 무한도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쥐고 있던 화두들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제안을 받아두고 망설이던 칼럼연재를 수락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을 다음처럼 시작하고 있습니다. “상식은 이렇게 말한다. 문란한 성생활이 에이즈를 확산시키고, 인구증가는 번영의 적이며, 구두쇠가 사이 나쁜 이웃들을 만든다고. 나는 당신의 상식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6쪽)” 견고하게 굳어있는 상식을 깨부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잘 알 터인데 어떻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의 무기는 증거와 논리, 특히 경제학 논리다. 논리가 우리들로 하여금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자극하며 도전할 때 논리는 가장 계몽적이다. 그리고 분명 재미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 열여섯 꼭지의 글을 성격에 따라서 네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1부의 제목은 공공하천의 원리입니다. 개인의 행동이 그 개인이 속하는 사회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화제가 바로 제목이기도 한 섹스를 더 많이 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주제인데, 도덕적인 젊은이가 섹스를 기피하는 경우 그 사회에서 에이즈가 확산될 위험이 더 많아진다는 역설(?)을 통계수치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사회의 에이즈확산 위험은 저감되나 개인의 에이즈 감염위험은 높아질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주제인 출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출산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고민을 해결할 결정적 한 방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수준의 출산율을 유지하게 되면 한 세기 이내에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우울한 예언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결혼을 기피하는 남녀들로 국제결혼이 보편화되고 있는 우리사회는 이미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저출산문제의 핵심은 육아와 교육이 어려운 현실이라는 당사자들의 주장이 핑계일 뿐이며 자신들이 즐겨야 할 몫을 늘리려는 이기적 사고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 출산연령에 있는 세대들이 우리사회가 핵가족화되던 시기에 태어나서 부모의 과보호 아래서 부족한 것 없이 누리며 성장해온 세대라는 점입니다. 사실 한 사회는 허리가 되는 청장년들의 왕성한 생산력으로 바탕으로 그들을 키워낸 노인세대를 지원하고 자라나서 신세를 질 어린 세대를 키워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출산을 기피하고 있는 지금의 청장년들이 노인세대가 되면 그들이 낳은 많지 않은 청장년들이 만들어낸 재화로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만큼 그때의 청장년들은 허리가 휘게 되겠지요.

 

복지가 화두가 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노인층이 두터워지면서 노인복지 또한 관심을 끌게 됩니다. 복지라고 하면 형평성을 따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평생 사회에 부담을 둔 사람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 사람이 같은 복지서비스를 받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이 흘린 피땀을 공짜로 즐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인복지는 그 사람이 사회에 기여한 바에 따라 최소한 자녀의 숫자에 따라서 즐길 수 있는 복지의 수준을 결정한다면 육아와 교육의 어려움을 잘못된 사회라는 핑계로 기피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구요? 저자가 제2부에서 논하고 있는 인센티브의 효과는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거든요.

 

저자의 거침없는 논리전개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다이어트에 관한 저자의 재미있는 주장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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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을 소개한 글을 여러 번 읽게 되었습니다. 박종호 선생님의 책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7325>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르헤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제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기억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보르헤스의 작품,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단편집 <픽션들>에 실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어진다고 하던가요? 마침 민음사가 주관하는 민음아카데미에서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의 송병선교수를 초청하여 “보르헤스, 문학으로 읽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의와 출장 등이 겹치는 바람에 처음부터 참석하지는 못해서 아쉬웠습니다만, 드디어 26일 저녁에 출판문화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강좌에 참석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의외로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송교수님의 재미있는 말씀에 빠져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송병선교수님은 강좌의 주요 텍스트가 되는 <픽션들>은 물론, 저도 읽은 적이 있는 <거미여인의 키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15661> 등 다수의 중남미 문학작품을 번역 소개하신 분입니다. 이날은 두 개의 단편집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과 ‘기교들’을 묶은 <픽션들>을 텍스트로 하여 강의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문과 8개의 단편으로 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에서는 동명의 단편을 골랐고, 서문과 10개의 단편으로 된 ‘기교들’에서는 ‘죽음과 나침반’을 골라 설명하였습니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픽션들>의 리뷰를 통해서 소개하겠습니다만, 두 작품의 공통점은 미로(迷路)가 작품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미로에 착안하게 되니 아주 오래 전에 빠졌던 중국무협소설 생각이 났습니다. 미로를 의미하는 기관을 설치해서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이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중국에서 미로가 발전했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이미 정교한 미로에 사람을 가둔다는 이야기와 미로깨기비법이 소개되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민음 아카데미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2시간씩 모두 4주 동안 진행이 되는 강좌를 격월간으로 열고 있다고 합니다. 금년 5월에는 헤밍웨이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9월에는 소설가 장석주 선생님이 국내작품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근대의 탄생과 경성의 작가들’이 그리고 11월에는 비평가 이현우교수님이 진행하는 ‘로쟈의 애매한 사랑이야기’가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제가 되는 작품 혹은 작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참석해서 문학의 세계에서 시야를 넓혀나가는 기회로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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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죽음 문화 - 인도에서 몽골까지
이옥순 외 지음 / 소나무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제게 있어 오랜 과제입니다. 아마도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일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죽음의 형태, 예를 들면, 자살, 사고, 병사 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품위있는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 등등...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을 결국은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데 이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서구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만, 아시아인들의 생각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평래교수님을 비롯한 여섯 분이 인도, 티베트, 몽골, 중국과 중국의 소수민족들, 그리고 한국인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를 조사하여 정리한 <아시아의 죽음문화>를 읽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나라들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불교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인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집필을 담당한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 분들이라서 죽음에 관한 문화적 배경을 정리하는데 적합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분들의 기획의도를 옮겨봅니다.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그 원리에 따라 살다 간 성인과 성자, 죽음과 주검의 현장에서 죽어야 할 존재로서 인간의 숙명을 숙명으로 체험한 사람,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살려고 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여 ‘사는 것’에만 눈길을 주는 우리의 본 모습을 확인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이 책을 내게 되었다.(10쪽)”

 

흰두교와 불교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는 인도 그리고 티베트불교 정신으로 사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확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희망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몽고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도 이례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이 넓고 소수민족 대부분 한족들과 섞이지 않고 그들의 전통습속을 유지하고 살고 있어서인지 죽음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고구려유민들이 중국의 남쪽으로 이주한 역사기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하니족, 이족, 묘족 등 중국의 남쪽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은 죽음을 맞게 되면 조상들이 시원한 곳으로 혼령이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화장을 한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한족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는 유학의 오랜 전통 때문에 삶은 즐거운 것이요, 죽음은 슬픈 것이라서 현세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학의 영향을 받은 경우에는 수련을 통하여 자연에 합일하는 경지, 즉 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도가의 경우는 죽지만 죽지 않은 지경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후세계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 종교라고 분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도학을 도교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하겠으나, 유학을 유교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윤회사상을 믿는다는 종교에서는 지구상의 전체 인류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해온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문을 오랫동안 풀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흰두교신학자들은 신이 새로운 영혼을 계속적으로 만든다고 가정한다고 하면서도 신이 ‘왜 그러는지’ 속시원하게 답을 주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23쪽) 그 점에 대하여 저자는 지구상에 지난 수십년 간 수많은 동식물이 사라졌는데 혹시 멸종한 동식물이 인류라는 종으로 진화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윤회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환생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최고의 환생이며 생전에 쌓은 업보에 따라서 다음 생에는 축생 혹은 미물로도 환생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보면 가능한 설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일부 저자들은 담당한 지역의 민간설화까지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그들의 죽음문화를 설명하고 있기도한데, 하니족의 기원신화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득한 옛날 하니족의 조상은 물고기였다는 것입니다. 조상물고기가 큰 바다에 나아갔는데 그곳에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어 만물을 낳기 시작했는데, 하늘을, 땅을, 있음과 없음을, 색깔을, 크고 작음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물고기는 땅이 점차 커지면서 물이 줄어들게 되자 뭍에 올라오게 된 조상물고기가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하여 점차 인간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7쪽) 지구생물의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류에서 인간에 이르는 진화론의 원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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