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의 위기
멜빈 코너 지음, 소의영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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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평균기대여명이 150세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의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게 된 것에 의학의 발전이 크게 기여해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학의 빛나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전염병과 각종 암질환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어 현대의학에 한계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년전에 미국의 의료보험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추적한 마이클 무어감독의 영화 <식코>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세계적인 의학수준을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막상 보건의료제도는 체계적이지 못해 생긴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로부터 출발한 의학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문화적 제도의 틀 안에서 빠르게 발전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 범위가 광범위해지고 파장도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의학의 위기는 의학이라는 학문의 위기라고 하기보다는 과거와는 달라진 의학을 둘러싸고 있는 보건환경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회구성원의 건강을 담보하는 의료제도의 지속발전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학이 발전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걸맞게 보건의료의 역할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의학과 의료의 위기에 대한 명쾌한 진단과 처방’이라고 요약하고 있는 멜빈 코너교수의 <현대의학의 위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원저가 1993년에 처음 독자를 만났고 우리나라에 번역소개된 것은 2001년입니다. 따라서 시대적 배경이라거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저자가 다루고 있는 환자-의사관계, 현대의학의 발전의 근간이 된 과학적 방법론의 딜레마, 약물 유전자치료 그리고 수술 등을 적용하는데 있어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 정신질환자와 에이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그리고 건강한 노후생활과 품위있게 죽음에 이르는 방법 등의 문제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어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의 목적이 ‘보건의료 정책에 관한 의제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의사와 보건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좋든 나쁘든 간에 다양한 의료정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미국, 유럽, 일본 등 다양한 지역에서의 의료제도를 인용하여 문제해결방안을 고민하도록 하고 있는 점도 돋보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제도의 현황이 최근에서야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탓인지 우리나라의 보건의료환경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읽을 수 없는 점은 아쉽다 하겠습니다.

 

요즈음 환자들이 변했다는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서적이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넘쳐나고 있는 의학정보로 무장하게 된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병에 대응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데, 어쩌면 ‘당신의 의사에게 화를 내라’고 충고하는 버니 시겔교수와 같은 의사들의 영향도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으로 무장하고, 사실을 열심히 알아내며, 포기를 거부하고, 의사에게 침묵의 규율을 깨도록 강요하고, 환자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하여 되도록 많이 알고 있으라고 추종자들을 세뇌시켰습니다(48쪽).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자신의 질병에 대한 환자의 인식이 왜곡되는 경우 오히려 치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줄리안 튜터하트 박사가 제시한 ‘환자를 동료처럼’이라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주목받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사실을 의논하고 치료와 예방책을 결정하는 상호협력관계입니다. 앞서 인용한 바니 시겔교수가 추천하는 환자-의사 관계와는 분명 차별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근래 ‘환자를 가족처럼’ 치료하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의사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관계에서는 의사의 지나친 감정이입이 객관적 판단을 왜곡할 위험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현대의학은 분명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면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옛날 의사들은 환자의 병세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뿐 온천이나 공기가 맑은 곳에서 휴양하는 것 말고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에테르를 사용하여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할 수 있게 되고, 이어서 발견한 질병세균설을 토대로 한 무균소독법, 이어서 20세기 들어서면서 방사선 진단법, 생화학검사법 등이 개발되면서 질병의 진단이 보다 정확해지게 되었고, 약물에 의한 화학요법이 가능해지면서 치료방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환자의 진단과 치료가 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게 되면서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는 과장에서 긴밀하던 환자와 의사의 교감이 점차로 비중을 잃어가게 되었으며 급성 질환 혹은 중증 질환에 의료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의 진료가) 점점 냉혹해지고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 의료는 병원에서보다는 지역 사회로, 가능하다면 가정으로까지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107쪽)”

 

1921년에 벌써 이런 문제가 지적되었고, 1983년에 미국의 의학교육을 담당하고 유명 의과대학의 학장들은 ‘의학교육의 목표는 최적의 건강에 있지 않다’거나, ‘우리는 의사를 양성하는데 있어서 조기 전문화와 과학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을 바꾸어야 한다’거나, ‘환자와, 그 가족과, 환자의 생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심장질환 병동의 3호실 두 번째 환자의 상태를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의학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에 항생제를 처방하는 진료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실시하고 있는 감기항생제 처방률 평가에 대한 의료계의 볼멘소리가 높았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감기상병에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이 항생제내성 세균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키우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항생제를 처방하는 의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저자들은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내성 균주의 출현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950~1960년대에는 바로 우리 일반인들이 의사들을 찾아가서, 항생제가 필요하지도 않은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 등에 항생제를 처방하도록 종용하였던 것이다.(130쪽)”

 

최근 일본의 후쿠오카의 병원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줄기세포 시술을 하여 한국과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줄기세포관련 회사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시술을 통하여 효과를 보았다고 하는 일부 환자와 가족들이 회사측을 옹호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약물 혹은 치료법은 엄정하게 관리되고 있는 사전 검증체계를 통과하여야 일반인을 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의약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의 입증절차가 까다로운 우리나라와 미국을 피하여 일본에서 일종의 임상시험을 하는 셈이라며 환자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치료제를 기다리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완벽하게 입증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가능성마저도 시험해보지 못하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시술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문제라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수술의 적합성과 남용‘을 논하기 위하여 전두엽절제술의 문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전이 되었습니다만, 잭 니콜슨이 주연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전두엽절제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남들과 같지 않은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용된 남자 주인공이 병원의 방침대로 순응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대항하다가 전두엽절제술을 받고 나서 감정이 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여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전두엽절제술은 1930년대 후반 대뇌의 전두엽과 감정을 조절하는 중추와의 연결을 절단하는 수술인데 정신질환 환자를 요술처럼 조용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들어 이 수술을 받은 환자의 삶이 정신적, 감정적으로 너무 심하게 손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전두엽절제술을 의료현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고안되었을 당시에는 미처 고려되지 않았던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임상시험을 승인받아 조건부로 시술을 시작한 카바수술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시술자와 당국 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사례에서도 참고할만 하겠습니다.

 

역시 제가 하고 있는 업무와 관련된 내용에 주목한 것입니다만, 미국의 경우 최근까지 제왕절개분만이 지속적으로 증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분만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제왕절개분만을 선호하는 경향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료계에서는 신생아사망률이 감소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타당성을 옹호하고 있습니다만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제왕절개수술이 더 적게 시행되면서도 신생아사망률이 미국과 비슷한 정도로 감소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산모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임에도 제왕절개분만의 비율이 늘지 않고 있습니다만, 미국과 비교하면 다소 높은 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왕절개분만이 높은 것은 외국과는 다른 이유로 수술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자들이 알면 꼭 인용할 내용일 것입니다.

 

정신질환자의 고통을 다룬 부분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9772557>를 통하여 광인에 대한 서구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까지도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질환은 치료방법이 없어 정신병원에 수용하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정신병원하면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있어서 실존하는 지옥이었다. 수백명은 사슬에 묶여 있었고, 많은 환자들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강압적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그들은 복종시키기 위하여 몸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공포와 고뇌, 줄지 않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251쪽)”라고 저자가 적고 있는 것처럼 끔찍한 환경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최근의 정신병원은 대부분 일반병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약을 먹고 있는지 돌볼 가족도 지지체계도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은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재입원하게 되었으며, 다시 안정되어 퇴원하고, 약은 더 이상 복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또다시 병원에 입원하는, (…) ‘회전문 증후군’이 정신질환 환자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242쪽)”라는 존 맥빈 신부의 회상은 1970년대까지의 미국사회의 현상이었고, 우리나라도 그와 같은 문제를 지금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약물요법이나 정신요법 등이 발전하게 되면서 급성기에 적극적인 치료를 해서 환자를 조기에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 정신질환 치료의 최근 동향이기도합니다. 만성화된 환자들에게 안정된 치료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역시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노후생활과 품위를 갖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기회에 다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미루어 두겠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업무와 연관시켜 오늘날의 보건의료체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민해보았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 사회에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그가 의학, 의술, 의료를 단순히 지식과 테크놀로지로 좁혀서 바라보지 않고 문화적 지평으로 인식하고 있어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옮긴이의 추천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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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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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99785>을 비롯해서 심리학을 다루는 대부분의 책들에서 빠트리지 않고 인용하는 ‘투명 고릴라 실험’을 통하여 인식의 오류를 지적한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 교수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드디어 읽었습니다.

 

서문을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으며, 지식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인 믿음은 틀릴 때가 많고, 우리의 인지능력이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도 한다.(6쪽)”고 적고, ‘투명 고릴라 실험’은 인간의 생각하는 방식을 광범위하게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서는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일이키는 6가지 착각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 등입니다. 투명 고릴라 실험은 그가운데 첫 번째 주의력 착각을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흰셔츠와 검은셔츠를 입은 선수들이 농구시합을 하고 있는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흰셔츠를 입은 선수들이 패스하는 횟수를 헤아리도록 주문받은 피실험자들 가운데 절반 가량은 중간에 고릴라 변장을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무주의 맹시’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특정부분의 모습이나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주의 맹시가 꼭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주의 맹시가 없는 사람은 동시에 두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무주의 맹시가 있다고 해도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 또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주의 맹시가 있는 사람들은 운전을 하면서 핸즈프리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일조차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섯 가지 착각 가운데 다섯 번째 원인착각을 설명하면서 저자들은 2005년 신시내티 지역에서 홍역이 소규모로 확산되었던 상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홍역은 호흡기를 통하여 전염되는데, MMR백신을 통하여 체계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통하여 강력하게 통제되는 급성 전염병이기도 합니다. 홍역과 같은 급성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집단의 90% 이상이 백신을 맞아 면역이 만들어진 상태에 이르면 집단 내에서 전염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홍역백신이 소아자폐증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확산되면서 홍역백신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1998년 영국의 내과의사 앤드류 웨이크필드가 랜싯이라는 의학잡지에 자폐증 환자 12명 가운데 8명이 MMR백신과 관련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면서 이슈가 되기 시작했고, 웨이크필드의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저자들은 플레이보이 출신 배우 제니 맥카시가 미국사회에서 홍역백신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용하면서 그녀의 인식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 역시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 있는 제니 맥카시의 책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71623>를 읽고 문제점을 정리한 리뷰를 작성한 바 있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잠재력착각에 관한 설명 가운데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치매와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였습니다. 저자는 닌텐도사의 게임이 두뇌기능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dsn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줄어들며, 운동을 할수록 우리 몸은 나아집니다. 그런데 두뇌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레인 에이지는 인지훈련을 통해 뇌로 가는 혈류를 개선할 수있다는 전제 하에 기획되었습니다.(317쪽)” 하지만 저자들은 닌텐도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두뇌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지훈련을 하는 것보다는 유산소운동이 훨씬 좋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인용하여 이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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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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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뤼야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전남편의 소재에서 찾던 갈립은 사촌형 제랄 역시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갈립은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어디에 숨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제랄의 집에 숨어들어 지내면서 그의 칼럼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홀수장에서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한편, 짝수장에 배치한 제랄의 칼럼에는 집필 당시의 터키의 국내 상황은 물론 과거에 이스탄블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신화,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칼럼에서 다루고 있는 과거의 자료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관을 만들어서 과거 사건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 8장에서는 터키의 ‘민주화의 길’이라는 암흑기를 지배하던 독재자가 자녀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소개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가운데 독재자가 촌부의 옷을 입고 경호원도 없이 민정시찰에 나서는 부분은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고 하는데, 근래에 우리 지도자가 남몰래 민정시찰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16장에서 왕위계승서열 상위에 있는 왕자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질 책임의 무한함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혹은 될 수 없는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하여 온전히 독서에 몰두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은 왕자는 자기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그 책을 쓴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찢거나 불태워버리고 맙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찾고자 한 왕자의 집념은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마음 속의 고요를 기다리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다.(283쪽)”고 적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부가 시작하면서 제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갈립에게 제랄을 찾는 전화가 이어집니다. 군부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겠으니 칼럼에서 다뤄달라는 요구인데 갈립은 제랄인척 대응하면서도 만나주기를 거절합니다. 결국 이 남자는 2부 막바지에서 무렵 제랄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게 되는데, 제랄의 소재를 모르는 갈립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랄이 종적을 감추기 전에 신문사에 남겨둔 여분의 칼럼이 줄어들어가면서 제랄의 칼럼의 경향을 정리하게 된 갈립은 제랄을 대신하여 칼럼을 작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제랄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갈립의 무의식 희망사항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검은책>이 전하는 비극적 결말은 갈립이 뒤쫓던 제랄이 알라딘 가게 앞의 작은 광장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고, 이어서 알라딘의 가게 안에서 역시 총에 맞아 숨진 뤼야가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독자여, 아, 독자여, 나는 이 책을 쓰는 내내, 화자와 주인공을, 칼럼과 사건이 설명되는 부분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는데, 언제나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 어떤 책에는 우리 마음속 깊이 와 닿아 영원히 새겨지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마치 ‘그 스스로’의 흐름 때문에 너무나 우리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경우 말이다. (…) 내 이야기의 이 페이지들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기억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쇄공에게 이 페이지를 검은 잉크로 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일 것이다.(292쪽)” 검은 페이지에 대한 갈립의 이야기가 한번 더 나옵니다. “이제는 뤼야에게서 내게 남은 것들은 오로지 이 글이다. 이 검고, 새까만 어두운 페이지들.(313쪽)”

 

기억은 <검은책>에 숨겨진 모티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곳곳에서 기억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제랄은 치료약이 없는 기억감퇴증에 걸렸고, 자신의 병을 숨기기 위하여 갈립과 뤼야에게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전이 숨겨져 있음에도 갈립은 내색하지 않고 제랄과 뤼야의 행적을 뒤쫓았다는 점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가 <검은책>의 형식에 대하여 옮긴이와 인터뷰한 내용이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데,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처럼 사건이 전개되는 동시에 사이사이에 칼럼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검은책>은 나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는 내 영혼의 혼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320쪽)”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옮긴이가 적은 대로 “줄거리를 따라가는 독서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이야기가 중간중간에 끊기며, 칼럼이 삽입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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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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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네 번째 소설 <검은책>은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는 홀수장은 제3자의 눈으로 갈립의 행동을 뒤쫓고 있으며, 짝수의 장은 갈립의 사촌형 제랄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글(혹은 칼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참을 읽어나간 다음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립의 아내 뤼야는 백부의 딸이니 사촌간인 셈입니다.

 

홀수장의 주인공 갈립이 출근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가지 집에 있던 뤼야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종적이 묘연하고, 사촌형 제랄 역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어서 갈립은 사라진 아내와 제랄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제3자적 위치에서 뒤쫓아 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두고 갈립은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고 적고 있기도 합니다. 독자는 갈릭의 뒤를 따라 이스탄블 시내 곳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만약 이스탄블에서 잠시라도 살아보았더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났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하지 못하니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손끝이 겨우 보이는 안개 속에서 앞선 사람을 놓칠까 바짝 붙어가다 보면 좌우로 무엇이 지나가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제3자가 가끔씩 갈립을 놓치는 모양으로 설명이 생략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3장의 말미에 뤼야가 남겼다는 작별편지를 발견했다는 서술을 건너뛰고 있는 장면이라던가 열아홉 단어로 되어있다는 편지도 ‘가족들에게 잘 말해’, ‘네게 곧 연락할게’라고 조각내어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뤼야의 종적을 찾기 위하여 찾은 친구 사임의 집에서 갈립의 행동이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갈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뤼야에게 전화를 했다. 어쩌면 밤늦은 시간까지 사임의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113쪽)” 분위기가 미스터리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임은 다양한 출판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갈립은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통하여 뤼야의 전남편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한다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행적을 뒤쫓는 남자가 심야에 길거리에서 만난 삐끼에 이끌려 퇴역배우를 흉내내는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제랄의 컬럼은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터키의 역사를 비롯해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랄이 작가가 자신을 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글쓰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칼럼니스트들을 통하여 소개하기도 합니다. 도덕보다는 재미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제랄에게 전하는 이들의 충고는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따로 메모를 해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일부를 인용해보면, “즐겨 쓰는 속담, 관용구, 격언, 일화, 농담, 시행, 금언을 모아두라.”, “주제를 택한 다음 글에 왕관을 씌울 적당한 금언을 찾지 말고, 금언을 택한 다음에 이 왕관에 걸맞는 적당한 주제를 찾으라.”,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기 전에는 책상에 앉지 말라.(130쪽)” 등등입니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하여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검은책> 역시 <하얀성>과의 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내가 이렇다 할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떠나 버리자, 작가에게는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 아내가 떠나기 전에 그는 서로의 삶을 바꾼,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독자들이 ‘역사적’이라고 했던)을 썼다고 한다.(236쪽)” 여기에서 말하는 여기에서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은 파묵의 전작 <하얀성>을 암시한다고 하는데, 아내가 떠난 작가에서 갈립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어 제랄과 갈립이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검은책> 1권에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홀수장과 짝수장이 교체되면서 터키의 역사로부터 현대의 사회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엮어 넣고 있어 이야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미스터리한 상황입니다. 이렇듯 풀어놓은 이야기가 2권에서는 어떻게 모아져 정리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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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 닮은 듯 다른 한옥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이상현 지음 / 시공아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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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워크숍을 다녀오는 길에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유적에 들렀습니다. 이곳에는 다산선생의 묘소가 있고,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여유당’이라는 이름의 사랑채와 안채로 된 단촐한 한옥을 보면서 어렸을 적 살았던 한옥이 그리워집니다. 그때만 해도 생활공간이었던 한옥이 어느새 추억 속의 공간으로 밀려나 있음을 발견합니다. 안채 마루에 앉아서 혹은 토방에 서서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건너편 사랑채 기와 위에 소복이 앉은 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랑채의 창을 건너 안채의 건넌방이 엿보면서 왜 이런 구조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마침 시공아트에서 새로 나온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을 읽게 되면서 저자이신 이상현님께서는 명쾌한 답을 주실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은 이제는 시골마을에서도 귀한 존재가 되고 있는 전통 한옥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저자가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먼저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전남 나주시 도래마을에 있는 홍기웅가옥을 설명하는 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옥에는 음악처럼 높낮이가 있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지붕 선이 리듬을 타고 추녀 끝에 걸리면, 벽면을 채운 재료들이 질감의 변화를 이끌며 흥을 돋운다. 한옥에서 시작한 율동감은 자연스럽게 마을로 이어진다. 가을이 봄처럼 화사한 도래마을이라면 율동감이 당연 도드라진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강한 율동감이 몸을 자극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245쪽)” 하나 더, 경남 안동시에 있는 남흥재사에서의 느낌도 예사롭지 않게 설명합니다. “누마루에 앉자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마음을 태운 시선이 누마루에서 쪽마루를 지나 대청으로, 대청에서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파도를 탄다. 동선을 거꾸로 흐르는 눈길이 리듬을 타 신바람 난다.(351쪽)”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옥을 구경거리 삼아 찾아보지만 그 집이 그 집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한옥에서 살았던 경험이 다른 한옥에서 특별한 의미를 구하려는 시선을 가로막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한옥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 건물과 달리 한옥은 사는 사람을 중시한다. 때문에 한옥을 제대로 보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처럼 대청에 올라 먼산바라기도 하고, 방에 앉아 머름(문턱보다 높은 창턱)에 팔을 얹고 마당도 내다봐야 한다.(211쪽)” 하지만 한옥에 대하여 정통했다고 할 저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한옥도 있는 모양입니다. 짐 구석구석을 돌아보아도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궁금증을 풀어낼 단서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한옥을 제대로 감상하는 눈은 의문을 가지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열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는 모두 24곳의 전통한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곳의 살림집 한옥 이외에도 성당, 절집, 서원, 향교, 재사 등 전통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7곳의 한옥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감이 넘치는 설명을 뒷받침할 많은 사진을 더하고 있어 마치 현장에서 설명을 들으면서 전통한옥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한옥을 짓는 과정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건축하시는 분들이 설계도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기억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기억이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되살려주는 대목도 있습니다. “한옥의 아름다움 중에서 첫 번째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지붕선을 꼽는다. 그런데 한옥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지붕선을 만드는 방법이 아주 독특하다. 그냥 대충 만든다. 정말 대충만든다.(291쪽)” 두 번씩이나 강조한 대충 만드는 놀라운 과정은 책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전통가옥들은 개인의 재산임에도 세상에 내놓은 것들로서 관심이 있는 분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라고 합니다. 근처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들러서 전통한옥에 담겨 있는 특별한 의미를 이상현님의 정감 넘치는 설명과 함께 감상해보는 것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다산 생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점으로 전통한옥의 멋을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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