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편에서 뤼야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전남편의 소재에서 찾던 갈립은 사촌형 제랄 역시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갈립은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어디에 숨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제랄의 집에 숨어들어 지내면서 그의 칼럼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홀수장에서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한편, 짝수장에 배치한 제랄의 칼럼에는 집필 당시의 터키의 국내 상황은 물론 과거에 이스탄블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신화,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칼럼에서 다루고 있는 과거의 자료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관을 만들어서 과거 사건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 8장에서는 터키의 ‘민주화의 길’이라는 암흑기를 지배하던 독재자가 자녀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소개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가운데 독재자가 촌부의 옷을 입고 경호원도 없이 민정시찰에 나서는 부분은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고 하는데, 근래에 우리 지도자가 남몰래 민정시찰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16장에서 왕위계승서열 상위에 있는 왕자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질 책임의 무한함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혹은 될 수 없는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하여 온전히 독서에 몰두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은 왕자는 자기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그 책을 쓴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찢거나 불태워버리고 맙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찾고자 한 왕자의 집념은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마음 속의 고요를 기다리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다.(283쪽)”고 적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부가 시작하면서 제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갈립에게 제랄을 찾는 전화가 이어집니다. 군부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겠으니 칼럼에서 다뤄달라는 요구인데 갈립은 제랄인척 대응하면서도 만나주기를 거절합니다. 결국 이 남자는 2부 막바지에서 무렵 제랄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게 되는데, 제랄의 소재를 모르는 갈립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랄이 종적을 감추기 전에 신문사에 남겨둔 여분의 칼럼이 줄어들어가면서 제랄의 칼럼의 경향을 정리하게 된 갈립은 제랄을 대신하여 칼럼을 작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제랄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갈립의 무의식 희망사항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검은책>이 전하는 비극적 결말은 갈립이 뒤쫓던 제랄이 알라딘 가게 앞의 작은 광장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고, 이어서 알라딘의 가게 안에서 역시 총에 맞아 숨진 뤼야가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독자여, 아, 독자여, 나는 이 책을 쓰는 내내, 화자와 주인공을, 칼럼과 사건이 설명되는 부분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는데, 언제나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 어떤 책에는 우리 마음속 깊이 와 닿아 영원히 새겨지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마치 ‘그 스스로’의 흐름 때문에 너무나 우리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경우 말이다. (…) 내 이야기의 이 페이지들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기억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쇄공에게 이 페이지를 검은 잉크로 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일 것이다.(292쪽)” 검은 페이지에 대한 갈립의 이야기가 한번 더 나옵니다. “이제는 뤼야에게서 내게 남은 것들은 오로지 이 글이다. 이 검고, 새까만 어두운 페이지들.(313쪽)”

 

기억은 <검은책>에 숨겨진 모티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곳곳에서 기억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제랄은 치료약이 없는 기억감퇴증에 걸렸고, 자신의 병을 숨기기 위하여 갈립과 뤼야에게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전이 숨겨져 있음에도 갈립은 내색하지 않고 제랄과 뤼야의 행적을 뒤쫓았다는 점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가 <검은책>의 형식에 대하여 옮긴이와 인터뷰한 내용이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데,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처럼 사건이 전개되는 동시에 사이사이에 칼럼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검은책>은 나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는 내 영혼의 혼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320쪽)”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옮긴이가 적은 대로 “줄거리를 따라가는 독서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이야기가 중간중간에 끊기며, 칼럼이 삽입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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