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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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여러 책에서 소개된 바 있어 에밀 시오랑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폐허의 철학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절망을 겪고 있는 사람을 어설피 위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절망을 절망 자체로 응시함으로써 절망을 넘어서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첫 번째 글 서정적인 너무나 서정적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끈질기고 두려운 생각을 의식 속에 두면 인간은 파멸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 속의 무언가를 구해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 속의 무언가를 잃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견딜 수 없는 상태와 인간을 괴롭히는 그 같은 집요한 생각들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있다.(8)”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살고 있는 것은 끝없는 긴장을 객관화하면서 진정시켜주는 글쓰기 덕분이다. 창작은 죽음의 마수에서 우리를 일시적으로 구원한다.(14)”라는 글쓰기와 관련된 대목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우울, 고독, 슬픔,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천착하고 그 가운데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노력한 것 같습니다.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들을 겪을 때는 세상이 답이 없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더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견디다보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 잠 못 이루는 동물은 불면으로 고통 받는 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체 동물 세계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잠을 자기 원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152)’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모든 동물은 신체의 요구에 따라 잠이 들 시간이 되면 잠을 자는데, 인간만이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잠들지 않는 유일한 동물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수면은 망각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삶의 비극, 그 뒤엉킴과 집요한 생각들은 잠자는 동안에 잊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수면은 기억을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깨어있을 때 경험한 것들은 잠을 자는 동안 기억으로 정리된다고 알려져 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도 놀랍기만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오랑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던 한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의심을 품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망설였던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산 위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였다. 나는 예수가 바로 그 때 이름 없는 인간의 운명을 부러워했을 것이며, 할 수만 있었다면 이 땅에서 가장 외진 구석에 숨어서 아무도 자신에게 희망을 걸지도 속죄를 요구하지도 않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기독교 쪽에서 보면 황당할 수 있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오랑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인색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에서는 내가 나 자신을 괴롭히든 고통스러워하든 혹은 뭔가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지만, 또한 동시에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옮긴이는 죽음, 허무, 절망, 고독. 시오랑의 단상에서 늘 마주치는 이 단어들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 희망, 미래와 같은 기분 좋은 환상 대신에, 고통, 번민, 우수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차가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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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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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로 서경식교수님을 만난 지도 벌써 11년이 되었습니다. <나의 영국 인문 기행>은 두 번째 만나는 서교수님의 책입니다.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온 서교수님의 책들을 읽을 기회가 그동안 왜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2014년 이탈리아 여행에 이어 2015년에는 영국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2018년에 먼저 나온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에 이은 저술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여행사 상품을 통하여 이탈리아와 영국을 주마간산 식으로 다녀온 이야기를 적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교수님은 케임브리지, 올드버러, 런던 등을 여러 차례 다녀온 경험을 녹여내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문 기행이라고 했지만, 내용을 보면 음악과 미술을 주로 다룬 예술기행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특징은 짝수 쪽에 기행문을 적었고, 같이 열리는 홀수 쪽에는 글에 대응하는 사진을 실었다는 점입니다. 마침한 사진이 없을 때는 쪽을 비워두는 여유(?)를 보였군요.


젊어서는 회의나 학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해외여행을 다니다보니 회의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하고, 회의가 끝나는 날 귀국하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물론 비용을 제가 부담한 것이 아니라서 해외출장에 관한 관련 규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비용을 제가 부담하면서 여행을 하게 되니 마음이 편하기만 합니다.


서교수님 역시 여러 도시에서 강의와 강연을 하면서 인터뷰도 하는 등 공식적인 활동에 개인 일정을 끼워 맞춰 관심분야를 구경하는 여행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장 케임브리지 I“2015226, 나와 F는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로 시작합니다. F에 대한 설명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중학교 음악교사로 오래 근무했다는 F는 여행에서 서교수님의 곁을 늘 지키는 듯합니다. 2021년에 국내 신문에 실린 글에서 아내(F라고 하겠다)의 허락을 받고, 그녀에 관한 얘기로 시작한다라고 시작하는 대목을 찾아 읽고서야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여행 중에 F가 서교수의 혈압과 혈당수치를 신경쓴다고 언급한 대목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추정할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본인은 대충 신경쓰지 않다보니 가끔은 다투기도 한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세 여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결혼해서는 아내의 말을 그리고 운전할 때는 길을 안내하는 여성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교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구경한 장소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크롬웰이나 버지이나 울프와 같은 비교적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과 관련된 장소도 있지만 현대 미술이나 음악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친숙하지 않은 분들에 관한 이야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크롬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보려는 시도 역시 익숙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이전인 1940년 일본정부로부터 의뢰받은 황기 2600년 봉축곡을 작곡하였다는 벤저민 브리튼의 사정을 읽으면서 친일 혹은 친나치 행적을 보였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안익태 선생의 처지가 생각났습니다.


서교수님이 스물한 살이 되던 무렵 일본에서는 학생운동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고 하는데, 서울에서는 두 형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있는 등 개인적으로는 어렵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이라는 따위의 말을 한다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으리라.(242)”라는 폴 니장의 소설 <아덴 아라비아>의 한 대목을 좌우명으로 새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의 스무 살은 예과 2학년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의과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무의촌진료 등에 관심을 두던 시절입니다. 저의 스무 살은 그런대로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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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동서문화사 월드북 76
허먼 멜빌 지음, 이가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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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아내가 골라 읽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읽은 기억으로는 꽤나 얇은 책이었는데 막상 도서관에서 빌려온 동서문화사가 월드북 기획으로 내놓은 <모비 딕>은 작품해설을 포함하여 735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읽어가다 보니 어렸을 적에 읽은 <모비 딕>은 청소년을 위한 기획으로 화자인 이스마엘이 포경선에 탑승하는 과정에서 시작해서 출항 후에 모비딕을 뒤쫓아 가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 3일에 걸친 대결을 중심으로 하는 줄거리를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전은 그야말로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모든 사실을 정리한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고래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서양에서는 기름을 뽑아 등유와 화장품 원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고래를 잡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고래를 잡았는지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자 세계적으로 포경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흔히 <모비 딕>은 거대한 흰 고래를 잡으러 나섰던 에이허브 선장이 한쪽 다리를 잃고서 복수에 나선 여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코드 곶 남쪽에 있는 낸터킷 항을 떠난 피쿼드호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로레스 제도에서 남하하여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트 강 어구에 있는 프레트 어장을 거쳐 다시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 연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 남쪽의 캐롤 어장을 거쳐,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을 남쪽으로 동진하여 수마트라, 보르네오, 필리핀을 지나 일본 남쪽의 어장을 거쳐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모비 딕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 항로는 계절 별로 모비 딕이 출몰하는 어장이었습니다.


에이허브 선장은 배를 운항하는 도중에 포경선을 만날 때마다 모비 딕을 보았느냐고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모비 딕의 행적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는 바다사람들이라면 의례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모비 딕의 추격에 나섭니다. 모비 딕의 출현을 처음 알려준 레이첼 호의 선장이 실종된 아들들이 탄 보트의 수색요청을 거절하고 모비 딕의 추적에 나선 것입니다. 그로부터 에이허브의 피쿼드호는 사흘 낮 밤을 통하여 모비딕을 추격하고 대결을 펼칩니다. 에이허브와 용감한 선원들은 모비 딕에게 몇 차례 작살을 던져 꽂았습니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이라 할 만큼 지략을 가진 모비 딕은 작살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피쿼드 호와 충돌하여 침몰시키고 말았습니다. 피쿼드 호에 승선한 모든 선원들이 몰살했더라면 이들의 엄청난 대결과정도 묻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만, 화자인 이스마엘이 아들을 찾아 헤매던 레이철에 의하여 구조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에이허브 선장과 피쿼드 호의 용감한 선원들이 모비 딕과 맞서는 과정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속에서 읽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피쿼드 호가 일본 어장을 지날 무렵 만난 태풍을 거슬러 가는 과정 역시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휘몰아치는 광풍과 거대한 파도 속에서, 그야말로 일엽편주에 불과한 피쿼드 호를 조종하여 태풍 속을 뚫고 나가는 모습은 엄청난 자연의 힘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낸터킷에서 조우하여 우정을 쌓게 되는 작살잡이 퀴퀘그가 모시는 검둥이 신의 이름이 요조라는 읽고는 놀랐습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만났던 홍대 여신의 이름이 요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녀의 예명은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大庭葉蔵)에서 따왔다고 들었기 때문에 퀴퀘그의 검둥이 신과는 무관할 것 같습니다. 요조씨는 이 사실을 알까 모르겠습니다.


페루의 리마에 대한 기록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리마를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슬픈 도시로 만든 것은 () 리마가 흰 옷을 입고 있으며, 그 흰 색조에 한층 더 귀기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261)”


오늘날의 포경 장면과는 많이 달랐을 19세기 무렵의 포경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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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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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https://blog.naver.com/neuro412/221786919624>를 읽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연구한 열정과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이라는 정도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흔히 에피쿠로스주의라고 하면 술과 식도락, 육체적 욕구 등 퇴폐적 방종을 연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ataraxia),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aponia)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원자론에 따라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삶의 즐거움, 즉 쾌락은 네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먹는 행위와 같은 동적인 육체적 쾌락, 배고프지 않은 상태와 같은 정적인 육체적 쾌락, 친구들과의 즐거운 대화와 같은 동적인 정신적 쾌락,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은 정신적 쾌락입니다. 이들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불안도 걱정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정신적으로 평정상태에 이르려면 정신적으로 불안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불안의 네 가지 원인을 규명하고 불안할 이유가 없는 까닭을 제시했습니다.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네 가지 처방인 셈입니다. 필로데모스가 정리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를 요약한 네 가지 처방(Tetrapharmakos)’는 이렇습니다. “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77)”


오늘날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남녀가, 노소가 서로 대치하여 갈등을 빚고, 욕구와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앞세우다 보니 나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에 앞선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자리하게 된 탓으로 보입니다. 나의 권리가 중요하다면 타인의 권리 또한 중요하므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국 개인의 욕구를 적절한 선에서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을 추구해왔습니다. 이는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은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널리 각인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타인과의 차이를 채워야 한다는 욕구가 불만과 불안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삶이 피폐해진 것입니다. 조그만 행복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삶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설명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살아 있지 않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살면서 두려울 것은 없다.(92)’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죽으면 어떻게 될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너무 일찍 죽는 건 아닐지 걱정하느라 정신력을 낭비하기보다 지금 이 삶을 즐기는 데 집중하라는 설명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는 호라티우스의 유명한 경구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진정한 철학을 길잡이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소박한 생활에서도 충만함을 발견할 것이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런 생활을 즐길 것이다.(114)’라는 루크레티우스의 조언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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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진정한 욕망과 영성 그리고 사랑을 찾아 낯선 세계로 떠난 한 여성의 이야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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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누군가의 책에서 보고 읽게 된 책입니다. 요즘은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책의 경우는 다른 작가의 같은 제목의 책을 읽은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이탈리아에 갔을 때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던 루카 스파게티가 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로마편>을 먼저 읽은 셈입니다. 루카 스파게티의 책은 너에게 친구가 있잖아라는 부제를 달았고,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책은 이탈리아인도인도네시아의 삼색 여정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루카 스파게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로마편>을 읽고서 공감되는 바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책을 읽고서는 원전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주장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9.11사건이 일어나기 2일 전인 200199일 남편과 마지막 만찬을 끝으로 돌입한 이혼투쟁과 그 기간 만났던 남자와의 이별 등으로 탈진한 저자가 이탈리아에서 4개월, 인도에서 4개월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4개월을 보내면서 심신을 정화해나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남편도 괜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작가는 모든 재산을 남편에게 넘겨주고 빈털터리로 몸만 빠져나왔다는, 그러니까 이혼에 합의해주지 않는 남편은 형편없는 사람으로 짐작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혼투쟁을 하는 동안 단순한 별거가 아니라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거하다가 그마저도 결국은 헤어지는 선택을 하면서도 사랑타령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4개월씩 살아보는 이유나 과정도 거창해보이지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로 가서 4개월을 살아보기로 한 것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만,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미국 교수가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어를 배운 다음에 이탈리아어로 썼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의 저자는 이혼에 성공(?)하였지만 이혼과정에서 의지했던 연인과의 관계가 모호한 이유로 깨지고 나서 심기일전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를 비롯한 삼국 여행을 결정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1년여에 걸친 3국 여행 과정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더 이상 이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은 그 많은 이유들은 너무도 사적이며, 너무도 슬프기에 여기서 공개하지 않겠다.(26)”라고 잘라 말하고, “대부부의 이유들은 내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제의 상당부분은 또한 그의 탓이기도 하다.”라는 대목을 읽다보면 내 탓을 남에게 전가하는 작가의 묘한 심리를 엿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 초반에 발견한 오자(샌프란시스코 만의 알카트라즈 섬의 감옥을 알바트로스로 적었습니다)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삶의 근본이 흔들리던 여성이 스스로를 추슬러나가는 과정은 분명 다른 여성들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작가처럼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인도의 뭄바이에서도 떨어진 시골 마을에 있는 명상훈련원 아쉬람에서의 정진을 통하여 흔들리던 마음을 추스른다거나, 우연히 만난 주술사와 함께 지내기 위하여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찾는 일을 따라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 만의 길을 찾기 위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지 않아도 살고 있는 장소에서 혹은 그리 멀지 않은 군내에서도 적절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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