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 살림지식총서 127
손세관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가을에는 스페인에 꼭 가보려고 합니다. 스페인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지금도 짓고 있는 성가족성당과 안토니 가우디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미술관들을 소개하는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 http://blog.joins.com/yang412/13205419>편에서는 바르셀로나에 흩어져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림지식총서 시리즈로 나온 손세관교수님의 <안토니 가우디>는 안토니 가우디가 건축가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당대의 경향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건축세계를 구축하게 된 배경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우디의 특별한 건축세계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

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빛이 넘쳐나는 카탈루냐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는 타라고나주의 레우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에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각각의 양식들로 건축된 성당들의 잔재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런 영향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향의 자연이 가우디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했다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건축 유적들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힘을 주었다.(15쪽)” 스페인 건축을 전공하신 김희곤교수님은 <스페인은 건축이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81380>에서, 스페인 건축의 특징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온 아랍세력이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유럽 문명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건축양식이 태어나게 되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여유 덕분에 이들 건축물들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소로는 가우디의 부모는 모두 세습되어 내려 오는 장인집안 출신입니다. 특히 부계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구리로 솥과 그릇을 만드는 구리 세공업을 해왔는데, 가우디는 아버지를 도와 구리를 세공하는 법을 익혔던 것이 건축에 공예적 요소를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공업의 몰락을 예견한 아버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의학을 공부하는 형을 따라서 바르셀로나에 보내 건축을 공부하도록 하였는데, 가우디는 학비를 벌기 위하여 건축과 관련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이 또한 그의 건축세계에 일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읽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건축학교 시절 가우디는 책을 통해 섹AP의 여러건축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특히 고딕복고주의 건축가로 대표되는 퓨긴(Pugin)과 러스킨(Ruskin) 그리고 비올레 르 뒥(Viollet-le Duc)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벽돌제조업으로 성공한 에우세비 구엘 바시갈루피와의 만남이야말로 가우디의 자신의 건축철학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건축은 자연에 대한 찬가라고 할 정도로 자연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조형감의 원천은 바르셀로나 북서부에 있는 몬세라도 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별명이 톱니꼴의 산이라고 하듯이 1,500개나 되는 봉우리들이 이어진 험난하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 요소들이란 “단순히 식물이나 동물이 가진 사실적인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공물과 구별되는 본질적인 형상, 즉 부드러운 유기적 ‘곡선’으포 표현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42쪽)”라고 합니다.

 

성가족성당에서 볼 수 있는 유기적 형태의 구조체에 대한 가우디의 의도는 이렇다고 합니다. “별은 천체궤도를 따라 공전한다. 그리고 나선형을 이루며 자전한다. (…) 별의 모양을 한 기둥도 좌우 양 방향으로 회전하며 이중나선형으로 운동한다. 모든 양식이 종합된 성가족 성당의 기둥장식은 이 원칙에 따라 적용되었다.(51쪽)” 그냥 찾았더라면 지나치고 말았을 포인트입니다. 성가족성당을 방문했을 때 꼭 확인하고 느껴봐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는 ‘기억’을 화두로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데, 사실은 작가의 바탕이 되는 화자의 책읽기에 관한 대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라신, 상드, 지드, 심지어는 가공의 인물인 베르고트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관하여는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3111784>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라신을 비롯하여 뮈세 등의 작품들을 인용하여 분위기를 띄우거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끌어다가 비유하기도 하는 등, 화자의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전반에서 화자의 문학적 스승 베르고트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화자의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짧은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에서는 화자의 문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해주는 예술적 스승 엘스티르 그리고 화자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친구 생루와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중매쟁이 역할을 하게 되는 화자의 운명의 여인 알베르틴과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질베르트와 알베르틴은 대조적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의 차이도 그렇고, 첫만남에서 화자에게 주는 느낌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질베르트와의 관계는 첫만남에서 불꽃이 당겨져서 화르르 타올랐다고 스러지는 그런 사랑이었다고 하면, 알베르틴은 한 무리의 소녀들 틈에서 조금씩 감정이 깊어지는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질베르트와의 이별이 주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하여 떠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만, 사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발베크에서 만난 재기발랄한 소녀들 가운데는 알베르틴 보다 화자와 잘 어울리는 소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베르틴 역시 처음에는 화자에게 거리를 두면서도 사랑을 표시하는 등 애매한 상황을 반복하는데, 운명의 실타래는 어쩔 수 없이 엮어들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알베르틴을 만나기 시작할 무렵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 오기 전에도 알베르틴은 내게 미지의 인물이자 거의 식별할 수조차 없던, 그저 지나는 길에 스친 여인, 그래서 우리 삶을 오랫동안 사로잡게 될 그런 유일한 환영은 아니었다.(381쪽)” 그러면서도 알베르틴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한 존재의 얼굴 전면에 배열된 장점과 결점은 우리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 완전히 다른 구성에 따라 배열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마치 도시에서 단 하나의 선에서 보면 무질서하게 흩어진 듯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념물들이 세로로 배열되고 그 상대적 크기도 맞바꾸는 것 같다.(382쪽)” 옮긴이는 알베르틴의 성격에 대하여 디오니소스 신이 상징하는 쾌락과, 자전거와 골프가 상징하는 현대성을 동시에 구현하며 동성애적인 성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각주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콩브레의 전원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라거나, 발베크의 바닷가 풍경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내는 솜씨를 보면 엘스티르와의 만남은 화자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들어서면 많은 미술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화가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화가와 그들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고서 화자가 인용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해서 읽어본 것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으면서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화자가 할머니와 함께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발베크에 이르는 여정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열차에서 맞는 아침을 묘사하는 장면도 대단합니다. “나는 진홍빛을 발하는 변덕스럽고도 아름다운 아침의 그 불연속적이고도 대립되는 단편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화폭에 담기 위해…(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업의 시대 - 중국 CCTV.EBS 방영 다큐멘터리
중국 CCTV 다큐멘터리 제작팀 (총감독 런쉐안) 지음, 허유영 옮김, 런쉐안 / 다산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기업이라고 한다면, 1919년에 우리 손으로 우리 옷감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이 최초라고 합니다. 이토록 기업의 역사가 짧은 만큼, 우리나라의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는 동안 기업의 부침 또한 심했다고 하겠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55년 우리나라의 100대 기업 중 2005년까지 남아 있는 기업은 7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이홍표, ‘경제성장의 선봉…각본없는 드라마’, 한국경제매거진 663호, 2008년 8월호 기사)

 

기업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효율성이 높은 경제 조직으로 ‘인류가 얻어낸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연관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업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일 수 있습니다. 중국의 CCTV가 기업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기업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또 어떻게 시대를 변화시켜왔는가? 하는 기업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하여 각국 기업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뒤쫓아보는 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하였고, 그 기록을 <기업의 시대>로 엮었습니다.

 

중국의 무역총액이 2012년 기준으로 미국을 앞서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되었고(연합뉴스 2013년 2월 9일자 기사, “中 무역총액 세계1위…처음으로 미국 앞질러”), 세계은행이 구매력평가(PPP) 기준을 적용한 국내총생산(GDP)을 재산정한 결과 중국의 경제규모가 올해 안에 미국을 앞질러 세계 1위에 등극할 전망이라는 소식도 나오고 있습니다(국민일보 2014년 5월 1일자 기사, “[중국의 현주소 2題] 치솟는 경제 위상… 구매력 기준 GDP 세계 1위”). 이와 같은 중국의 성장세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힘입은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가도 오뚝이처럼 일어선 덩샤오핑이 1978년 권좌에 오르면서 주도한 ‘개혁과 개방을 통한 경제발전 정책’이 꽃을 피운 결과라고 해야 하겠습니다(에즈라 보걸 지음, 덩샤오핑 평전, 민음사 펴냄,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397805) 19세기 말부터 외세에 시달려온 중국이 이제 일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경제전문가 김태일님은 경제분야 이외에도, 문화, 금융, 소비, 산업, 자원, 군사, 해양 그리고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오르려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김태일 지음, 굴기의 시대, 이담북스 펴냄,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278563)

 

중국의 CCTV가 <기업의 시대>를 기획한 배경에는 그동안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신감이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모두 5개의 제작팀이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3대륙, 8개국을 돌았고, 각국의 유수한 대학과 경영대학원, 연구기관을 찾아 취재했는데, 5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와 100명이 넘는 역사․경제․정치․사회 등 각 분야의 석학들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제작진은 기업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 기업의 운명과 미래, 기업의 성장과 생존환경 등을 전반적으로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현실과 역사의 접목을 통해 단순한 즉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세한 자료와 스토리를 통해 차근차근 결론을 도출해내고자 했고, 현대적인 감각을 통해 풍부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7쪽)”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EBS를 통해 방영된 바 있다고 합니다. 책자로 만든 <기업의 시대>에는 취재과정에서 찍은 다양한 사진자료를 곁들이고 있고, 용어 등에 대하여도 주석을 두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다큐제작팀의 도서편집기법이기도 합니다. 서너 개의 절로 구성된 각장의 말미에는 해당분야의 전문가를 인터뷰한 자료를 요약한 ‘인터뷰 인사이드’와 해당 주제에 대한 ‘인사이트 리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기업이란 주주가 자본을 투자해 영리를 목적으로 법률에 따라 설립한 일종의 조직 형태다. 기업은 민사권을 행사하고 민사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주주는 출자한 액수나 소유 지분의 한도 내에서 기업에 대해 책임을 지고, 기업은 전체 자산의 한도 내에서 기업의 채무를 책임진다.(16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최근 의료계의 이슈가 되고 있는 영리법인 형태의 요양기관 설립이 가능하게 된다면 앞으로는 병원들도 기업적 마인드를 새롭게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의 전반부는 기업이 발전해온 역사적 발자취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기업이 선택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신흥시장국가, 중국의 기업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미래의 기업은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 하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신흥시장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발 앞서가고 있는 한국이 겪은 성공과 실패담이 아주 궁금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례를 별도의 장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 관하여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은 이미 중국의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거래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며 언어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21쪽)”라고 했습니다. 부록에 정리한 연표로 보는 기업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인과 수메르인이 계약을 처음 만든데 까지 기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 무렵에는 아시리아인이 펀드계약조항을 처음 만든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기업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형태는 1세기 로마시대 등장한 상업사단인데, 모종의 형식으로 유한책임을 지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발전한 현대적 의미의 기업은 16세기 후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등장했다고 합니다.

 

제국주의가 확대될 무렵에는 신대륙과 아시아대륙을 상대로 하여 기업활동을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특권을 행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기업들이 부패하고 윤리적으로도 타락하였으며 종국에는 무너지고 말아 투자자들이 커다란 손해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18세기 중반 일어난 산업혁명과정에서 기업들은 중대한 역사적 변환기를 맞게 됩니다.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식민지에서 수탈해온 풍부한 자원을 토대로 만든 공산품들을 역시 식민지 시장에 내다 파는 이중적 수익모델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신대륙이 급부상하면서 자유경쟁에 의한 시장경제가 열리면서 카네기, 록펠러와 같은 기업을 경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웅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업가들은 동맹이나 기업 합병을 통하여 규모를 확장하고 독점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유경쟁체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면서 미국 연방의회는 1890년 7월 2일‘불법적인 제한 및 독점으로부터 거래와 상업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 즉 셔먼법이라고도 부르는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제동을 걸게 됩니다.

 

언제까지 이어질 것만 같던 기업의 번영은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권거래소 개장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매도주문으로 시작된 대공황으로 중대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누구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기업이 당시의 경제위기에 기여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사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일정한 주기로 부침이 반복되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장이 자원의 배치에 관여하고 자본이 이익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한, 또는 부에 대한 인류의 끝없는 갈망이 존재하는 한, 경제 위기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228쪽)

 

제작진은 일본 기업의 성장 비밀로 ‘기업문화’를 들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아시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선두를 달렸던 일본은 “기업의 주인은 주주도, 경영자도 아닌, 그 회사 직원들(289쪽)”라는 특유의 기업문화를 창조해냈던 것입니다. 서구로부터 들여온 기업에 동양적 사고를 입힌 것입니다. 즉, 도덕과 정, 인간관계, 신뢰감, 친밀감 등 수천 년 동안 인류사회를 유지시켜왔던 기본요소들이 모두 기업의 생산력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본의 성공은 1980년대 전성기에 이르렀는데, 일본 기업들이 미국기업과 미국의 건물들을 사들여 미국인들을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1990년부터 일본은 오랜 기간 불황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일본이 잘 나갈 때 해외학회에 가보면 일본에서 온 참석자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불황기에는 오히려 한국에서 온 참석자들보다 적은 경우도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점을 우려하는 일본의 식자들이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좀처럼 해외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 세계는 넓고 내가 모르는 일은 더 많다.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만이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안도 다다오 지음, 안도 다다오 일을 만들다, 115쪽, 재능교육,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384160)

 

일본의 침체기에는 특유의 기업문화가 오히려 기업발전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기업들은 선두주자를 따라가다가 추월하는데 성공했지만 막상 선두에 서는 순간에는 후발주자들을 이끌어본 경험이 없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선두에 서기 위해서는 창조와 혁신이 필요하고, 창조와 혁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한때 일본에 밀리던 미국이 다시 정상에 서게 된 것은 인문학에 기반하여 창조와 혁신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도 과거 혁신을 국정의 화두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혁신을 강제하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혁신이 오히려 생각을 옥죄는 틀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고 혁신을 밀어붙이는 권력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혁신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장려하여 자연스럽게 혁신적 사고를 가진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센 변혁의 물결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중국은 국유경제와 시장경제가 개혁을 통하여 결합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라는 독특한 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지난 몇 년간 국유기업은 빠르게 발전하여 경쟁력을 갖춘 시장경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덩샤오핑 평전>에서도 보는 것처럼 중국의 지도자들이 선택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경제 발전과 중국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기업이 막중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389쪽).”라는 쿵둥 중국국제항공공사 전 회장이 인터뷰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가지고 있는 책임의식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경제의 향방은 오랜 세월 쌓여온 권력의 부패를 도려내는데 달려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결론부분입니다. 제작진은 “기업은 모든 시장을 동경하고 모든 시장으로 달려가며 모든 시장을 연결한다.”라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글로벌화하고 있는 기업의 생존전략의 핵심을 제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국가라는 틀을 뛰어넘는 거대한 조직으로 변신하고 있는 기업은 한편으로는 도덕과 제약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취약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업의 글로벌화는 미래의 발전된 모습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배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최근 세계시장에서 선두 위치에 오르고 있는 국내기업들의 사업전략을 보면 ‘현지화’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성공요인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시장을 개척하는데 있어 ‘표준화’를 무기로 다량생산체제를 통하여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요즈음에는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현지인의 감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현지화’ 전략이 강력한 대체무기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중국정부가 주도하는 국유기업이 국내 시장을 뛰어넘어 글로벌화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는 한국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 했는데, 공룡이 되어가고 있는 중국경제에 예속되지 않고 중요한 사업파트너로 남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생존전략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을 처음 읽는 경우에도, ‘나는 OOO을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저는 민음사의 새로운 번역판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것도 1권과 2권을 읽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오랜 기다림 끝에 두 번째 에피소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스완네 집 쪽으로’의 리뷰에서도 적었을 것입니다만, 민음사 판의 새로운 번역은 참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쓰는 말로 번역이 되어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그리도 두 번째는 옮긴이가 달아놓은 풍부하고 세심한 각주는 작품에 등장하는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를 포함하여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단 한번 읽어본 작품이라서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1); http://blog.joins.com/yang412/12855068] 그래서 리뷰의 요약을 이렇게 했습니다.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쓰여야 이루어진다던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사랑의 주는 희열과 이별의 고통을 새겨보는 시간”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는 화자의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과정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습니다. 화자는 어려서부터 베르고트의 작품을 읽고 따라 써보는 습작을 통하여 작가의 꿈을 조심스럽게 키워가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런 화자를 응원해주고 있지만, 아버지는 항상 내가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29쪽).

 

그런데 아버지가 초대한 직업외교관 노르푸아씨는 화자가 보기를 원하는 연극 <페드르>를 관람하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하고, “작가가 되어도 대사 못지않게 존경을 받을 수 있으며 대사와 동등한 활동을 할 수 있는데다가 대사보다 더 독립적일 수 있다고 단언”해서 화자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영향력 덕분에 외무부에서 일을 하게 된 젊은이가 글쓰기에 도전하여 책을 내고 성공한 사례도 인용하면서 화자의 문학에 대한 열망을 후원하기도 합니다(53쪽). 그 이면에는 새로운 계급 출신의 외교관들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그의 편향된 시각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환자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반면 노르푸아씨는 베르고트를 선망한다는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베르고트를 피리장이라고 몰아붙이면서 화자가 쓴 글에 대하여도 ‘베르고트와 똑같은 결점이 벌써 자네에게서도 보이네. 먼저 듣기 좋은 단어들을 나란히 배열하고 다음에 가서야 내용을 따지는, 조금은 거꾸로 된 방식이지(90쪽)’라고 비판하여 화자를 낙망시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노르푸아씨는 화자와 어머니가 경외하는 베르고트가 스완씨네 살롱에 자주 온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스완씨에게 화자를 추천하여 주기를 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화자는 스완씨네 집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베르고트를 만나게 되고, 라신의 희곡 <페드르>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를 놓고 토론을 나누게 됩니다. 노르푸아씨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베르고트에 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견지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베르고트가 화자를 총명하다고 평가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스완씨의 딸 질베르트와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잦아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지게 됩니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미처 모르던 면이 가까이 지내다 보면 눈에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할아버지의 기일에 음악회에 갈 예정이었던 질베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들 생각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감정적인 문제에서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야. 우리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느끼지 다른 사람을 위해 느끼는 건 아니잖아.(212쪽)”라고 단호히 말하면서 음악회에 가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화자는 콩깍지를 떼어내게 됩니다. 갈등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고 새로운 인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놓치고 지나갔던 것인데, 드레퓌스 사건이나 알베르틴의 등장이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가 전체의 이야기의 틀 안에 이미 자리를 잡고 전개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면 작가의 치밀한 기획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자, 장미여관으로 - 개정판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스24 덕분에 마광수교수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읽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북켄드에 개근하였다고 보내주셨습니다. 손에 들어온 책은 모두 읽는다, 그리고 읽은 책은 모두 리뷰를 적는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라 읽고 적습니다. 그 옛날 필화사건으로 마교수님을 알고는 있지만, 문제가 된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습니다. 요즘 같다면 문제가 될까 싶은 내용인데 그때만 해도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의 2013년 개정판 서문에서 시인은 이 작품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응축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무렵 시인의 상상력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해 나온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함께, 나는 한국문학의 경건주의와 도덕주의를 부수려고 노력하며 솔직한 대리배설의 문학을 새로운 문학으로 제시했다.(6쪽)”라고 자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홀딱 벗겨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무언가로 아슬아슬하게 가려 읽는 이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서 극대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꼭 들어맞는 비유는 아닙니다만, 조선시대를 풍미한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일송 심희수, 월사 이정구 등이 봄 꽃놀이를 갔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지 말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송강은 ‘맑은 밤 달 밝은 때에 다락 위로 구름 지나는 소리’가 제일 좋다 하였고, 일송은 ‘만산홍엽인데 바람 앞에 원숭이 우는 소리’가, 서애는 ‘새벽에 졸음이 밀리는데 술 거르는 소리’가, 그리고 월사는 ‘산간초당에서 선비가 시 읊는 소리’가 제일이라 하였습니다. 대체로 말씀하신 분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고 보이는데, 이날의 장원은 백사가 내놓은 ‘동방화촉 좋은 밤에 신부가 다소곳이 치마끈 푸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마시인의 기준대로 본다면 구닥다리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시 가릴 곳은 가리는 신비주의가 좋은 것 같습니다. 홀딱 벗은 모습이 아름다운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천해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솔직하게 까놓은 작품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 괴로워하는 이의 숨결까지 / 다 들리듯 / 고요한 하늘에선 // 밤마다 / 별들이 진다 // 들어 보라 // 멀리 외진 곳에서 누군가 / 그대의 아픔을 위해 / 기도하는 시간 // 지는 별들이 더욱 / 가깝게 느껴지고 // 오늘 / 그대의 수심(愁心)이 // 수많은 별들로 하여 / 더욱 / 빛난다”와 같이 주옥같은 시어로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별」도 실려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초판 서문에 적은 “나의 초기작에서는 치열한 고뇌와 갈등이 엿보이는데 요즘 작품은 너무 퇴폐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해주는 분들이 많다.(9쪽)”라는 부분을 보면 그 역시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작(詩作) 초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마침 오늘이 어버이날인 까닭인지 “어머니, 전 효도(孝道)라는 말이 싫어요 /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 또 기르시고 싶어서 기르셨나요? ”라고 시작하는 「효도에」라는 작품은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시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시인께서도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라고 말하고는 있습니다만, “‘너를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 이런 말씀일랑 말아 주세요”라는 싸가지 없는 말씀을 오늘 어버이날 어머니께 드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지요. 이런 시절이 지나면 다시 은근한 멋과 맛을 살리는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