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 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송호근 지음 / 다산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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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실시된 지방선거 결과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아홉 곳의 광역단체장을, 집권 새누리당이 여덟 곳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는 절묘한(?) 결과를 얻어 무승부를 이루었다는 총평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하던 야당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고를 일으킨 해운사나 사고 수습은 뒷전에 두고 탈출한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보다 갈팡질팡한 정부나 여당의 책임을 물고 늘어져 선거정국으로 이끌고 간 야당의 전략이 돋보였으며, 뻔히 보이는 야당의 전술에도 속수무책이었던 여당의 답답함 역시 돋보였다고 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양분화 되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 같습니다. 이성이 자리할 여유가 없이 오직 이념적으로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으로 분류하다 보니, 중립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역시 어느 편이든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편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념으로 무장한 거대한 두 세력이 좁디좁은 반도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인데, 그러다 보면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든 지구촌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을 모으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여 사회적 혼란이 악순환하고 있는 남미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구 선진국을 통하여 건강한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견제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때로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이루어낸 성과일 것입니다. 20세기 후반 압축성장이라고 표현되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 사회는 이어서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과정에서는 압축성장하지 못하고 이념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길어지는 암초를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우리사회의 미래가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으로 매몰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송호근교수님의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는 좌우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미래를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뜨게 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일할 무렵 만나본 적이 있는 송호근교수님은 정치와 경제, 사회를 넘나드는 넓은 안목과 정교한 분석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사회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0년대 성장위주의 국가정책이 빚어낸 노동문제와 불평등의 한국적 결합구조를 ‘시장기제적 통제’로 이론화하여 주목 받았으며, 유럽사민주의와 비교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복지의 발현메커니즘에 관한 탁월한 업적으로 ‘제도주의적 정책사회학’의 선두주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가진 그는 우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이념적으로 중도우파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의견수렴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반발한 의료계가 총파업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를 지켜본 그는 2001년에 한국의 의료문제를 분석한 내용을 담은 책 <의사들도 할 말 있었다>를 낸 바도 있어 의료계의 속사정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송교수님도 좌우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헤매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매일 터지는 사건과 쏟아지는 사회적 쟁점들 속에서 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라는 한탄으로 서문을 열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변하고 있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대응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이분법적 대응이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개발을 앞세운 독재가 통하던 1970~80년대에는 독재에 대항한 반독재는 정의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보니 제가 학교에 다니던 시설입니다. 당시에는 독재와 민주의 간단한 이분법이 가치관과 행동수칙을 제공했는데, 정의 개념이 명료했고 일말의 회의도 없었다고 저자는 그때의 사회적 분위기를 요약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분법적으로 싸웠고 이분법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재의 시대가 가고 민주의 시대가 왔습니다. 다양한 학문, 예술, 사상 등의 영역에서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분법의 시대가 가고 다분법의 시대로 진화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이념이 충돌하는 경계선에서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대화에 임하고 절충하여 타협을 이루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훈련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못하니 각자의 주장을 관철하는데 매몰될 수밖에 없고, 때로는 후퇴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단순한 전술도 잊었던 것입니다. 진영논리에 매몰되다 보니, 승패를 가리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승부가 결정되면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고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서 저자는 스스로를 중도우파로 평가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속내가 배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40대 초반 이후, 좌파정권 10년, 우파 정권 5년을 겪었습니다. 좌우파 모두 공과(功過)가 있습니다만 모두 ‘선머슴 같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좌파는 우파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았고, 우파는 좌파를 위험한 사람들로 낙인찍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거꾸로 얘기해도 틀리지 않습니다.(10쪽)”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저 역시 깊이 공감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좌파와 우파가 공감하는 시세와 처지에 대한 공통 인식, 즉 좌우파의 공동구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방정식’을 세워 이념에 집착하는 정치인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짓을 극복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대책을 요구하는 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요즘에는 촛불을 드는 경우가 참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시민들이 소통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소통에 대한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소통에 나서야 하는 쪽은 대응이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시민들이 충족되지 않는 소통에 대한 욕구를 거리로 나서 풀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고 합니다. 약자를 대변한다는 대통령이기에 소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했는데, 정작 자신의 입장이 강한 대통령은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힘을 쏟았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가 ‘불통정권’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이 미리 말로 쏟아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듣기’에는 너무 미숙했고, ‘말하기’에도 너무나 서툴렀기 때문에 ‘불통정권’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와 관련하여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결국에는 가두시위로 번지는 상황에서 ‘폭설이 쏟아질 때는 눈을 치워도 소용없다.’라는 이유로 광화문에 컨테이너를 쌓아 시위대를 차단하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촛불집회가 시작할 무렵 정부합동기자회견을 열어 끝장토론을 했던 것처럼 시민들을 상대로 협상과정과 광우병위험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낱낱이 밝혀 괴담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어야 합니다.

 

저자는 소통이란 상대적인 점을 들어 불통의 책임을 정부 혹은 권력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교양시민이 많지 않은 것 또한 불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교양시민이란 전문지식과 학식, 품위와 윤리를 갖춘데 더하여 공익에 대한 긴장을 내면화한 시민이라고 규정한다면, 교양시민층이 과연 얼마나 두터운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사회에서 교양시민의 축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커밍스가 냉소적으로 표현한 ‘이념의 정화(ideological purification)’가 공론장의 자율적 정화작용이 아니라 해방후 좌우세력이 격돌하는 가운데 극악한 폭력과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던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려가던 시민단체들이 정치권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들을 정치적 호위세력으로 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시민단체들은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면서 보수와 진보의 격돌과 정치투쟁을 조정하고 걸러줄 진정한 의미의 시민운동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정치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선거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뀐 정권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자 다시 정권을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즉, 오랜 세월을 거쳐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와는 달리 경제성장과 마찬가지로 민주화도 압축성장의 가도에 들어선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민주화는 정치민주화, 사회민주화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저자는 각 단계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민주화의 핵심은 정치 영역에서 ‘경쟁과 참여’촉진이고, 사회민주화의 핵심은 ‘기회균등’의 촉진과 ‘소득 불평등’축소이며,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거대 자본의 과잉권력통제’ 또는 ‘파행적 시장지배금지’이다.(153쪽)”

 

첫 번째 정권교체가 가능하게 한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시절 정치민주화의 기틀을 다졌다고 하면 두 번째 정권교체가 일어난 노무현정부와 이명박정부 시절에는 사회민주화라는 과제를 맡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주류의 주류화’를 겨냥했던 노무현 정부는 과격한 ‘말의 정치’ 때문에 좌절했고, 이명박 정부는 ‘무(無)정치’ 속에서 증발했다고 진단합니다. 정권연장에 실패한 세력이 선거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새 정부를 끊임없이 흔들었는데, 새 정부의 대응능력이 시원치 않았던 것이 사회민주화의 기간이 길어진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박근혜정부는 사회민주화와 경제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사회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지난 대선 때 화두가 되었던 무상복지에 대하여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진실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복지는 사회적 권리로서 누구나 태어나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혜택입니다. 중요한 점은 무상복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복지=기업 경쟁력 강화=일자리 지키기’라는 등식을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무현 정부시절 기업을 노동자에게 돌아갈 이익을 빼돌리는 집단으로 몰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은 기업은 생산활동이 위축되었고, 생산시설을 3국으로 이전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시장은 그만큼 위축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반기업 정서는 이명박 정부의 기업프렌들리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기업활동의 위축에 더하여 기득권자의 방어벽이 함께 작동하여 새로이 노동시장에 들어서야 할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복지논쟁의 이면에는 성장과 분배를 각각 강조하는 진영의 이념이 대립하는 구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이분법적 사회가 배태하고 있는 문제점인데, 저자는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독일의 사례를 참고할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적 규모의 통일비용, 실업난, 높은 수준의 복지, 기업 경쟁력 하락까지 겹쳐 위기상황에 몰렸던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로 수렴되는 공공철학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경제의 사령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몫을 줄여서 일자리를 창출해낸 독일인들의 공동체 우선 정신을 우리에 맞게 보완한 새로운 사회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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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과 치 - 인생의 격을 높이고 현자의 치를 터득하다
민경조 지음 / 알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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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동양의 고전을 인용하면 왠지 있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결국은 누군가 주석해놓은 책을 읽고 새기는 일도 벅차기만 합니다. 그래도 최근 들어 동양고전을 읽을 기회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오롱건설의 대표사장을 거쳐 코오롱 그룹의 부회장을 지내신 민경조부회장님의 <격(格)과 치(治)>는 저자가 동양고전을 읽고 마음에 새긴 구절들을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자의 약력에 보면, ‘그는 지금까지 1,000회 이상 <논어>를 일독한 것 외에도 <맹자>, <한비자>, <사기> 등 수많은 고전을 거듭 읽으며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사실 논어를 1,000회 이상 일독하다는 표현이 옳은지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서 고전 읽기를 생활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목 <격(格)과 치(治)>는 ‘인생의 을 높이고, 현자의 를 터득하다’라는 생각에서 뽑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성인들의 위대한 말씀과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이 담긴 고전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리더십의 모든 것이 담긴 보물상자라고 생각한다. 부디 이 책이 불확실한 내일을 항해하는 미래의 리더들에게 어제의 보석상자를 열어보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한다.(7쪽)”라고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날마다 성장하는 삶',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 그리고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고전을 모아 나름대로의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독특한 해석이 돋보이는 부분은 조삼모사(朝三暮四)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자> 황제편에 나오는 전국시대 송나라의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원숭이게 줄 먹이를 줄이려고 원숭이를 설득한 이야기입니다. 아침에는 도토리를 세 개, 저녁에는 네 개 준다는 말에 화를 내던 원숭이들이 아침에 도토리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는 말에 기뻐했다는 이 이야기는 흔히 저공의 지혜를 강조하거나 원숭이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데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자금관리의 기준이 바뀐 요즘 시대에는 원숭이들의 지혜가 더 뛰어났던 것으로 해석해야 맞을 것 같다. 즉, 원숭이들은 자원을 미리 확보하여 불확실성을 예방한 셈으로 ‘화폐의 시간적 가치’를 일찌감치 터득했던 것(187쪽)”이라고 말입니다.

 

하나 더 인용해보면,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자왈 비여위산 미성일궤 지 오지야 비여평지 수복일궤 진 오왕야)”라는 구절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가다 한 삼태기가 모자라는 데서 멈추었다 해도 내가 멈춘 것이며, 비유하건대 흙을 퍼부어 움푹한 곳을 메워가려고 할 때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서 진전되었다면 나 자신이 발전한 것이다.(22쪽)”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일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시작했다는 데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발전시켰다고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인가 봅니다. 그런데 저자는 탑을 공들여 쌓아가다가 완성 일보 직전에 그만둔다고 하면 지금껏 쏟은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것인데, 그래도 한 발작이라도 내딛는데 의미를 둘 수 있지만, 역시 용기를 내서 시작했으면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을 보아야 진정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심하고 인내심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즈음,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 때까지 나가는 사람, 이런 추진력있는 사람이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책읽기도 묘한 인연이 엮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마침 오늘 마무리해야 하는 글에 인용하면 안성맞춤이 될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와도 관련이 있겠습니다만, <논어> 팔일 편에 나오는 “獲罪於天 無所禱也(획죄어천 무소도야)”라는 구절로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조차 없게 된다(28쪽)”라고 풀이합니다. 최근에 일어난 각종 사건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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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빛나는 밤에 - 천체물리학부터 최신 뇌 과학까지, 우주의 역사부터 과학의 역사까지
이준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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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시원으로부터 태양계가 생기고, 지구에 생물이 생겨서 지금에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역사를 하나로 정리된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의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일단은 천체물리학으로부터 지구과학, 고생물학, 생물학, 사회과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137억 년이라는 긴 역사를 요즈음에는 <빅 히스토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빅히스토리를 개괄한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하고 있고, 다만 지금까지 읽어본 책들 중에 칼 세이건과 얀 드루얀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com/yang412/12597810>가 제가 원하는 바에 근접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천문학 혹은 우주과학을 전공한 칼 세이건이 공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시원에 관한 부분에는 전체 21개 장 가운데 첫 번째 장만을 할애한 점이 아쉬웠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저자가 쓴 <과학이 빛나는 밤에>란 책이 빅히스토리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같은 이름의 팟캐스트 방송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팟캐스트 방송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으려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쉽게 정리해서 이해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의 팟캐스트 방송은 대단한 시청자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여는글을 통하여 “우주의 시작부터 원소와 별의 형성을 거쳐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하고, 그렇게 진화한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자신의 근원인 우주를 들여다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열한 개의 단원에 걸쳐 이야기했다.(10쪽)”라고 적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천체물리학부터 최신 뇌과학까지’라는 부제보다는 ‘우주의 역사부터 과학의 역사까지’라는 부제가 더 적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이신 김희준교수님께서 추천사를 통하여 “저자의 재치있는 비유와 설명을 읽으며 과학 상식을 쌓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이 우주와 자연에 대해 보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5쪽)”라고 하셨는데, 책내용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교수님의 말씀대로, 이 책의 처음 두 단원에서는 138억년 우주의 역사에서 90억년을 차지하는 별과 은하의 진화를 거쳐, 태양계의 형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원에 관한 빅뱅이론은 물론 최근에 제시되어 주목받고 있는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최신지견을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생명, 동물과 식물, 인류의 진화까지 생명에 대한 부분을 세 단원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단원에 걸쳐 과학 발전의 전개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서양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물리학의 발전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자가 정리하고 있는 대부분의 설명들이 공감되고 잘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만, 일부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발전하게 된 근대과학이 유일교 신앙에서 싹텄다는 설명 같은 부분입니다.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훼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이 발전하는 원동력을 제공한 겁니다. 과학자들이 유대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신을 계승한 기독교를 믿었으니 추상적인 유일신 개념을 똑같습니다.(251쪽)”라는 저자의 주장은 불교 혹은 유교가 중심이 된 아시아나, 여러신을 믿은 인도에서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 혹여 저자가 특정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업생산량이 늘어나 생기는 잉여생산물을 팔기 위한 시장이 중세 유럽에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잉여생산물 유통의 역사는 이미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에 이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거래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에 관한 설명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모형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갑자기 “마치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 주위를 간접적으로 도는 것처럼(270쪽)” 설명한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를 인용하여 천문학의 혁명을 설명하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네이피어 등이 산책을 통하여 문제해결을 했다는 것을 뭔가 넣으면 뭔가 나오는 자판기에 비유하면서 자신도 자판기를 이용해 글을 쓰면서 신기할 따름이라고 비유한 것(276쪽)이 맞는 비유인지도 헷갈립니다.

 

정리해보면 저자는 물리학을 전공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물리학을 대표선수로 하여 근대과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생물학이나 화학 등 다른 과학분야는 다루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신의 뇌과학까지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극히 피상적인 일부만을 다루고 있을 뿐 생명과학 부문 역시 제대로 다루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물리학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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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맨 & 플레이어
조안 해리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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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툼한 두께에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변화에 이르기까지 읽어내는데 집중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이들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몇 차례의 반전 때문에 리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제목에 이야기의 시발점과 사건의 동기가 충분히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젠틀맬 & 플레이어>는 영국과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크리켓경기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 정상급 크리켓 경기에서는 선수들을 ‘젠틀맨’과 ‘플레이어’로 구분했다고 하는데, ‘젠틀맨’은 보수 없이 경기에 참가하는 유한계급의 아마추어 선수를, 플레이어는 보수를 받고 뛰는 직업 선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 담긴 의미처럼 부와 명예와 전통의 상징인 영국의 한 유서 깊은 사립학교를 동경하던 아이가 결국 그 학교를 파멸시키는 일에 도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무대는 영국의 유서 깊은 남자 사립학교인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입니다. 참고로 영국의 중등교육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문법학교와 졸업 후 취직을 목표로 하는 기술학교, 그리고 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하위권학생들을 위한 의무교육을 시행하는 현대학교로 나뉘어 있다가, 1975년 정부의 교육평등정책에 따라 종합학교로 일원화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의 가을학기가 시작하는 9월 6일 월요일부터입니다. 처음 일주일동안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매일 적다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는 일이 많아서인지 주목할 사건을 중심으로 건너뛰기 시작해서 사건이 마무리되는 11월 4일까지 이어집니다.

 

처음 책을 읽어가다가 갑자가 화자를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이 이야기의 화자는 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보면 사건의 전개에 따른 구분은 체스게임의 용어에서 따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서문에 해당하는 폰(Pawn)에 등장하는 ‘나’는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의 수위로 일하게 된 아버지와 함께 사택에서 살고 있으면서 이 학교가 아닌 서니뱅크파크 종합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체스에 사용되는 말 중 하나인 폰(Pawn)은 장기의 졸에 해당하고 양측이 각각 8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폰은 장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약한 말인 것처럼 세인트오즈월드는 언감생심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 킹(King)에 등장하는 ‘나’는 33년째 이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라틴어 교사 로이 스트레이틀리입니다.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만큼 교장을 비롯한 학교 행정가들과는 부딪히는 경우가 많지만, 학생들로부터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학생들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으며 뛰어난 기억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이는 세인트오즈월드의 상징이고 킹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왕과 졸이 대결하게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이야기는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시작합니다만, 아버지를 따라 사택에서 살면서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를 휘젓고 다닌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회상의 형식으로 곳곳에 섞여 들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의 사건들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 어린아이가 장성해서 세인트오즈월드의 신참교사로 부임하게 됐는데, 과연 컴퓨터 교사 미크, 지리 교사 이지, 외국어 교사 미스 데어, 영어 교사 킨, 체육 교사 라이트 등, 다섯 명의 신참교사 가운데 누가 나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화자의 하나인 로이가 킹인 이유, 폰에 해당하는 또 다른 화자인 과거 수위의 아이이자 신참교사가 도대체 어떻게 엮이게 된 것인지는 이야기의 결말부분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만, 일단 폰이 이곳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일들은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소소한 일인데, 그런 일상이 지나가다가도 생각지 못한 대형사고가 일어나고 그 사고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생의 축을 크게 흔들어 놓기 마련입니다. 폰의 어린 시절은 세인트오즈월드 탐험과정에서 우연히 조우한 5학년생 리언과의 관계가 전부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떻게 끝났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폰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만큼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세인트오즈월드로 입성을 꿈꾸게 된 것이고, 이곳을 33년이나 지켜온 로이에게는 전통을 지키는 방어자의 역할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9년 전 일어났던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세인트오즈월드에 복수심을 품고 들어온 폰이 복수를 위하여 살인을 하고, 소문을 조작하여 선생님들을 궁지에 몰아 학생들이 떠나게 하는 등 학교가 공중분해 되기 직전까지 몰아가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도 불사한 폰의 정체와 사건의 결말은 의외의 상황으로 정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완전범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절대로 없다는 믿음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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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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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사전에서 ‘금기(禁忌)’란 민간신앙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적 의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행을 제한하는 관습”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기는 사회적으로 전승되면서 그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려 일종의 속신(俗信)으로 자리 잡았다. 금기가 끈질기게 전승되는 이유는 금기를 범하면 해당 신령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거나 재앙을 받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기란 단어의 용례가 확대되면서 어떤 집단에서 기피하는 말이나 행동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 경우는 그 집단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재앙을 내리는 신령의 역할을 대신하여 금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단이나 금기가 있는 것처럼 학계 역시 금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는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먼저 나서서 금기를 언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에서 방울을 달겠다고 나선 저자 역시 학계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학계의 소식을 다루는 기자입니다. 결국 금기를 공론화하지는 않지만 끼리끼리는 주고받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고, 저자 자신은 단지 이것들을 묶어서 책으로 엮어냈다는 설명입니다. 다른 영역은 차치하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계의 금기는 학계의 ‘구조적인 한계’와 ‘무의식’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학문이 미세하게 쪼개지고 전문화되고 있어 학계 나름대로의 독특한 금기를 모두 수집해서 다룰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총론에 해당하는 몇 가지와 아마 저자에게 친숙한 각론에 해당하는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 학계의 금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승 비판이나 전공불가침의 법칙, 혹은 학문의 주제와 같은 총론적인 문제제기 같은 경우는 쉽지 않은 일이나 생각에 따라서는 옳지 않은 점에 눈을 감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것이며,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공감할 수 있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논문의 형식이나 생태학계의 비생태성과 같은 주제는 각론에 해당하지만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서 공감 여부를 표시하기가 어려워 다만 참고할 따름입니다.

 

문화비평에 ‘문화’와 ‘비평’이 없다는 글에서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분야라서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글쓰기에는 ‘문화비평’만큼 그 정체성이 흙탕물인 분야도 드물다.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모두 문화비평을 쓰고 있다.(71쪽)”라는 글머리에 이어지는 “이 많은 문화 비평가들이 쏟아내는 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비평으로서의 정체성을 전혀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비평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전문성’이 ‘제로’에 가까운 글들이 많으며, 약간의 새로운 시각과 글맛을 내는 에세이들이 대부분이다.(72쪽)” 는 공감하기에 충분합니다. 간혹 새롭다는 느낌이 드는 글을 읽다가도 느닷없이 논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념적 주장을 섞어넣는 바람에 글쓴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논객의 하나라고 하는 분에 대한 날세운 비판도 읽을 수 있습니다. “진중권은 글쓰기를 이원화시키고 있다. 겉으로는 문화 비평과 정치 비평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미학적 글쓰기와 정치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 비평이 문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급진 좌파적 당파성을 띤 상대방에 대한 논리적 공격이 주조를 이룬다. 그는 과연 문화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일까?(74쪽)”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전제한 저자는 대중적 글쓰기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저의 전공분야를 쉽게 풀어 일반에게 소개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낙담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도 “대중적 글쓰기란 어려운 전문 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79쪽)”라는 정의에 따라서 쉬운 우리말을 더 많이 발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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