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는 ‘현애철수(懸崖撤手)‘라는 말이 있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뜻이다. 매달려 있는절벽에서 손을 떼라니? 죽으라는 말인가? 생각해보라. 지금 엄청난 높이의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아 살려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들은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스님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고 심지어 쉽게 납득되지도 않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은 간단히 해소될 수 있다.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없다면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다면, 이미 그 사람은 매달린 절벽의 노예일 뿐이다. 놓으면 죽을 것 같은데도 놓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다. 예를 들어 돌멩이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돌멩이를 잡고 있으면 그는 돌멩이 말고 자신이 잡을 수 있는수많은 것들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자. 돌멩이를 놓는것은 빈손을 유지하겠다는, 혹은 아무것도 잡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멩이를 다시 잡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잡을 수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여행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여정 전체가 시간 단위로 계산되는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다. 비행기 왕복 티켓, 묵을 숙소들,
돌아봐야 할 주요 관광지들, 귀국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선물 목록 등.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의 특징은 여정 중간쯤 되면이미 귀국을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여행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여행할 때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출발할 날을 헤아릴 때 더 설렌다는 점이고, 동시에 여행할 때보다는 집에 도착한 뒤여행을 회상할 때 더 행복하다는 점이다.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 여러모로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에서 김선우 시인이 말한 가출‘과 닮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선우 시인은 가출을 하는 사람은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 라고 말한다. 그러니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은 줄여서 가출자의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가출자의 여행‘은 아이러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은 이미여행지에 가 있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집에 가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마음이 다시 여행지나 여행지 인증 사진에 가 있다.

집이라는 매달린 절벽에손을 떼어낸 자다. 몸이 어디에 있든 마음도 그곳에 있다. 인증 사진을 찍을 일도 없다. 그저 마음과 몸에 담아두면 그만이니까. ‘자유‘란 별것 아니다. 몸이 있으면 마음도 같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몸도 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머문 곳을 몸이 싫어하면 떠날 뿐이고, 지금 머문 곳을 마음이 좋아하면 더 머물 뿐이다.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cynischen Vernunft)』(에코리브르, 2005)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노"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임제(臨濟, ?~867)는 『임제어록(臨濟語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 없이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똥을 제대로 누는 경우, 소변을 제대로 보는 경우, 옷을 제대로 입는 경우, 밥을 제대로 먹는 경우, 피곤할누워 제대로 쉬는 경우, 몸과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면, 이미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부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시원하게 대변과 소변을 보고,
정성스레 옷을 입고, 맛나게 음식을 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사람이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은 대변과 소변을 볼 때 스마트폰을보거나 딴생각을 하고, 바쁘다고 옷을 서둘러 입고, 음식을 먹는 둥마는 둥 하고, 피곤하지만 잡념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몸과마음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러니 항상스스로 몸을 체크해보면 된다.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갈 것이다. 반면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면,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지않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은 가지 않을 것이다.

『임제어록』에서 임제는 삶의 주인이 되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새겨야 하는 여덟 자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바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이를 ‘수(隨)‘, 곳 ‘처(處)‘,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 ‘진(眞)’, 이 여덟 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하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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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에서는 이제 그 누구도 고양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꼈다. "이제 끝날 때도 됐는데."
- 알베르 카뮈, 『페스트』 -

분명히 말하건대 이런 질병들이 번갈아 계속 찾아오는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각각의 질병은 저절로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지른 일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질병들은 우리가 사는 행성에서 진행 중인 두가지 위험이 한 점에서 만난 결과 생겨났다. 첫 번째 위험은 생태학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의학적인 것이다.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재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새로운 상황은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서로 어떻게든 접촉을 피하고 황급히 멀찍이 떨어져야 할 판에 사랑이라니…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백만 명이 넘게사망한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죽지 않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치고 진이빠진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천지 사방에서육체의 온도를 재고 있을 때 나는 영혼의 온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영혼의 온도는 몇 도가 적합할까? 영혼이 섭씨 몇 도일 때 인간은 건강하게 서로 지키고 살리고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

재난은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고그다음에는 잊힌다. 유족들에게만 재난은 충격으로 그치지않고 삶의 이야기, 목소리가 된다.

제임스 우드의 말마따나 문학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도와준다. 그 연쇄작용으로 우리는 삶도 더 잘
‘읽어내게 된다. 우리는 늘 상황을 잘 읽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순간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의미는 얼마뒤에야 따라온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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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초등학생 남자 조카가 둘 있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그 아이들은내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고진짜 내 모습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손주들을 위해 장수풍뎅이를 키우는 아빠.
맛있는 음식을 내 친구 몫까지 만들어 주는 엄마.
늘 옆에서 나를 챙겨주는 언니와 남동생.
‘가족이 있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할 일은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자주 함께 있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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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 선비의 독서법, 연암의 산문미학 정민의 연암독본 2
정민 지음 / 태학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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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이른바 도술이나 문장이란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앞서 아득히천리만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전에는 뻑뻑하여 어렵기만 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여겨진다. 옛날에 천 권, 만 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두 권만 보면너끈하게 된다. 이전에 방법이 어떻고, 요령이 어떻고, 말하던 것이 이른바 방법이니 요령이니 하던 것이 필요 없게 된다.

하지만 깨달음의 방법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잡을 수도없고 묶어둘 수도 없다. 옛날에 성련成連이란 사람은 바다의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 가령 다시 어떤 사람이 성련의일을 부러워해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파도가 일렁이는 물가에 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대개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동안 깊이 생각한 힘으로 된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어쩌다 .
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집으로 가서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도술과 문장을 사모하기보다, 우러러 한 번 생각해 보는것만 못하다.

부지런한 노력이 정밀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정밀함도 소용이 없다. 오성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난날 암중모색하며 헤매던 길을 활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막상 깨달음의 길은 방법도 없고 방향도 없다. 깨달음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어느순간 문득 열린다. 하지만 노력의 뒷받침 없이는 깨달음도 있을수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70쪽쯤 된다고 치자. 그중 정화精華로운것만 추려 낸다면 십수 쪽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것에 저절로 눈이 가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쪽만 따져 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허공을 울며 나는 새를 새‘라는 단어 속에 가두는 순간, 그 새는 더 이상 날갯짓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는 지팡이 위에 조각해놓은 새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문자로 가두어진 지식이란 지팡이위에 새겨진 새의 조각과 같다. 그러니 ‘나는 그런 죽은 새보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우짖는 저 새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읽겠노라고 연암은 말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점은 「소완정기素玩亭記」에서도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라고 하여 거듭 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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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세계는 가없고, 가야 할 길은 끝없다. 갈림길을 만날때마다 다른 한 길을 그저 지나치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궤적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면, 그래도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인연들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지 싶다. 이제 한 시절을 털고 다시 나서는 길에서 어떤 숲과 오솔길을 지나 어떤 뜻하지 않은 인연과 마주하
게 될는지 궁금하다

예전의 책 읽기는 큰 소리로 리듬을 맞춰 되풀이해 읽는 성독聲讀이 기본이었다. 소리 내서 읽는 것을 ‘독서讀書‘라 했고, 그저 눈으로만 읽는 것은 ‘간서看書’로 따로 구분했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어 아예 입에 붙고 귀에 젖도록 읽었다. 어찌 보면 매우 소모적으로 보일 법한 이 같은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독서법이었다.
이 경우 독서는 의미보다 소리로 먼저 왔다. 배움을 처음 시9
작하는 아이들은 뜻도 모른 채 읽기부터 시작했다. 서당에서 배운 글을 집에서 마저 다 외우고, 아침에 서당에 가서는 책을 앞에두고 돌아앉아 외웠다. 이것이 배송背이다. 이렇게 무조건 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가 들어왔다. 한자는 일종의 외국어였으므로 반복해서 읽어 아예 통째로 외우는 방식은 나름대로 효과적인 측면이 있었다.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에 미쳐서 그 풀이와 해석을 살펴 말의 뿌리를 캐고, 그 지엽적 의미까지 모아야 한다. 여기에 더해 『통전通典』이나 『통지通志』, 『통고通考』같은 책에서 ‘조제‘의 예법을 살펴 차례대로 모아 책을 만들면 길이 남을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전에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네가 이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에 대해 완전히 능통한 사람이 되겠지. 비록 큰 학자라 하더라도 조제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너와 다투지 못하게 될 터이니 어찌 큰 즐거움이 아니겠느냐?
주자朱子의 격물 공부도 다만 이 같을 뿐이었다. 오늘 한 가지사물에 대해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캐는 사람도또한 이렇게 시작했다. 격格이란 말은 밑바닥까지 다 캐낸다.
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다 캐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보탬이 없을 것이다.

책은 많은데 읽은 것은 적다. 예전 배운 것은 몸에 익지 않았고, 새로 배운 것은 성글다. 눈이 한번 책 위를 지나기만 하면게으른 마음이 생겨난다.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배움은 점점더 거칠어져서 마침내는 새것과 옛것이 모두 없어지기에 이른다. 이것은 진실로 배움을 시작하는 젊은이의 일반적인 병통이다. 한 글자마다 한 글자의 뜻을 찾아보고, 한 구절마다한 구절의 의미를 따져 본다. 한 단락을 이같이 하고, 한 권을이같이 한다. 많기를 탐내거나 적음을 부끄러워 않는다. 다만정밀함에 힘써 절로 익숙해진 뒤에는, 한 책을 쓰면 나의 소유가 되고, 두 책을 베껴도 나의 소유가 된다. 이처럼 해 나가면열 권, 백 권, 천 권, 만 권의 많음에 이르더라도 나의 소유가아님이 없게 되고, 책과 내가 하나가 된다.

붕우 간에 모여 성인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서로 살펴 돕는것은 후학이 반드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혹 한가롭게 지내며혼자 있을 때는 논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고 의문 나는 것도 몹시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엄한 스승이나 좋은 벗과 맞닥뜨리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지 않아 꺽꺽하여 어느 한 가지도 궁금한 점을 펴지 못하고 만다.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근심이다. 마땅히 일마다 메모를 남겨, 이해하기 힘든 곳에는 그 의문 나는 점을 적어 놓고, 나름대로 얻은 바가 있는 곳은 그 말을 기록해 두어, 혹 훗날 강학의 거리로 삼는다. 혹 서찰로 질문하여 더불어 밝게 살핀다면 깊고 잘 드러나지 않는뜻을 얻는 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으로 집게 모양을 해서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글만 읽고 글쓴이의 마음과 만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독서라 할 수 없다. 사마천의 「자객 열전」이나 「항우 본기를 읽고서그 글 속에 담긴 사마천의 정신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그 문장력에 찬탄만 하는 것은 부뚜막 아래서 숟가락을 주워 놓고 무슨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숟가락 주웠다!"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숨죽여살금살금 다가가 잡았다 싶었는데 막상 나비는 날아가 버린 순간의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그 마음을 읽어야만 사마천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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