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코로나 위기를 맞아, 종교의 차이를 떠나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회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하느님 아래에는 누가 높지도 않고, 누가 낮지도 않다. 존엄의 회복을 위해서는 경제는 이익 추구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정치는 권력을 위해 거짓과 포퓰리즘에 매몰되지않아야 한다. 경제는 사람을 생산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정치는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에 속한 사람들을배제하고, 특정한 집단에게 민심의 진정한 해석자라는 훈장"을 달아주어서는 안 된다. 경제와 정치는 다시 "섬김을통한 사람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교황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떼어놓는 열등한 사음이고방식"이라며,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습관적으로 행하는 못된 짓"이라고 나무란다. 현실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갈등도 피하려는 ‘거짓된평화주의‘는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태도이다.
코로나 이전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란 답이다. 그 근거는? 적어도 나에게 설득력있게 들리는 대답이 없다. 오히려 "이번고통을 변화의 기회로 삼는다면 위기가 지나간 후에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외면하고 숨어버리면, 위기가 지나간 후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라는교황의 결론이 훨씬 더 와닿는다. 언젠가부터 듣기 좋은말을 경계하게 됐지만 교황의 말은 믿고 싶다.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792찬미받으소서 (제1판 11쇄)
재난이 가르쳐 준 첫 번째 교훈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사실이다. 실제로 재난은 연결의 충돌 과정이다. 1989년 미국샌프란시스코 지진부터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크고 작은재난에 대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점이다. 엄청난 변화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생태계 시스템까지도 더 명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 안에 들은 강한 것과 약한 것, 썩어 버린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알아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보수주의자들에게모욕적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개척자들이 가진 ‘각자도생‘ 이라는 환상을 따르기 때문이다.
멈춰진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시 바쁘게 여기저기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적이 흐르는 지금세상의 분위기가 더 지속될 수도 있다. 의약품, 의료 장비와같은 필수 방역품들이 다른 대륙에서 생산되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제때 물건이 도달하지 않는불안정한 공급 체계도 다시 따져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민영화 물결은 인간이 더 이기적이 되고 공동체의식과 사회적 유대감에서 멀어지면서 시작됐다. 다함께 코로나와 맞선 경험이 민영화의 물결도 바꾸길 바란다. 각자가어떻게 이 세상에 속하고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새롭게깨닫게 되면, 기후 위기를 막을 의미 있는 행동이 더 강하게나타날 수 있다.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배웠기 때문이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좌파 성향이며 환경 문제를 의식하는 내친구들은 기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당연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기후 학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은 뻔하다. 과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거나, 큰 정부biggovernment에서 연구 자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후데이터를 조작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간단히 말해서, 증거를 갖고 따지기보다는 개인을 비방한다.
기후 학자 공격을 비판하는 내 친구들은 동료 경제학자들을 공격할 때 위와 비슷한 유형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더욱확장시킨다. 경제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 때문에, 또는 대기업들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이성적인 지인에게기후 과학자 공격과 경제학자 공격의 비슷한 점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지인은 내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은 하겠으나, 이런 지인의 태도를 이중 잣대로 부르는 건 정당하지 않다. 이중 잣대에는 고의적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합리화‘는 타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무의식적인 편견이다.
그렇다고 절망해선 안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첫 번째 간단한 단계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을 접하면,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격분, 환희, 부정 등의 기분을 느낀다면, 판단을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한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될 필요는 없지만, 느낌만큼 생각을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정신을 끊임없이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감정과 당파성에 휩쓸린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많은 거짓 정보를 걸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모두가할 수 있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것뿐이다.
수많은 논조들은 욕망과 동정심, 분노를 끌어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멈춰서 생각해 보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다급함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러니 서두르면 안 된다.
지금의 세계는 끔찍할 정도로 낯설다. 단순히 코로나 19 확산 때문은 아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불안하면서도 해방감을 주는 이 단순한 진실은 쉽게 잊힐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머리방향 세포가 어떻게 방향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는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나침반에 비유한 것은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머리방향 세포는 지구의 자기장이나 기본 방향(동서남북)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대신 랜드마크에 자신을 맞춘다. 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국립미술관이었다면 머리방향 세포의 일부는국립미술관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세포들이 상대적으로 특정 각도에서 활성화하는 것을 보장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전체 ‘나침반‘이신속하게 설정된다(사실상 미술관을 나침반의 ‘북쪽‘으로 삼는다).
싯다르타는 왜 가섭을 깨달은 자, 즉 삶의 주인이라고 판단했을까? 아니 거꾸로 물어보자. 싯다르타가 꽃을 들었을 때 가섭만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섭의 몸과 마음은 오직 꽃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의 몸, 즉 눈은 꽃을 향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싯다르타의 속내를 더듬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속내를 읽으려는 제자들의 눈에 꽃이 들어올 리 없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누군가를 아끼는 사람의 좌우명이 될 만한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 일화가 등장한다. "마음으로는 잊지도 말고[勿忘], 억지로 자라나게 도와주지도 말라[勿助長], 송나라 사람처럼 되지 말라. 어떤 송나라 사람이 벼의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논바닥에 박힌 벼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주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오늘 대단히피곤하구나! 나는 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논에 달려가보니 벼의 싹은 말라죽었다. 세상에는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이가 드물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물망물조장‘은 맹자(孟子, BC 372?~BC 289?)가 그 유명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물망물조장’의방법은 벼를 기르는 농부의 경험과 지혜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물망물조장‘이라는 문장에서 ‘물(勿)‘은 ‘하지 말라‘는 뜻이고, ‘망(忘)’은 ‘잊다‘라는 의미이고, 조장(助長)’은 ‘자라나게 돕는다‘는 뜻이다.그러니까 ‘물망(勿忘)‘이 ‘잊지 말라‘는 요구라면, ‘물조장(勿助長)‘은 ‘자라나게 돕지 말라‘는 요구인 셈이다. 그러니 물망물조장은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뜻이 된다.
이런 참담한 경험으로부터 농부는 이상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생각한 농부는 벼들을 그냥 논에 방치할수도 있다. 조장의 비극을 보았기에 이제 더 이상 조장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바로 이것이 ‘망(忘)‘이다. 벼들이 저절로 자랄 때까지 방임하자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이번 전략도 비극을 낳는다. 벼들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아서 벼들이 잘 자라지 못하거나 시들시들 말라버렸다. ‘망‘의 전략도 사실 들여다보면 ‘조장‘의 전략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이 경우에도 농부는 ‘벼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벼가 원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벼에게 적용했다.그렇지만 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양분을 빼앗아 먹는 잡초를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아끼는 일은 힘든 일이다. 조장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고, 조장하지 않고 완전히 방임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잊지도 말고 조장도 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아끼는 대상을 방치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잘되라고 아끼는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도 말라!‘는 아낌의 좌우명이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여자친구, 내 남자친구, 내 아들, 내 딸,내 반려견, 내 반려묘, 그리고 내 화초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하면 내가 아끼는 것들이 더 근사해지고 더 행복해질까? 바로 이때맹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준다.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 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