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사회가 코로나19 이전의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고 난 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음식물을 많이 낭비하며 환경에 큰 해를 가하게 될지 종종 질문을 받는다. 코로나바이러스 봉쇄령을 통해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직장과 가족, 그리고 내 삶을 위해 꼭 필요했던 일들,이를테면 우리가 수년간 해왔던 운전하고 사람 만나고 물건을 사고 비행기를 타고 쇼핑하고 여행하는 일 등의 대다수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었다. 좋든 싫든, 훨씬 더 좋든 더 나쁘든,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계속해서 익숙해져 있었던 소비의 습관 없이 몇 달을 지내왔고,
대부분은 잘 이겨냈다.

헨리 조지 시대 이후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곡물 생산량과 어획량은 세 배 증가했고 육류 생산량은 네배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태어났지만 식량 생산 또한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설 만큼많아졌으니, 헨리 조지가 믿었던 그대로였다.
오늘날 우리가 확인하는 이 세상의 결핍과 고통은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구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나눌 줄 모르는 인간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헨리 조지의말은 맞았고, 이와 관련해서는 책 뒷부분에서 다시 살펴볼것이다. 많은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는 바람에 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더 복잡한 문제는 인류의 10퍼센트에 의해 이루어지는 엄청난 식량과 연료 소비로 인해 나머지 90퍼센트의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지구의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 세대에 특히 문제가 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대부분의 정치적 논의는 이런 현실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기반으로 삼곤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실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오직 네 가지 자원만 주어져있다. 땅과 바다, 하늘 그리고 우리 서로다.

OECD 36개국이 함께 육류 소비량을 절반으로 줄인다면만일 (북미와 유럽, 이스라엘, 호주, 뉴질랜드, 일본을 포함하는)세계의 식량용 곡물 생산량은 40퍼센트 가까이 늘어날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도 생각해보자. OECD 국가들이 매주하루만 고기 없는 날‘을 정해 지킨다면, 올 한 해 배꿇는사람들을 모두 먹일 수 있는 1억 2,000만 톤의 식량용 곡물이 여분으로 생기게 된다.
우리는 영양실조로 시달리는 8억 명 이상의 인류와이 지구를 나누어 쓰고 있다. 이들은 ‘일상 활동 유지에 필요한 식이 에너지가 최소 수준 이하‘에 해당하는, 다른 말로 굶주리고 있는 아이이고, 여성이고, 남성이다. 누군가는아무 이유 없이 이런 상황에서 살아야 하고 또 이런 상황에서 죽어야 한다. 굶주림은 지구의 공급 능력 때문이 아니라, 생산한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실패로 등장한 문제다. 육류를 생산하느라 지구상의 먹을 수 있는 곡물3분의 1이 사라지는 것을 빼고도 우리는 여전히 75억 인구가 매일 2,900칼로리씩 섭취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을 생산하고 있다. 이는 USDA가 제시한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1인당 에너지 필요량을 공급하고도 남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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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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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아렌트가 강조한 것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다름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범죄 혹은 악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발생했던 것일까요? 아렌트는 바로 이 점에 관해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던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아이히만이 저지른 범죄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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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빅터 - 17년 동안 바보로 살았던 멘사 회장의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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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는 대부분 기존의 것에서 디자인을 살짝 고치거나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하죠. 이른바 지루한 덧칠작업이죠. 그에 반해 천재들은 사물의 결정적인 요소를 바꿉니다. 새로운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죠. 세상에, 줄넘기에서줄을 없앨 생각을 하다니. 정말 친구 분을 빨리 만나 뵙고 싶네요!"

"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느껴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점을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하죠. 하지만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질문을 하죠. 왜? 왜? 왜? 언제 어디서나 질문을 하는사람. 이들이 애프리가 원하는 창조적인 인재들입니다. 바로 빅터 씨처럼요."

그러자 불덩이 같던 남자의 체온은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정신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정신은 정신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은 행동을 지배한다.
표지판을 잘못 본 등산객의 경우처럼 정신은 심지어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에따라 당신의 현실이 결정된다.

"세… 세상의 기준이 오옳… 은 것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가 않네."
테일러 회장은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그리곤 검지를 가슴팍에 대고 줄을 긋듯 수직으로 내려 그었다.
"사람들은 심장이 왼쪽에 있다고 말하네. 그런데 사실 심장은 인체 중앙에 있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쳤을뿐, 일반적인 위치 개념으로는 분명 중앙이야. 하지만으레 심장은 왼쪽에 있다고 알아왔던 탓에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일세. 학창시절에 심장이 가운데 그려진인체해부도를 수없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보다 잘못된 상식을 더 믿는 거지."

17년 전 빅터를 저능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널드 선생의 눈에는 빅터의 IQ 평가표에 적힌 173 이란숫자가 73으로 보였다. 그게 사건의 전부였다. 단지 누락된 한 자리 숫자로 인해 빅터는 17년 동안 바보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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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대신 좌파라고 불러 주지만, 좌파라는 완곡 어법은 여전히, 곧바로 ‘공산당 일당 독재·생산수단의 공동소유·평등한 분배’를 의미하는 스탈린주의를 뜻하고, 나아가 김일성·김정일 세습 왕가의 추종 세력임을 증명해 주는 불도장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보론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상」을 쓰면서, 좌파란 "시대 해방적이며 발전적인 경향을 주장하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그는 20세기 말에 무너졌던 교조적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미 좌파라는 세례를 베푼다.

중국이 조선을,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는 뜻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일컬었듯, 조선은 재상 우위의 국가, 요즘으로 말하자면 내각책임제 국가였다. 조선은 그 정치 구조상 임금이 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고 해도 사대부들이 따라 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효종이 추진한 군비 확장 정책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문신들의 강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문신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어떤 교훈을 얻기에는 이미 정치 구조가 고질적인 문치주의로 고착된 것이다. 군약신강과 문치주의!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우리나라 현대사를 비극으로 만든 계몽 군주에 대한 갈구가 아니었을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국가 형성기에는 강력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국가주의 신화를 이승만·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통해 해갈하려고 했던 절박한 사정에는, 군약신강과 문치주의에 대한 한국민의 오래된 불신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위의 인용문은, 몇 년 전부터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대할 수 있었던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시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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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 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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