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은 자신의 일과와 규칙을 스스로 정했고,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또한 밤을 새우든 하루 종일 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원한다면 이성 친구를 집에 재울 수도 있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을 먹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했고, 음식을 삼키는 데 문제가 있는 데다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유동식만 먹으라는 의사의 조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한다면 피자나초콜릿을 먹을 수 있었다. 한편 정신이 흐려져서 더 이상 이성적인결정을 하지 못할 시점에 이르면, 가족 혹은 미리 지정해 놓은 대리인이 나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 요인과 선택의 범주를 다시의할 수 있었다. 어시스티드 리빙 이라고 알려진 윌슨의 개념은 아무도 보호시설에 감금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있었다.
윌슨이 실행한 프로그램의 핵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늙고 쇠약해져서 더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에도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죽음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었는지를 깨달을 만큼 몸이 회복되고 나니, 내게 중요한 게 무언지를 보는 눈이 굉장히 달라졌어요.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게라심은 이 모든 일을 마음 편히, 자진해서, 꾸밈없이, 유쾌하게 해냈다. 그게 이반 일리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의 건강하고, 힘 있고, 생기 넘치는 모습을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게라심의 힘과생기만큼은 그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위안이 됐다.
시간도 덜 걸리고요. 서로 마음 상할 일도 적어지지요." 그래서 노인들의 신체 능력 유지를 우선시하지 않을 경우, 직원들은 노인들이마치 헝겊 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옷을 입히고 만다. 그리고 점차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해야 할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이 되면 그러한 자율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문화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습관과 기대를 모두 합친 거예요." 그가 보기에는 바로 그 습관과 기대가 좋은 삶을 향유하게 하기보다 요양원의 틀에 박힌 일상과 안전을 우선시하도록 만든 것이었고, 거주민들과 함께 지낼 개 한 마리를 들이는 일조차 어렵게 만든 것이었다. 그는 동물, 식물, 어린아이들을 요양원 주민들이 영위하는 삶의 일부가 될 만큼 충분히 많이 들이고 싶었다. 잘 돌아가던요양원 직원들의 일과에 변화와 혼란이 초래되는 건 피할 수 없는일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일부 아니었던가?
"문화는 엄청난 관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바로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죠. 문화는 그 지속성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문화에는 혁신의 싹을 질식시키는 힘이 있어요." ..
크리드는 데이브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았다. "데이브, 이 정도 통증을 약 없이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가말했다. "지는 게 아니에요. 아름다운 아내와 딸이 있는데 통증이너무 심하면 그들과 지내는 시간을 즐길 수가 없잖아요."
"내 생각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 뭔가 본질적인 품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게 유행이 된 듯하다." 그는 1985년 논문에서 이렇게쓰고 있다. "물론 나는 전도서의 설교자들이 말한 것처럼 사랑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내 삶의 실타래가다하면 조용히 나만의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죽음을 궁극의 적으로 여기는 용감한 관점을 더 선호한다. 빛이 꺼져 가는 상황에 맞서 맹렬히 싸우는 사람들을 나무랄 만한 점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말기 질환 환자를 만날 때마다 굴드와 그의 글을 생각하곤한다.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항상 긴 꼬리를 그리며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는 법이다. 그 가능성을 찾으려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다만 동시에 그보다 훨씬 확률이높은 결과에 대해서도 준비해야만 한다. 문제는 현대 의학 시스템과문화가 그 긴 꼬리를 위해서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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