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언젠가는 꽃이 지겠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사실 우리가 오늘 죽을 리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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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아픔과 절망을 바꿀 수 있는 내일이 있다면 인간은 그아픔과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마치 기록적 폭염을 맞고 있다고 해도 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과 함께 청명한 가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봄은 어김없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시간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은 ‘바라봄visio‘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통도, 사회의 아픔과 괴로움도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기가 모든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국적, 성별, 나이, 종교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분명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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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볼 때 어떤 공동체를 판단하기 위한 기초적인 기준은 제가 축성생활자들과의 만남에서 언급했던 "세 개의 "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가난poverta의 P, 기도preghiera의P, 인내parienza의 P입니다.

기도로 말하자면, 기도는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잘하지 못하면 나아갈 수가 없어요. 기도할 줄 아는 것, 기도하기를배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축성생활에는 진지한 기도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공동기도, 전례 등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축성생활자 각자의 기도도 필요해요. 기도를 잘한다는것은 하느님 앞에 잘 자리한다는 것, 그분을 흠숭한다는 것,

저는 사제들에게 항상 사람들의 한계를 억지로 밀어붙이지않도록 부탁합니다. 누가 고해성사를 보러 오면 원하는 대로고백하도록 두는 거예요.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가 지닌 상처의 한계를 자신의 판단으로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그가 받아들일만한 조언을 주고요. 그에게 맞는 정도로요. 단 하나라도 적절한 조언을 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올 수 있게 항상 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요. 그가 이렇게 말하게 하세요. "이 신부님은 참 대단하구나! 나는다시 이분에게 와야겠다."

세속성은 기준의 문제이지요. 행동의 기준, 삶의 기준, 관상의 기준에 대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속하기보다는 세상에 더속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세속성은 선善으로 가장합니다. 하지만주의하세요!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드 뤼박은 이 영적 세속성을 철저히인간중심적 태도라고 말합니다. 다른 세속성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님의 영광을 찾는 대신 인간적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가난의 이념화化(이데올로기화)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종종 가난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고 많이 살지는 않는 사실을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이론화하지만 우리의 기준들과 행동은 진정으로 가난을 동반하지 않아요. 삶에서 가난을 살아내야 합니다. 기쁨으로 살아가야 해요. 가난은 기쁨으로 살고 축제로 살아가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축제를 벌이는 능력이 인상적이에요. 가장 힘든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지 않지요. 이것이 저를 감동시킵니다. 저는 우리가 가난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삶에서 행운을 덜 누리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염려하면서요. 가난은 실제로 형제들을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임무를 떠맡는 것을, 섬기는 것을의미합니다. 인위적으로 필요한 것들 없이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고, 또 정의가 결핍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아니 생존하는 수많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면서요.

축성생활이 걸어가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걸어가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이에요. 만약 걸어가면, 그러나 완덕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곧 흠 없이‘가 아닌 상태로 걸어가면 그때도 역시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여러 선택을 할 것입니다. 이 선택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걷는 것,
그분의 약속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두면서 그분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의 모든 선택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를 행하면서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가기, 항상 걸어가기예요.

제 생각에 이 점을 우리는 그 동안 상당히 소홀히 해왔습니다. 축성생활의 이 종말론적 차원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마치…처럼‘ ‘이미, 그러나 아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평으로삼아 살아가야 하는 게 바로 이 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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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식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가식별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냐, 그렇게는 난 싸울 수 없어. 그렇게 싸우다간 난 지고 말아. 내게 입혀진 이 모든 것을벗어버려야 해. 나에게 고유한 것을 가지고 싸우러 갈 거야."
다윗처럼, 축성된 사람 각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난 나에게 고유한 것을 가지고 삶과 일을 대면해야지." 나에게 고유한것은 무엇일까요? 내 존재입니다. 인격체, 세례를 받은 이, 이름과 성씨姓氏를 가진 이, 이 수도회의 회원, 이 가족의 구성원…. 이것이 나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둘러 씌워진구조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 형성된 관습 혹은 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수많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고유한

축성의 기쁨을 살아가세요. 축성의 기쁜 증언이 되세요. 젊은이들은 그것을 보고 뛰어듭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소명의 힘입니다. 그들이 권태에 빠진 사람들을,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사람들을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 가지 않아요. 입회하지않는다고요.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쁨에 찬 축성의증언입니다.

어떤 조건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여기서 제가한 가지 표현을 지어내겠는데) 축성생활이 지닌 예언적 드러남에달려 있어요. 축성생활이 보여주는 힘, 곧 이 길로 주님을 따르고 싶은 어떤 젊은 사람의 마음에 가 닿는 그 힘에 달려 있다는의미입니다. 항상 기쁨으로 드러나는 소명의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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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틀림없이 그저 인간적기준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종류의 범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범주는 사목적 효율성이나 다른 형태일 수 있지요. 그것들은 어쩌면 좋은 범주들이지요. 나쁜 것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적 기준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축성생활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철저히 살기라는 근본 개념에 응답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어떤 변두리에서 - 비록 도심지라 해도 - 임무에 종사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사제들, 수녀들, 수사들을 말합니다. 자랑하지도 않고 떠들어대지도 않는 그 축성생활자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일하는 그 축성생활자들 말이에요. 축성생활을 살아가면서, 축성생활을 기도하면서, 축성생활신학을 하는사람들이지요. 일종의 본질적 겸손을 지닌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는 84세의 수녀님을.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수녀님은 자기는 저쪽 콩고에 있는병원에서 일하는 산파産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3천 번 이상 출산을 도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은 60년 이상 선교지에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태어날때는 난산이었는데 엄마는 죽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 아이를입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들었대요." 하고 수녀님이 말했어요. 저는 충격을 받았지요.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는 84세의 수녀라니…. "그래서 저는 이 아이를 입양했지요. 그때부터 아이는 저를 엄마라고 부른답니다." 입양한 아기를 데리고 카누를 타고 장을 보러 가며 수녀로서의 삶을, 자신의 축성을 대단히 감동적인 신선함으로 살아가는 노인 수녀님, 그여성 안에 집약되어 있는 그 큰 다정한 사랑을 볼 때 저는 그모든 것 뒤에 있는 소명의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는 세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곧 ‘느리고 풍요롭고 무질서한‘이 그것입니다. 물론 공의회와 함께 어떤 식으론가 문들이 열렸지요. 그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와 발을 맞춰서 걸어가지 못하고 광범위하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세상과 더 많은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것에 문을 열어야 했었어요.

이데올로기가 인도할 때 참으로 저는 염려됩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치 않아요. 그건 항상 끝이 좋지않습니다.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저는 신영지주의에 대해 말했습니다.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말했지요.
아니, 신펠라지우스주의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지나치게 펠라지우스적인 단면을 가지고 태어나는 몇몇 신생 축성생활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규범을 이행하는 데 모든 완덕을 두는 것으로 보이는 회들입니다. 축구를 하고 노는 대신 성규聖規Santa Regola를 준수하기 위해 이상한 일들을 하고 다른 것들은 죄가 된다는 말을 듣는 그 소년은 불쌍하기도 하지요! 젊은남녀 수도자는 단지 경직된 규칙을 준수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것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소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규범들을준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피상적인 것들을준수하는 데서 보이는 이 경직성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이단적인 펠라지우스주의예요. 참된 사랑은 결코경직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몇몇 신생 수도회에서 일어

기능성은 사도적 삶, 섬김의 삶이 당하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주요한 유혹들 중 하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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