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볼 때 어떤 공동체를 판단하기 위한 기초적인 기준은 제가 축성생활자들과의 만남에서 언급했던 "세 개의 "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가난poverta의 P, 기도preghiera의P, 인내parienza의 P입니다.

기도로 말하자면, 기도는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잘하지 못하면 나아갈 수가 없어요. 기도할 줄 아는 것, 기도하기를배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축성생활에는 진지한 기도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공동기도, 전례 등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축성생활자 각자의 기도도 필요해요. 기도를 잘한다는것은 하느님 앞에 잘 자리한다는 것, 그분을 흠숭한다는 것,

저는 사제들에게 항상 사람들의 한계를 억지로 밀어붙이지않도록 부탁합니다. 누가 고해성사를 보러 오면 원하는 대로고백하도록 두는 거예요.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가 지닌 상처의 한계를 자신의 판단으로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그가 받아들일만한 조언을 주고요. 그에게 맞는 정도로요. 단 하나라도 적절한 조언을 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올 수 있게 항상 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요. 그가 이렇게 말하게 하세요. "이 신부님은 참 대단하구나! 나는다시 이분에게 와야겠다."

세속성은 기준의 문제이지요. 행동의 기준, 삶의 기준, 관상의 기준에 대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속하기보다는 세상에 더속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세속성은 선善으로 가장합니다. 하지만주의하세요!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드 뤼박은 이 영적 세속성을 철저히인간중심적 태도라고 말합니다. 다른 세속성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님의 영광을 찾는 대신 인간적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가난의 이념화化(이데올로기화)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종종 가난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고 많이 살지는 않는 사실을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이론화하지만 우리의 기준들과 행동은 진정으로 가난을 동반하지 않아요. 삶에서 가난을 살아내야 합니다. 기쁨으로 살아가야 해요. 가난은 기쁨으로 살고 축제로 살아가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축제를 벌이는 능력이 인상적이에요. 가장 힘든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지 않지요. 이것이 저를 감동시킵니다. 저는 우리가 가난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삶에서 행운을 덜 누리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염려하면서요. 가난은 실제로 형제들을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임무를 떠맡는 것을, 섬기는 것을의미합니다. 인위적으로 필요한 것들 없이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고, 또 정의가 결핍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아니 생존하는 수많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면서요.

축성생활이 걸어가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걸어가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이에요. 만약 걸어가면, 그러나 완덕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곧 흠 없이‘가 아닌 상태로 걸어가면 그때도 역시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여러 선택을 할 것입니다. 이 선택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걷는 것,
그분의 약속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두면서 그분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의 모든 선택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를 행하면서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가기, 항상 걸어가기예요.

제 생각에 이 점을 우리는 그 동안 상당히 소홀히 해왔습니다. 축성생활의 이 종말론적 차원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마치…처럼‘ ‘이미, 그러나 아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평으로삼아 살아가야 하는 게 바로 이 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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