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희망 -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자서전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지음, 이재협 외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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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바라보신 순간, 그 자비로운 눈길 속에 이미 선택이 담겨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훗날 저는 이 말씀을 주교 모토로, 이어 교황 모토로 삼았습니다.
저는 이를 장인이 정성껏 작품을 빚어내듯, 할아버지 프란치스코가 목공소에서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드시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를 자비로 빚어 가셨다."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라틴어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저를 장인처럼 빚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알라딘 eBook <희망>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지음, 이재협 외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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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인공지능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뇌 위에 인공지능 층layer을 만들고 자연적인 두뇌와 인공두뇌를 연결하는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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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인공지능처럼 두는가.‘ 이것이 프로기사들의 실력을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2010년대 후반 바둑계에서는 ‘AI 일치율‘
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어떤 인간 기사가 인공지능이 추천한 수대로 돌을 둘 확률을 가리키는 말이다. ‘AI 일치율이 높다‘라는 말은곧 그 기사가 강하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AI 수법이 그냥 너무 바둑계에 스며들어서, 사실 이미다 당연하게 그냥 두고 있어서 그런 고찰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 그런 고민 하지 않아요. 그냥 ‘더 공부해야지, 더 나아져야지‘ 다 지금 그렇게가고 있어요. AI에 대해서는 그냥 그 존재를 인정했고, 얼마만큼내가 AI를 따라 둬서 수준이 높아질 것인가 하는 생각이죠. 다들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차피 경쟁은 사람이랑 하니까요. 그냥 ‘내가 AI를 더 습득해서, 더 발전해서 저 사람을 이겨야되겠다‘ 뭐 이런 식이죠. AI에 대해서는 그 엄청난 경지를 봤기 때문에 그거는 그냥 받아들였고요."

서울에서 40년간 제비들이 쫓겨나고 비둘기가 번성한 이유는제비들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다. 비둘기들이 현명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서,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거대한 환경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일으킨 인간도딱히 제비를 혐오하거나 비둘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이 그저 우연히도 제비에게는 불리했고 비둘기에게는 유리했다.
‘AI-환경‘도 그러할 것이다.

조훈현 9단은 자서전에서 ‘류‘를 이렇게 설명했다.
바둑에는 ‘류‘라는 것이 있다. 기사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 바둑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윌리엄 어니스트헨리의 시 「인빅투스」 마지막 구절을 조금 변형해 책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선장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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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말 이세돌 9단이 프로바둑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뉴스프로그램에서 은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는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사실 이게 예술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일종의 게임이 된거 같다. 그런 점이 굉장히 아쉽다."3TV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바둑은 예술과 같은 것으로 배웠다. 바둑은 둘이만드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인공지능과의 대결이)무슨 작품이 되겠나. 제가 배웠던 예술 그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더 이상은 하기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대상을 분류해요. 그렇게 범주화하면서 약간 오류가 있어도 무시하고 데이터를 카테고리로 관리하죠.
그렇게 관리를 하니까 고정관념이 생겨요. 그런 고정관념들이 일을 빨리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요소들은 배제하게 돼요. 어쩔 수 없죠. 머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유한하니까. 그런데인공지능은 그렇지 않죠.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합니다. 인공지능이그렇게 해서 둔 수를 보고 ‘진짜 좋은 수인데‘ 하고 감탄하면서 분석해 보면 그게 가장 기본에 충실한 수인 거예요. 바둑뿐 아니라우리가 쓰는 언어 자체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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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계절 변화를 감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싹튼 꽃,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 모퉁이를 돌았을 때 뺨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차 같은 것으로 사계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해 두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과학 실험도똑같습니다.

그러니 의미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술술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음독音讀, 즉 소리내어 읽기를 감당할 수 있게 써야 합니다. 쉬엄쉬엄 중간에 한숨 돌리며 읽어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글이나 리듬이 나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파열음이 많은문장은 음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음독할 수 있는 문장은 독자의 머리(뇌)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갑니다. 몸으로 스며들어 독자의 신체 일부가 됩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글이 이미 독자의 몸의한 부분이 된 시점에 독자는 무심코 과거에 읽었던 책의한 구절을 입에 담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심코‘입니다. 몸 깊숙한 곳에서 그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저의 뇌 안에 존재하는, 한없이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는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있던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작은 조각들은거기 처음 저장되었을 때부터 제게 쭉 "빨리 설명해 봐" 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몇십 년째 그러고 있는 조각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제가 가진 이해의 틀에는 아무래도 수납할 수 없었던 ‘반증 사례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예컨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아! 이게 그건가?!" 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 때가 찾아옵니다. 몇십 년이나 제대로씹어 삼킬 수 없어서 목구멍에 걸려 있던 작은 가시를 쏙하고 씹어 삼킬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죠. 바로 이 "이게 그거잖아"의 납득 방식을 저는 매우 좋아합니다.

이때 ‘이것‘과 ‘그것‘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좋습니다. 철학 명제와 문학의 한 구절이 일치한다거나 최근 정치 이론의 한문장이 노가쿠‘의 문구와 똑같다거나 종교의 계율과 구기운동 규칙에서 정하는 금기가 같은 것을 발견한 순간 "아! 이게 그걸 말하는 거구나 하며 느끼는 상쾌함은 글로 담아 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쩌면 자기가 이전에 입에 한번 담았던 말에 주저앉는 것이나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성숙해진다는 것은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루는 일입니다. 쇄신, 즉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려면 이전까지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사념과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을 품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새로운 사념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휘꾸러미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를 손수 찾으면서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연히 확실하고

"士別三日, 即更利目相待"(사별삼일, 즉갱괄목상대)라는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모름지기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성숙관‘입니다. 사흘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진정한 자기‘ 같은것에 주저앉고 매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배운다‘는 식의 화법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배움이 정말로 일어나면 ‘나‘라는 주어는 더 이상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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