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지치고, 상처 받고, 초조하고, 곤혹스러워서 내면 깊숙이 피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수치스럽고 치욕이 될지라도 그것을 부정, 회피, 억압하는 것은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거기서 벗어나고 치유하는 첫 단계다....오직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각하는 사람만이 남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관대해지는 법이다.
누구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 없이 떠나야 한다. 아무런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죽음의 의미를 명상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죽음의전당을 만들었다. 영묘 위에 나타나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로마 시민들을위로했다는 천사도 사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빛나는 것과 빛에는 분명 그 차이가 있다네, 빛은 확실한 그 자체의 근원을 가지지만, 빛나는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빌리고 나서야 빛날 수 있다네.
가능한 한 자네 자신 속에 침잠해야 하네. 누군가를 사귄다면 자네를 좀 더 나아지게 해주는 사람들을, 집에 초대한다면 자네가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르게. (…) 실제로 자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 "그렇다면 누구를 목표로 나는 이제까지 공부해왔단 말인가?"이렇게 자네는 묻겠지. 헛되이 노력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자네는 스스로를 위해 공부한 것이니까.
즐겁게 살아간다는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어느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이 즐거움을 추구할때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인류의 역사가 마약들과 함께 했지만,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을수 있었던 건 지혜 때문이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과 다르다. 지혜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라는 것에 사유, 성찰 그리고 자기의 절제가 더해져야만 지혜는 생겨난다.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삶일까? 오늘도 나는 그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