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기다리며
시몬 베유 지음, 이창실 옮김 / 복있는사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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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시몬 베유는 내게 영혼의 채무였다. 살갗이 벗겨진것처럼 세상의 아픔과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정잡이로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이 살과 영혼 속에 각인되어 자신을 노예라 여기는 사람, 불행으로 인해사물화된 사람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해 인간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사람, 가장 깊은 신의 사랑이라는 본질에 당도하기위해 자기를 몰아대면서도 결코 섣부른 위안으로 도피하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으나 더 큰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 종교의 틀 속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사람, 세상의 혼돈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 시몬베유는 그런 사람이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던 겨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던 시기에 베유의 급우인 시몬페트르망이 쓴 『불꽃의 여자, 시몬 베유』를 통해 그녀를 만났다. 자주 새벽을 넘겨 책을 읽던 그 겨울에 베유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만났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는 한 소년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고통, 신의 사랑, 은총의 현존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그 겨울을 보내고, 인생이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주의력과 기다림으로 신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자기중심주의와 불의함과 감정의열광에서 자유로워져,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타인과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인간이 자신을 잊고 신을 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앙을 갖지 않은 나에게 이 책은 신앙에 대한 지극히 성스러운 답변으로 읽힌다. 눈을 가리는 감정을 걷어 내고 홀로 존재할 것. 선을 위해 자신을 내맡길 것. 삶의 고통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것. 겸손한 마음으로 완전한 주의를 기울일 것. 시몬 베유는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이 모든 결단을 스스로 고민하는 지성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가운데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기 때문일까. 집단적 경험을 경계하면서도 초월적인 신의섭리에 따르고자 했던 베유의 치열한 고민과 경건한 마음이 느껴진다.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가장 성스러운 삶을 살았던한 인간, 수많은 ‘주의‘ 속에서 신을 소명으로 삼았던 한 인간의 기록을 읽는 동안 독자는 순수한 단독자로 돌아갈 것이다.

1) 기다림. 가장 소중한 선은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이아니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힘
으로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순간 우리는 가짜 선을 찾게 된다.

2) 주의력. ‘주의를 기울임‘은 가장 고차원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의지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에자신을 여는 행위다. 즉 타자에게 열린 상태가 되는 것인데, 그때 영혼은 자신을 비워내고 그 타자를 있는 그대로받아들인다. 불행한 자가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건 바로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통받는 자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기적이다.

3) 고통과 불행.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죄는 고통이고덕은 번영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지상의 아버지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다. 즉 가짜 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을 위한 종교이며, 노예들은 그 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수 없다. 악과 불행 (다시 말해 중력)은 역설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신은 자신이 힘을 미칠 수있는 그 어디에서도 명령하지 않기로 하신 것이다

4) 악. 신께서 육화를 통해 희생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십자가를 통해 노예의 조건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창조는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악을 증거로 내세우며 이 삶이 가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악과 인간이 당하는고통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의 삶 역시 하나의 오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하느님이라 고백한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직접겪으셨다는 사실은, 이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베유에게 진리는 현실과의 접촉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 우리가그 모든 가공할 일들까지 포함해 그 현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가상의 무언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분명하다는 것. 그녀는 종교를 마음의 위안이나 미래에있을 보상으로 삼는 것을 신성모독적인 자기기만이라고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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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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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정보는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재현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는 항상 연결한다. 이것이 정보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정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사할 때 우리는 ‘현실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물어야 할 때도 있지만, 대개 더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을 얼마나 잘 연결하는가? 어떤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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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다른 누군가가 있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모두 우리의 의식적인 통제를받지 않는다. 사실 이편이 더 낫다. 의식이 모든 걸 자기 공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뇌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때에는 옆으로 물러나 있는 편이 최선일 때가 대부분이다. 의식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세한 부분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피아노 건반에서손가락을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곡을 잘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의 중심에 있지 않다.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속삭임을 먼 가장자리에서 듣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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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논리로, 똑같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책임을 안고 있는 독일을 설명해볼까요? 독일인들은 자신이 전쟁에서 저지른 범죄를 절대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열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기까지 하지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끔찍한 시설들도 잘 보존하려 노력하는데,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독일인을 잔혹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은 자는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죽은자와의 관계가 변했다면, 이는 살아 있는 이들의 태도와 삶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독일은 자신들 때문에 희생된 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냅니다. 그러곤 자신의 잘못을 거듭해서빌며 용서를 구하지요. 이는 독일이 나치 시절의 혐오와 광기에서 벗어나, 평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문명국가로 거듭났음을

물론 토인비는 특정 종교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삶과 태도를 강조했을 뿐이지요. 파테이 마토스PatheiMachos는 그리스어로 고통에서 배운다는 뜻으로, 이는 토인비가 고등종교의 본질로 꼽는 가르침입니다. 이유 없이 오래가는 것은 없습니다. 고등종교들이 오랫동안 인류의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아픔을 보듬고 나아갈 길을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널리 퍼진 고등종교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위대한 종교들끼리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더 많습니다. 토인비는 "자연에 대한 지배를 1마일 나아가게하는 것보다 자신과 이웃, 신과의 관계를 가꾸는 능력을 1인치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탐욕으로는 빈곤한 정신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우리 문명의 위기를 구해낼 위대한 정신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토인비의 혜안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먼저 헤겔은 역사란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문명사회가 한 사람만 자유로운 상황에서 몇몇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으로, 마침내 모두가 자유로운 시대로 나아간다는 뜻이지요. 실제 역사도 헤겔의 주장과 비슷하게 펼쳐졌습니다. 예컨대, 서양 문명은 왕만 자유로웠던 고대 왕국들에서 소수의 남자만 자유인이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으로, 나아가 모든 시민이 자유로운 근대국가로 발전해나갔습니다.

자유의 확대는 결코 조용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언제나 사회에는 지배하는 자들과 억압받는 이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지곤 했습니다. 이들의 싸움을 설명하는 공식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를 떠받들며 대접해주길 바라지요. 문제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생각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을 더 중요하고 가

이처럼 사상가들 가운데는 자신의 주장과 사뭇 다른 삶을 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위선자‘라며 손가락질하지요.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누델만 Francois Noudelmann (1958~)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과 생활이 딴판인 사람들을 섣불리 도덕의잣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충고하지요. ‘철학자의 거짓말‘은윤리적이지는 못해도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물을 낳기때문이라는데요,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누델만에 따르면 루소는 아이 다섯을 버렸음에도 「에밀」같은 교육론을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 다섯을버렸기 때문에 『에밀』이라는 교육론을 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스탕스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의에 맞서 저항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레지스탕스 활동을 안 했기에 적극적으로 사회참여와 저항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누델만의 이런 주장은 황당한 궤변처럼 다가오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꽤 일리가 있습니다

누델만의 해석에 따르면, 콤플렉스와 치부는 사상의 발전과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실 우리 또한 루소나사르트르처럼 처신하고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는 가난하다며 무시당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열심히 돈을 벌고, 거짓말을 해서 비난받았던 상처 탓에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려애쓰는 이들이 얼마나 많나요? 물론, 누델만은 결코 루소나사르트르가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지는않습니다. 다만, 거짓을 넘어서 자신을 정당화해가는 가운데 피어났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해주라고 충고할 뿐입니다.

사실, 아이 다섯을 버렸다고 솔직하게 세상에 알린 사람은 루소 자신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역시 자신은 레지스탕스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요.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려 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과거행동을 정당화하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뿐입니다. 누델만은 이를 ‘진실한 거짓말하기men-tri-vrai‘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허물과 그릇된 처신을 아름답게 재해석해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지요.

분노에 가득 차 경쟁자를 노려보게 되는 순간, ‘예수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라고 나 자신에게 되물으며 태도를 다듬으라는 것이지요. 옛 선비들은 끊임없이 공자의 삶을 자신의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공자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를 곱씹으며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다잡곤 했습니다. 불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석가모니부처라면 이럴 때 어떻게 처신했을까?‘라는 물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우리 삶과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로남불‘ 논리가 판을 치는 요즘입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앞서, 내 욕망 역시 비난하려는 상대의 것과 똑같지 않은지부터 점검해보세요. 탁월한 욕망을 꿈꾸지 않는한, 우리 삶과 세상에 구원은 없다는 르네 지라르의 주장에귀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아들러는 말썽꾸러기 사내아이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아주 심심했구나. 그래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단다"라며 부드럽게 타일렀을까요? 그는 그러지 않고 되레 아이를 크게칭찬했습니다. "장난감을 정말 잘 늘어놓았구나. 대단해! 아주 멋져! 그렇다면 이제 장난감을 모아서 원래 자리에 놓을수도있니?" 그러자 아이는 신이 나서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혼나지 않았고, 누구도 화내지 않았으며 집 안도 말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책 아들러의 추억Alfred Adler: As We RememberHim」에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아들러 심리학의 고갱이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원인 말고 목적을 바라보라"라고 충고했지요. 왜 아이가 집안을 어지럽혔는지에만집중하면 아이가 뭘 잘못했는지 따지느라 화가 치솟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거실을 다시 깨끗하게 정돈할까?‘라는 목적에 집중하면 일을 대하는 방식이 건설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지만 낯선 이와 관계를 꾸리는 일은 어렵기만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윌 버킹엄 Will Buckingham (1971~)에 따르면이방인에 대한 두려움, 즉 ‘제노포비아xenophobia‘와 낯선 이에게 마음이 끌리는 ‘필로제니아 philoxenia‘는 인간 본성의 두측면입니다. 새로운 사람과 함께할 때를 떠올려보세요.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독특한 캐릭터일지 몰라 경계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일지는 않았나요?

환대의 순환고리에서 일대일 교환은 금기에 가깝습니다. 내가 만 원어치 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상대에게 곧바로만 원을 건넨다면 어떨까요? 이는 당신과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질 터입니다. 환대의 기본은 비대칭입니다. 받은 양과 상대에게 주는 양이 계산적으로 딱 맞게 떨어지지 않아야 해요. 나아가 주고받음이 거래로 느껴지지 않게끔 시차를 두고 천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관계를 가꾸는 데는 이렇듯 섬세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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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진 그날부터 ‘나는 구원되었다!‘라며 안심하고지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작가 시이나 린조는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고 제일 좋았던 것은 죽을 때 ‘고통스럽다.‘라든가, ‘죽고 싶지 않다.‘라고 보기 싫게 소리치며 죽어갈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을 때, ‘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마음 편하게 죽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나름대로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아.‘라고 하면서 죽어 가는 것 또한 신앙이다. 그 점을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인간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 약점이나 비애를 드러내 보일 마음을 지닌 것 역시 신앙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앙인이라고 하면, 세례받는 그날부터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방황하고 똑같이 괴로워합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제 방황과 괴로움을 기억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신자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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