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엄격한 채식인이지만 아내를 구타하는 자보다는 육식을 하지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낫다는 간디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엄격한 채식인(이제 막 열광적인 채식인이 된 사람이다)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를 식사에 초대하면 아내와 딸을 심하게 무시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하고는혼자서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이 고약한 강성론자는 먹는 법을 제대로 배웠는지는 몰라도, 사는 법은 아직 배울 게 많았다.
‘나아진다는 것‘은 ‘남들보다 나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예전의나보다 나아졌다‘는 뜻이다. 말로 모건Marlo Morgan 의 소설 <무탄트메시지>에서는 호주 원주민 참사랑 부족과의 대화가 나온다. 소설 속의 부족들은 나이 먹는 것을 축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나아지는 것을 축하했다.
내가 물었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역사의 몇 안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찾아온 손님들은 좁다, 방음이 안 된다, 날파리가 있다,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온다 등등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하는 경험도 필요하다. 모든 것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산다면 어디 있든 굶어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층에 묵은 사람들은 방문도 안 닫고 잔다. 편하고 걱정 없는 사람들이 이 숙소에 오겠지. 나도 더불어 맘이편했다.
나는 사람들이 비건이든 자연식물식이든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이든, 스스로 납득이 가고 그렇게 실천하고 싶을 때를 기다려 자연스럽게 변했으면 한다. 누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남들은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억지로 스트레스와 강박과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을 느껴서 강압적으로 하는 것은 오래 못 간다.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자발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그때서야 생활습관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는 이제 플라스틱 생수를 판매하지 않아서 모두 개인 텀블러를 지참해야 한다고 한다. 좋은 소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연식물식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까지 관뒀으니 음식을 바꾸고 퇴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음식을 바꾼 이후로 모든 선택들이 여러 결과를 만들어서 여기까지 왔다. 내가 아닌 남을 돕는 삶, 그러다 보면 결국 나 자신도 돕게 된다는 것. 남에게 베푼 사랑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타주의의 장점이다. 지금의 이 선택이 또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두렵기보다는 기대로 마음이 부풀어있다. 나는 ‘최소한의 삶‘을 지향할 것이다. 나는 건강 하나 때문에 음식을 바꾼 것이 아니다. 단순히 내 건강만을 이유로 자연식물식을 지향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무엇이든 골고루 먹는 습관‘으로 돌아가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반박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끌려가면 노동이고 끌고 가면 운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 없이 못 사는 삶‘은 끌려가는 삶이다. 삶의 주체인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그분 없이 못 사는 사랑‘ 또한 타인의존적인 삶이 아니던가? 그것 없이 사는 삶, 즉 끌려가는 삶에서 끌고 가는삶으로의 방향전환이 내게도 자유와 해방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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