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는 마치 주사위 놀이같다. 먼저 ‘보이지 않는 손‘이 노화, 질병, 돌봄, 죽음을 새긴주사위를 던진다. 그 결과는 ‘우연히‘ 누군가의 일상에 들이닥친다. 각자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주사위를 던진다. ‘행운‘을 기대하면서 던지는 주사위다. 최대한 천천히 늙기를, 덜 아프기를, 깔끔하게 죽기를 바라며. 또 착하고 경제력도갖춘 가족이 나를 잘 돌보기를, 다정하고 친절한 의료진을 만날 수 있기를, 말 잘 통하고 헌신적인 간병인을 만날 수 있기를기대하며 주사위를 던진다. 그런데 ‘만약‘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나쁘거나, 더 이상 던질 주사위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사위 놀이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는 우연,운, 기회, 가능성을 뜻하고, 또 하나는 투기, 모험, 위험, 사행성을 의미한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노인 시설로만 볼 수는 없다.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출산율(생산인구)로 환원하는 인구 위기론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의존적 노인‘, 그를 둘러싼 규범, 가치, 감각, 기준, 법 등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라는 실체로 현현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정상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차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인 셈이다. 한편 ‘집안일‘에 머물던 노인 부양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기보다는 시장으로 옮아갔다. 이제 개인이 좋은 돌봄을
구청 공무원은 낡은 형광등을 LED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밥솥과 냉장고를 열어본 후 필요한 식료품을 메모했다. 부엌에 식탁을 놓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겠다고 했다. 문득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수급자가 아니었다면 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할머니가 수급자라서 다행인 한편, 보건복지 정책이 할머니를 ‘취약한 대상‘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수급자가 되기 위해서, 또 수급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취약함을 얼마나 많은 공무원에게 서류와 말로 ‘증명‘했을까 싶었다.
현장에 가보니 커뮤니티 케어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보건복지 정책이었다. 취약계층은 노동능력을 상실한 가난한노인 환자였다. 한국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대개 ‘취약계층‘을염두에 둔다. 그 ‘상식‘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건복지정책이 겨냥하는 취약계층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보건복지 정책이란 무엇인가? 취약한사람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다는 것인가? 혹은 ‘보통‘ 사람들이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책인가? 혹시 계층 간의분리를 고착시키는 정책은 아닌가?
현장에서 취약계층과 보건복지라는 개념은 상호작용하며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정부의 정책은 할머니삶의 조건보다는 할머니의 ‘취약함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할머니가 취약한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수급자인 할머니가 소일거리로 생활비를 벌충하고, 질병을 유지하고, 딸과 거리를 두는 삶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어설프게‘ 돈을 벌거나 건강하거나 딸과 교류를 하다가는 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할수 있는 구조였다. 수급자가 아닌 할머니가 지금처럼 손녀와함께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편, 앞서 언급한 공무원들의‘명단‘은 곧 취약한 삶의 관리였다. 커뮤니티 케어 정책은 ‘어려운 어르신들‘을 샅샅이 찾아내 그 명단의 크기를 확대하는일이었다. 그 명단이 ‘노인 게토‘ 만들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 결과 호스피스 의료진은 임종이 임박하거나, 말기에 대한 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환자를 만나게 된다. 환자는 호스피스에서 의미 있는 생의 끝자락을 보내고 싶어도 체력과 시간이 없다. 완화의료 전문가들은 호스피스의 가치를 실현하기보다는 ‘임종 처리‘ 역할을 맡으면서 소진된다. 이런 현실에서‘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싹튼다. 간혹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접하는 선진국 호스피스의 사례들,예컨대 가든파티, 바닷가 여행,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 등을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이 ‘역동적인 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돌봄의 가치는 부서지고, 가족 보호자의 부담은 커지며, 의료진은 분열한다. 질병의 치료 가능성과는 별개로, 환자 삶의 위험이 증식하는 구조다. 그래서 호스피스에 주목해야 한다. 의료라는 컨베이어벨트 말단에 위치한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은곧 이 체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과 밀접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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