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면 될까? 너나 내가 기계를 만든다면 논리적으로 접근하겠지. 최소한의 부품을 써서 깔끔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만 살아 있는 자연은 전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아. 겹치는 것도 엄청나게 많고, 빙빙 돌고, 주제하나를 놓고 수백만 개의 변형을 만들어내, 그래서 4분의 3쯤 잘못돼도 생명체는 죽질 않아. 그 결과로 생기는 게 골드버그 장치같은 건데, 무지 튼튼한 골드버그 장치인 거지. 상상할 수 없을만큼 괴상하고 엄청나게 여러 겹을 가진 물건이 탄생하는 거야.
글자 그대로 상상이 불가능한 물건 무슨 말이냐면 우리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엄청난 것이 작은 세포 안에숨겨져 있다는 얘기야. 난 그게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톰은 ‘재미있다‘는 말을 여기저기에 붙였다.
"이봐, 형." 언젠가 내가 이렇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일이라는 건 암을 뜻했다. 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 모를 일이지. 내가 하는 일, 그러니까 생물 수학이 웃기는 게가끔은 나도 장외 홈런을 치기도 한다는 사실이지. 생각해보면대단한 일이야. 멋들어진 순수 수학뿐 아니라 우리가 관찰과 본능을 통해 알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 자연을 정확하게 설명하고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거든. 믿기 힘든 일이지. 하지만 일을하다 보면 많은 순간 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이 들어, 연조직 육종으로 말하자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제 곧 말을 못 하게될거야. 하지만 행복해 여러 가지로 운이좋았지. 가족, 크리스타를 잘 돌봐줘. 수학을 끝내지 못한 건 후회가 돼.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넌 걱정 안 해. 훌륭한 녀석. 사랑해. 나도 괜찮은 사람으로 산 거 같아. 잠들었는데 그사이에 누가비디오를 대여점에 돌려줘버렸어. 누구나 고통을 겪지, 내 차례야. 누구나 죽어, 내 차례고, 고통을 피하는 약을 먹고 싶기도 하고 먹고싶지 않기도 해. 죽는 건 상관없어. 다만 고통을 겪고 싶진 않아, 모두들 늙어가는 걸 보고 싶은데…. 크리스타를 행복하게 해줘. 행복한 추억이 많아. 너랑 이야기한 것도 좋은 추억이야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형의 아담한 입원실은 대체로 명랑한 분위기였다(사실 형은여러 병실을 전전했지만 내 기억에는 모두 하나의 병실로 뭉뚱그려져남아 있다). 검소한 방이었다. 십자말풀이, 신문, 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 책을 읽어주는 소리, 점심 배달 주문. 형은 투중에도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다. 새 종교를 찾지 않았고 자기가 늘 좋아했던 것들을 계속 좋아했다. 그 덕분에 나는 형이 좋아했던 것들에서 뭐랄까, 후광이 비치는 느낌을 받았다. 함께 보던 야구 경기들은 좋은 경기들이었고 책들은 좋은 책들이었으며 병실을 찾아온 친구들은 좋은 순례자들이었다. 모든 게 단순했고, 모든 게 포옹 같았다.
그날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형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모든 것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바라봤다. 어머니는 잠이 든 아들을보고, 나를 보고, 새벽빛을 보고, 아픈 몸을 보고, 그 끔찍함을 보고, 그 우아함을 보았다. "우리 좀 봐." 어머니가 말했다. "봐, 지금 우리가 바로 옛 거장들이 그렸던 그런 그림이잖아." 몇 달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어머니의 네 형제자매를 찾아갔다.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을 땅에 묻은 후에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혹은 되지 않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시간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좀 더 단순하고 조용한 곳으로가자고 제안했고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차창문 밖으로 평범한 도시의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리는 조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누군가에게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벤 프랭클린 파크웨이를 벗어나 미술관 앞에 차를 세웠다.
이런 테마의 장면을 ‘경배Adoration‘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마음에 품었다. 그런 순간에 생겨나는 애정 어린 숭배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참 유용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말문을 잃고 말랑말랑해진다. 뒤이어강렬하고 명백하지만 일상생활의 소란 속에서는 약하게밖에 느껴지지 않던 무엇인가가 우리의 안으로 침투한다. 경배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다. 맥락을 더하는 것은 이 수수께끼같지 않은 수수께끼의 명백한 의미를 흐릴 뿐이다. 누구나 자고있는 아이나 연인, 떠오르는 태양 혹은 어쩌면 성스러운 유물이나 죽은 지 오래된 이탈리아인이 곱게 그려낸 그림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형이 두 손을 꼭 쥐고 용감하게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 느낌 말고는 다른 감정이거의 들지 않았다. 기쁨의 별에서 특별한 종류의 선명한 빛이 나오는 듯했다. 옛 거장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함과 같은것이었다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 게 확실한 젊은이를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이다. 마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이 그림은 ‘통곡amentation‘ 혹은 ‘피에타Picti‘라고 부르는 장르에 속한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모든 의미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미드타운의 분주한 행인들 틈에 섞였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침묵 속에서 빙빙돌고, 서성거리고, 다시 돌아가고, 교감하고, 눈을 들어 아름다운것들을 보면서 슬픔과 달콤함만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다. 지친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브루클린을 향해 달리는 지하철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형태를갖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해결책이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네헤Neheh‘, 즉 ‘수백만 년간‘이라고 불렀고 그것의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순환이었다.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별들은 한자리에 선 관찰자의 주위를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회전하며 거대한 시간의 바퀴 또한 망자들을 처분하고,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이집트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물의 본질로여겨졌고, 이런 사고방식은 사후 세계로까지 확장해 메트에 전시된 인물상들의 끝없는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렇게 뛰어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거야!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나는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자리의 명함을 지니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만 계속하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이 달갑지 않은 역설을 직시하는 데는 거의 3년이 걸렸다. 내가 만약 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틈틈이 내 생각들을 흐릿하게나마 적어두었을테고, 영감을 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해 글을 써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빅리그였기에 내 생각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고야망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었다. 나는 평론 한 마디」라는 섹션에 들어가는 한 단락짜리 서평을 쓰는 데도 스스로가 아닌 목소리를 사용하고, 내 것이 아닌 권위를 주장하고, 정말 그렇게느끼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의견들을 피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할 삶에 적응해버렸다.
멜로디를 뽑아낸다. 음악은 알 수 없는 리듬을 따라 내가 예상하는 음계에서 항상 조금 위나 아래에 있는 음들로 이어진다. 나는이것이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연주자가 마침내 손을 멈췄을 때는 아마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테지만 수많은 디테일로 채워진 그 연주를 듣는 동안 마치 수천번의 붓놀림으로 채운 그림이 순간순간 공중에 걸려 있는 듯했다. 나는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탐험해볼 자격만을 간신히 갖춘 갓난아기가 된 기분이다.
곽희는 풍경화가 "일상 세계의 굴레와 족쇄"로부터 "두루미의 비행과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까운 벗이 되는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한다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반드시 글자 그대로 자연 속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그림 안에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자연과 작가의 마음이 적절히 어우러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을 반영한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채와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굽실거리는 머리카락 등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다양하고 매력적인 세상의 속성들이 훌륭한 표현 수단 안에 모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무언가가 웃기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를 웃게 만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면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면된다. 웃음만큼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좀 더 조용하고 주춤거리며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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