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 김창완 에세이
김창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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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이란 것도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기분은 날씨 같은 것이라고

어떤날은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게 힘이 펄펄 나는가하면 또 어떤 날은 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때가있습니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날씨 같은 거라고 여기면 되는 거예요. 바람 불다,
비가 오다 그러다 햇살이 비추기도 하는 거거든요. 또 그러다 흐리기도 하고.

잡초에 관한 얘기였는데요.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 은행을 세웠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이런 말을 덧붙였더라고요. 그러니 스스로 잡초라 할 일이 아니네요. 용기를 갖자고요.

사진을 힐끗보니 가슴에 또 틈이 벌어집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다시웃습니다. 왜냐면 막내는 아직 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인디언의 지혜에서 빌려 왔습니다. 인디언들은 진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라고 믿는답니다. 그분이 할머니를 잊지 않는한 할머니는 그분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 또한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하늘나라로 간다 해도진정으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사람을 애태우며 잊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기로운 그들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가면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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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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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날로 커져만 가는 기술의 힘과그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지혜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될 것이다."
스티븐 호킹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이러한 일상이 1829년 10월 6일에 대전환을 맞는다. 그날, 영국 출신 기술자 조지 스티븐슨이 설계한일종의 로켓, 그러니까 증기기관차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이어주는철로 위를 시속 4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림으로써 우편마차와 중소형쾌속 범선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기차는 전신기, 비행체 등과 결합하면서 우리가 시간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했다. 인간과상품은 물론, 아이디어조차도 항구와 공항, 송신탑 등을 연결해주는전 지구적인 운송망을 타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속도로 세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1971년 10월 2일, 미국 출신 공학도 레이 톰린슨이 과학자들과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 애용되던 정보통신망 아르파넷Arpanet‘을통해 최초의 이메일을 보낸다. 이로써 인류는 급작스럽게 즉시성의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 모든 것은 (거의) 빛의 속도로 교환되고 달라진다. 우리는 고대의 포석 깔린 도로, 산업화 시대의 철도를 지나 이젠또 어떤 기초 설비가 우리의 일상적인 디지털 행위를 가능하게 해줄지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이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거나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엄지 척‘(그 유명한 ‘좋아요‘)을 누를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수십억 번의 클릭은 어떤 지리적 분포양상을 보이며, 그것들의 물질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은 어떤 생태적 · 지정학적 위협을 가하는 걸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질문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아르파넷은 이제 디지털 선사시대의 유물에 속하며, 그것을 탄생시킨 설계자들, 즉 정보과학계의 선구자들은 우리의 머나먼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한 족속처럼 여겨진다.

이와 관련된 숫자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세계 디지털 산업은너무도 많은 물과 자재,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이것이 남기는 생태발자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가 남기는 생태발자국의 세 배에이른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10퍼센트를 끌어다 쓰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거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데,이는 세계 민간 항공업 분야 배출량의 두 배에 약간 못 미치는 양이다." "디지털 기업들이 그들을 규제하는 공권력보다 더 힘이 세질 경우, 그들이 생태에 끼치는 영향을 우리가 더는 통제하지 못할 위험이있다"고, 스카이프 공동 창업자이자, 기술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는 생명의미래연구소Future of Life Institute 창립자인 얀 탈린은 경고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디지털 오염은 녹색 전환을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향후 30년을 뜨겁게 달굴 도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미 경주는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디지털 기업들은 인터넷을 비롯하여 스마트폰, 심지어 본사 건물을 에워싼 잔디밭마저도 ‘녹색‘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가진 막강한 재무 역량과 혁신 기량을 총동원할 것이다. ‘친환경적‘이면서 ‘책임감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디지털 산업의 목표가 오늘날 업계의 최대 관심사인데, 이는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클릭하기를 계속하고 마음껏 ‘좋아요‘를 보낼 수 있기때문이다. 디지털 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GAFAM‘은 더 나아가 그들이 바친 기막힌 물질적 조공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하고자 기를 쓴다. 우리가 상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화면 안 어디에나 깔려 있으나 우리를 둘러싼 대지에서는 좀처럼 실체를 파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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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일러 주는 하느님 - 오늘의 삶을 위한 식별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자코모 코스타 엮음, 정강엽 옮김 / 성서와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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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은 두 가지 생각의 차이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은 3인칭 시점으로 쓴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길, 맨발로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하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8항). 성인전은 그에게 기쁨의 여운을 남겼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이 경험에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매력을 잃고 공허함과 불만족을 남깁니다. 반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나는 이 지루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지 않겠어‘ 같은 일종의 저항감을 일으키지만, 성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를 느끼고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됩니다.

두 번째 측면은 생각의 종착점이 어디인지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 보입니다. 식별에는발전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추상적이거나 통상적인방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을 통해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이해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근본적인 경험의결실인 ‘식별의 규칙‘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전제를 제시합니다.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더욱 키워 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방법을 쓴다" 《영신수련》, 314항).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않습니다.

식별하는 사람은 식별에 선행되는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식별이란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서 제비를 뽑는 일종의 신탁이나 숙명론 혹은 실험실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떤 지점을 지나는 여정을 마칠 때면 중요한 질문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여정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런데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걷고 있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바로 그곳이 식별이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다리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하느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렇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마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처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눈에매력적으로 보인 것들은 그에게 환멸을 가져왔지만, 그다지눈부시지 않은 다른 것에서 그는 지속되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머물다가, 결국에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자선 활동이나 좋은 일을 하면 행복을 느끼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행복과 기쁨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사건에는 명백한 우연성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사소한사고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기사들의 무용담에 관한 책을 원했지만, 성인전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좌절은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얼마 후에야 이냐시오 성인은 이것을 깨닫고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명심합시다.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일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에게 우연히 어떤 일이 일어났고, 우연히 이 사람을 만났고,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계획되지 않았지만, 하느님은 계획되지 않은 사건과 심지어 불상사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산책을 해야 하는데 발에 문제가 생겨서 산책을 할 수 없잖아." 이런 불상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사건이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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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약이며 결국에는 다 좋아질 것이라고, 모든 고통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못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삶이니까. 부서진 파편들을 서둘러주워 모으려고 하면 안 된다. 파편에 손을 다친다. 단, 이 한 가지를 나는 안다.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파란 바다가 바라보이는 귤밭에서 뙤약볕과 장대비와 풀모기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더 다행히도, 그녀는 몸은 고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은 평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 그래야 비상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다.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가슴의 가벼움이다.

깨달음에 이른 후 싯다르타가 제자들에게 한 첫 번째 강의는
‘인생은 괴로움이고 고통이다.‘라는 것이었다. 불교도뿐 아니라비불교도들도 이 진리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불상은 왜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심지어 크게 웃는 불상도 있다. 그렇다면 생에 대한 정의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궁극의 웃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을생각의 무거움으로 짓누르는 시기를 지나 경쾌한 혼의 길로 나아가는 것.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섬」에서 썼다.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여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있다.
가까이 오라,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를 어여삐 여기자당신과 나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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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잠깐의 시간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힘든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초라해진 내 아픔과 고민을 건넸더니 귀를 의심할 정도의 간단명료한 해답을 주셨다. 몇 초간 멍해 있다가도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혜로운 답이었다.

"조진 거 아니야? 조진 건 잊어라", "눈이 갔네. 밥맛은느껴지냐? 밥부터 먹고 생각해라. 하기 싫어도 해야지" 등주변에선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답을 내어주셨다. 보통 고민을 던지면 답변이 더 길어야 정상인 걸로 알고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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