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약이며 결국에는 다 좋아질 것이라고, 모든 고통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못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삶이니까. 부서진 파편들을 서둘러주워 모으려고 하면 안 된다. 파편에 손을 다친다. 단, 이 한 가지를 나는 안다.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파란 바다가 바라보이는 귤밭에서 뙤약볕과 장대비와 풀모기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더 다행히도, 그녀는 몸은 고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은 평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 그래야 비상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다.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가슴의 가벼움이다.
깨달음에 이른 후 싯다르타가 제자들에게 한 첫 번째 강의는 ‘인생은 괴로움이고 고통이다.‘라는 것이었다. 불교도뿐 아니라비불교도들도 이 진리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불상은 왜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심지어 크게 웃는 불상도 있다. 그렇다면 생에 대한 정의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궁극의 웃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자신을생각의 무거움으로 짓누르는 시기를 지나 경쾌한 혼의 길로 나아가는 것.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섬」에서 썼다.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여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있다. 가까이 오라,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를 어여삐 여기자당신과 나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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