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보산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중에 낭독된 독서는 모세가 그곳에서 죽었다라고 맺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왜요?"라고묻지 않았다. "하느님, 모세를 그렇게 고생시키고 왜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신 것인지 말해 주세요"라고도 하지 않았다. 예순이다 되어서 이곳에 왔기에, 떠나오기 전 내가 ‘나는 틀릴 수 있습니다‘라는 걸 아프게 깨닫고 떠나왔기에 얻은 축복이었다. 이보다한 환갑 선물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예순이라는 나이가 실감되었다. 이순(順)이라고 하지 않던가, 귀가 순해진다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행복은 존재한단다.
불을 켜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지.
영화 <해리포터> 중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뭐라고 대답하실까 많이 궁금했다. 나의빈약한 상상력은 성모님께서는 워낙 겸손하시니까 "무슨 소리니,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란다"라든가, 아니면 단순하게 "고맙다", 뭐 이러고 넘어가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으응,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비논리적인 이 구절 하나로 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을 믿어버렸다. 이 단순한 말은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 지어내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말이 아닌가

"전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지요. 큰딸인 나는 학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제가새로 소개받은 어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지요. 거기 사장님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서울 시내에 나가 구경을 시켜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그리고 뜻밖에도 저를 서점에 데려가 책을 사주셨어요. 저에게는 서울이란 온통 고생과 긴창뿐인 도시였는데 아주 뜻밖의 일이었지요. 집에 갈 때가 다 되어서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조심스레 여쭈었어요. ‘제게 왜 이런 걸......‘ 하고요. 사장님께서 웃으시며 제게 자신의 지갑을 열어 돈을 보여주며 대답하셨어요."누군가 너에게 이런 걸 해주라고 이 돈을 주셨단다. 그러니 아무염려 말아라‘

‘그런 좋은 분이 계시다니 믿을 수 없네요‘
저는 그냥 웃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말씀이 이어졌죠.
‘그 사람이 궁금하니? 만일 그렇다면 그게 어디든 네가 가는 길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보거라. 거기 그분이 계시단다.‘

"미안해요. 아시다시피 내가 아들 잃고 요새 정신이 없어 실수를했네요. 누구라도 젊은 아들을 잃고 나면...
나는 그 유명한 분을 안다. 좋은 분이었다. 겸손한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던 그분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당돌한 젊은수녀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왜 자매님 아들은 죽으면 안 되는 거죠?"
다음 날 그분은 수녀원을 나왔다. 괘씸해서가 아니었다. 모욕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깨닫고 치유되어서였다. 그 모진 한마디가 그분이스스로 둘러친 유폐의 벽을 깨부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말했다.
"그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대개 이런 것이 우리의소원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이 없어지고 나면 인간의 손과 발이 뭉개지고 코가 뭉개지며 종국에는 눈도 먼다. 조금도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닫다가 손을 찧어도, 발 위로 무거운 돌이 떨어져도 피하지 않는다.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왜 멀게 되냐면, 눈을 계속 뜨고 있어도 아프지 않기 때문에 깜박이지 않게 되고 깜박이지 않으니까 심한 안구건조증이 오고, 그리하여 각막이 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몇 초마다 작은 소리를 내는 장치를 주어 그때마다 눈을 깜빡이게 하면실명이 방지된다고 했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참으로 중대하고 두려운 일이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은 그의 책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고통이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짧고 멋진 정의를 내렸다. 나는 결혼이 줄 수 없는 것을 결혼에서 바랐고, 사람이 줄 수 없는 사랑을 사람에게 원했던 것 같다. 나중에 신을 다시찾게 되었을 때 내가 원했던 그 사랑의 원형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알고 깜짝 놀랐다. 그걸 인간에게 바랐었다. 우상숭배를 하려 했던것이다.

두 번째로 고통이 주는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야트막한 정상까지 가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거나 책을 하나쓰려고 자리에 앉거나 하면, 말할 것도 없이 고통이 다가온다. 내 한계는 너무도 분명해서 "오늘은 이 밭의 잡초를 다 뽑아야겠다. 뭐,한나절이면 되겠네" 하거나 "이번 달 말까지 원고를 끝낼 수 있을 것같아요" 하는 망상이 깨지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내가고작 이만큼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싶다. 여기서 그 고통을 자기비하로 떨어지지 않게 잘 관리하면, 그것은 곧바로 고통의 세 번째이점인 성숙으로 연결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박탈과 고통의 삶을 살기로결심해서는 안 됩니다.
탄탄하고 오래 지속되는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의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가려고, 종종 우리 자신을 가두는고리를 깨뜨릴 때, 인생은 흥미진진해집니다.
-엠마뉘엘 수녀, 『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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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잠결에 뒤척이는 것, 걷는 것, 눕는 것, 양말 신는것, 의자에 앉는 것, 운전 중에 핸들을 살짝 트는 것조차 그동안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 몸의 잔근육, 온몸의 연결상태를 고통이 비춰준다. 어찌 보면 참으로 복된 고통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치 전과 23범이라도 된 듯이 내가고통의 수갑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찬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동의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오늘 내내 생각했는데, 야뽁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축복해 달라고 떼쓰던 야곱이 나였다. 아마도 곧 나도 환도뼈를 다치고 커다란 축복을 얻겠지.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
이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내게 남았다. 내게 있어서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 혹은 결핍 대신.

원래 저런다, 혹은 원래 그랬다. 참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이 한 문장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학대와아픔을 지나쳐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혹은 죽지도 못할 만큼절망에 빠뜨리는 것인지.

그렇구나. 그래서 가끔 하느님이 답답했구나. 전지전능하다면서저 나쁜 놈들에게 벼락도 내리지 않기에 나는 무력한 신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삼갈 일이 많다는 거구나. 아기를 재운 엄마가 아무리 나쁜 놈이 와도 큰 소리로 싸우기를주저하듯이, 함부로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못하는 거구나. 그래서악은 일견 시원해 보이고 사이다 같고 힘이 세 보이는 거였다. 거칠게 없지 않나. 누가 다치든 상처 입든 상관이 없을 테니.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삼가야 할 일이 많고 헤아려줄 일이 많고 그래서 많이 약해 보이는 것이었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동백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는 동백이와 함께 꼬박 하룻밤을 앓았다.

아잔 자야사로 스님은 유창한 태국어로 차분하게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된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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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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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백자기가 상의 언덕에서 노닐다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는데, 그 나무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대를 매어놓아도 그 나무의 그늘은 수레들 모두를 가릴 만했으니까.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이것은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니었던거구나!"
「인간세」

"모든 X의 본질은 Y다"라는•주장과 믿음에 전제되어 있는 ‘모든‘이라는 발상과 ‘본질‘이라는개념, 바로 이것이 장자가 의심하는 표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장자는 우리가 가진 통념을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요? 모든 날개의 본질은 날게 하는 데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이 펭귄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볼까요. 분명 그 사람의 눈에는 펭귄이 날개를제대로 쓰지 못하는 열등한 새로 보일 겁니다. 한마디로 펭귄을우스꽝스럽게 본다는 겁니다. 펭귄은 우스꽝스럽거나 열등한새가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것이 먹이를 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안 되는 남극 대륙에서 날개로 헤엄치는 펭귄은 가장 멋지게 살아가는 조류니까요. 결국 장자의 삐딱한 사유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각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조류를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여 그들에게 가치의 우열을 부가하지 않을 테니까요.
기러기나 독수리는 멋진 새이고 타조나 펭귄은 우스꽝스러운새라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타조만큼 기러기도, 기러기만큼 타조도, 펭귄만큼 독수리도, 독수리만큼 펭귄도 모두당한 삶의 주체니까요.

목재와 인재의 공통성을 생사 여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동성과 부자유에서 찾아야 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만이 그 타인에게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강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예는 현재의임금노동자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나 돈을 주는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다릅니다. 강제로 잡혀 와 주인이 원하는 재능을 강제로 익히는 노예화의 과정은 주인 후보자들이 원하는 재능을 자발적으로 익혀 스스로 자신을 파는 과정과는 구별되니까요. 그렇다고 임금노동자가 노예보다 더 낫지 않냐고 속단하지 마세요. 타율적 복종이든 자율적 복종이든 복종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

양주가 송나라로 갈 때 어느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객사주인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름답고 한명은 못생겼다. 그런데 못생긴 부인은 귀한 대접을 받고, 아름다운 부인은 홀대를 받았다.
양주가 그 이유를 묻자 객사의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
양주는 말했다. "제자들은 명심하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는가!"
「산목」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기보다 남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해서 행동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의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모습과상상한 모습 사이의 괴리도 서글픈 일이지만, 남의 시선과 평판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하니 인간의 삶은 경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니테‘의 의미이고, 이 말이 ‘허영‘이라고번역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끄는 찬양, 즉 ‘영광‘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가장 지혜롭다는 철학자들도 허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 혹은 신에 대해 논쟁할 때조차도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진리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찬양자"를 갖는 데 있으니까요.똑똑하다는 혹은 심오하다는 찬양을 듣고 싶었다는 이야기죠.심지어 철학 책을 읽은 독자들마저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남들의 찬양을 들으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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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묵상독서 - 품위 있는 인생 후반기를 위하여
임성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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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심리 치료사는 집안일을 ‘묵상의 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우리의 성격뿐 아니라 삶 전체의 질에도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겠지요. 매일 집안에서 해야 할 일, 밥 짓는일에서부터 방을 쓸고 닦고, 의복을 세탁하는 일들이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줍니다. 집안일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집안 구석구석과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우리의 심상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벽에 걸어놓은 십자고상이나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는 일,
그것 자체가 묵상이 됩니다. 빨래를 널고 거둬서 개키는 순간에도우리는 가족들을 삶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 매체와 책에서 ‘고독‘이나 ‘외로움‘, ‘혼밥‘ 등은 부정적인 단어로 쓰입니다. 하지만 위의 그림책 주인공처럼 고독 속에서 자기내면으로 들어가 일상을 편하게 지내는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영혼과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문득 우리나라 옛이야기 『팥죽할멈과 호랑이』가 떠올랐습니다. 산속에서 홀로 살던 할머니를 호랑이가 나타나 잡아먹으려고 할 때집안에 있던 밤톨, 맷돌, 쇠똥, 지게, 멍석 같은 사물들이 머리를 써서 할머니를 구해주는 내용입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저자인 류시화 시인은 "정원사가 있는 곳에 정원이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저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상 안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만드는 공간의 창조자가 되라는 뜻일 겁니다. 영혼을 만나려면, 즉 영혼을 잃지 않으려면 소박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해야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멈춤과 묵상이 필요함을 다시 깨우치게됩니다.

실제로 2013년 런던에서 두 명의 코미디언이 무신론자들의 교회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노래 부르기, 소집단 유대감 형성,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하면서 모임을 가진다고 합니다. "더 잘 살고, 자주돕고, 더 많이 감탄하라"가 그들의 모토이고, 자신들을 ‘인본주의 신비가‘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무신론자로 반종교적 논쟁가로알려진 샘 해리스는 열성적인 명상가입니다. 그는 깨달음의 방법으로 명상을 적극 추천하면서 온라인으로 명상 강의를 합니다. 그는 명상하기 위해 꼭 경전을 외거나 종교에 귀의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주장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쓴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생각과 감정, 마음, 의식이라는 말의 개념을 조금 구분지어설명합니다.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외부의 사물과 사건에 반응함으로써 형성된 것들입니다. 주로 과거에 경험한 기억에 의해 재생되고, 강화되며, 종래에는 습관으로 남아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감정은 미래에 대한 온갖 시나리오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마음이란 이러한 생각과 감정들의 집합체인데요, 불행한 마음,행복한 마음과 같은 말들처럼 우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의식‘은 근원적인 에너지와 같습니다. 생각과 감정의 숲을 헤치고 더깊이 들어가면 순수의식의 세계를 만날 수 있고, 톨레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베네딕트회 사제로 수많은 영성 책을 낸 안셀름 그륀은 영혼이자리 잡고 있는 그곳을 옹달샘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가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냈던 것처럼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있는 영혼을 ‘우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영혼은 어떤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편의상 그렇게 설명하는 것뿐이지요

첫째, 푹 자고 걷기: 어느 저명한 강연자는 이런 말을 했다. "20킬로미터를 걸은 날에는 절대 연설에 실패하지 않는다" 푹 자고걷기가 중요하다.
둘째, 편지쓰기: 생각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오랜 친구에게 편지를 써보라. 편지를 쓰면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솟아날 것이다.
셋째, 양질의 대화 나누기 : 좋은 대화는 와인처럼 우리를 도취시킨다. 공감의 불 주위에 모이면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활발해진다. 지적인 활동은 전염성이 있다.
넷째, 고독한 시간 갖기: 숲속에 혼자 있는 시인이 적은 내밀한언어가 도시의 북적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듯이 가장사적이고도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진실이다.

다섯째, 아침을 성스럽게 유지하기: 위대한 사상가들은 아침마다 한 시간씩 명상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여섯째,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어떤 음악가의 작품도 바람의소리에 견줄 수 없다. 자연의 목소리를 영혼의 목소리다. 이 소리는 어떤 교회의 오르간도 도달하지 못한 신성한 곳으로 우리를 들어 올린다.
일곱째, 한 걸음 물러나기: 특정한 문제나 프로젝트로 인해 답답할 때 필요한 것은 풍경의 변화이다. 때로 익숙한 일상을 떠나는것만으로 창조성에 불이 붙는다.
여덟째, 새로운 책 읽기: 좋은 문학 작품은 삶을 긍정하고 신뢰하게 해준다. 우리의 감각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최고의 책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아홉째, 인내하기: 의지력은 영감의 적이 아니라 협력자이다. 신의 은총을 품은 바람은 항상 불고 있지만 당신이 돛을 높이 올려야만 소용이 있다.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가 "태초에 장미는있었고 장미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는 장미는 없고 장미라는이름만 있다"라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실재로서의 장미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심어진 장미에대한 상징체계를 갖고 장미를 대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받은 꽃이 장미였을 때와 민들레였을 때 우리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장미와 민들레에 대한 상징체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윌버가 지적한 대로 언어가 만든 세상속에 살면서 ‘환상 속 경계‘를 만들었고, 그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으로 인해 전쟁터를 만들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윌버의 강의는 페르소나, 에고, 심신 통합 단계에 이어 이제 ‘초월적인 나‘라는 개념으로 넘어갑니다. 초월적인 나에 대해 윌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요? 윌버는 한마디로 정리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내 불안은 내가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것이라고 윌버는 단언합니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불안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거라는 뜻입니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철저히 수용하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하면 됩니다. 불안이 사라져가는 것을 단지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불안이 존재하든 안하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한가운데서, 다만 ‘무선택적 자각‘으로 머물러있어보라.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
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이다. 그것들이 나의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신의 괴로움을 비난하거나, 그것들에 분개하고, 원망하는 일도, 거부하거나 탐닉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그는 켄 윌버의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코스모스 Kosmos‘라는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존재의 질서 있는 전체 Whole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불쌍한 현대인들은 이 코스모스 Kosmos를 코스모스 cosmos(물질적 우주)로 축소시켰다. 물질과몸과 마음과 혼과 영을 물질 한 가지로 축소시킨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이 영혼을 박대할 때마다 생명의 생기가 우리에게서 빠져나간다. 이로 인해 인간은 신경쇠약과 격분, 정신의 불모 등의대가를 치른다"( 칼 융)

인간이 지닌 깊은 슬픔에 관한 어떤 표현도 나에게는 낯설지않았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들의 눈에서 그들이 지닌 고통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다 끝나는 시간에 나는 항상 이런 느낌을 가졌다. 나는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 가혹한 짐을 어떻게 견디어야하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었지만 그냥 묵묵히 참아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가해진 박해에 대한 비통함보다는 ㅇ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공포‘라고 부르는 상황에서도 바르게 서기를 원하고 여전히 삶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에티의 일기에서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구절은 "우리를 도울 수없는 신을 우리가 돕고 보살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계시다면 이 비참한 일들에 침묵하실 리 없다"라고 절망하며 신의 부재를 부르짖던 때에 에티는 우리가 신을 보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
라는 에티의 말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영혼을 돌봄으로써 곧 신을 도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에티의 이런 마음은 그가 재스민 꽃을 보면서 신과 나눈대화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비바람이 치더니 집 뒤에 피었던 재스민 꽃이 모두 떨어져버렸습니다. (...) 하지만 내 속 어딘가에는 재스민 꽃이 지지 않고 예전처럼 우아하게 활짝 피어 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거짓의 요소가 침투한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끊임없이 변하는 삶에서 확실성을 얻고자 고정관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 결과 미묘한 차이와 놀람의 요소를 지닌 실제 삶을 경시하고 희생시킨다"라고 통찰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진실을 희생시키는 이유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았던 이념이라는 건물을 부수는것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한 방법이 나옵니다. 그는 이 광란의 세계에서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 집이나 사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디지털 기기의 전원을 끄고, 일을 내려놓고,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스스로를 침묵시키고, 자기 안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잠시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게되고, 그럴수록 세상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지요.

제가 소로에 대한 일화 중에서 가장 크게 웃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소로는 병아리들이 화단을 파헤쳐서 속상하다고 말하는 에머슨 부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자 소로는 헝겊을 잘라병아리들의 발을 감싸는 양말을 만들어 신겼다고 합니다. 병아리들을 우리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였지요. 귀여운 병아리들이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려고 양말을 만들어 신기는 소로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터졌습니다. 앞으로 소로를 생각할 때면 항상그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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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으로 떨어지다 - 인생의 후반전, 어떻게 살 것인가?
리처드 로어 지음, 이현주 옮김 / 국민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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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미국보다,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큰 세계를 만나게 되었는데 덕분에 미국도, 가톨릭도 하나의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 화폐에 새겨진 문장인 ‘여럿에서 하나‘(e pluribus unum)는 그 속에 많은 사람들(유색인, 동성애자, 원주민, 가난한 민중 등)을 포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끊임없이 로마 아니면 가톨릭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예수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분(요한복음 4:42) 이든지 아니면 아예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분이다. 미국은세계 모든 나라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하는 나라든지 아니면 아예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나라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를 찾아온 변화와 깨달음의 느린 과정은 ‘이것 또는 저것‘(either-or)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이것도저것도‘(both-and)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많은 기도와 자기 회의, 공부그리고 대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정 자체가 나를 이끌어 교회에서 말하는 ‘성결함‘이 무엇인지, 미국이 말하는 ‘자유‘와 심리학이 말하는 ‘옹근
전체‘(wholeness)가 무엇인지를 깊이알 수 있게 해주었다.

폴 리꿰르가 말하는 ‘첫 번째 순진함‘은여정을 출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두 번째 순진함‘은 분노, 분열, 소외,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같은 여정을 계속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두 번째 순진함‘이야말로 성숙한 어른과 성숙한 종교의 목표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잘 늙은 사람 얼굴이 동안인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일까? 그곳이 우리 모두 가야 할경지 아닐까? 그래서 한 시인이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고 말한것 아닐까?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고 무엇을 판단할 때 사용하던 나의 밝은관점이 살아오는 동안 차츰 흐려졌다. ‘우주‘(universe)라는 말 자체가 ‘한 물건을 돌려놓다‘(turn around one thing)라는 뜻이다. 내가 그 ‘한 물건‘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우주 안에 어떤 ‘큰 진실‘(Big Truth)이있든지 아니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실이 아예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이 모든 것 뒤에 어떤 패턴 (그게 ‘예외‘라는 패턴이라 하더라도!)이 있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부조리한 우주가 있게 되는 건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도마도, 마더 테레사도 가졌던 의심과 불안을 조금도 품지 않는 ‘참 신자‘들이 실은 좀 걱정스럽다. 모든 것이 그토록 분명한 사람들은 햄릿의 ‘너무 많이 저항하는‘ 여왕처럼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삶의 옹근 신비를 움켜잡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의심의 동일한신비인 그 반대쪽 절반을 감내()하는 것이다. 무엇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그것의 여전히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것이다.

T.S. 엘리엇이 그의 ‘사중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험을 했지만 그 의미를 놓쳤다.
그리고 경험의 의미에 대한 접근은,
우리가 행복에 결부시킬 수 있는 의미를 넘어,
다른 형태로 경험을 재생시킨다.
엘리엇의 문장이 난해하긴 하지만 거듭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미국 헌법을 지켜야한다거나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단순한 의미가 이제 충분하고 그것 자체가 더 깊은 행복으로 바뀐다. 몸은 음식 없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은의미 없이 살 수 없다. 나치의 대학살에서 사람들을 절망과 자살로부터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고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은 참으로 옳은 지적이었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존재다. 우리 경험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영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인생의 행복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패러독스를 내포한 새로운 통일장이 차츰 후반부 인생의 특성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온갖 복잡함에서 배울 것을 모두 배운 뒤에다시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슬픔과 부조리를비롯해 온갖 ‘쓸데없는 것들‘이 모두 함께 그 속에 들어 있음이 눈에보일 만큼 충분히 오래 산 것이다.

후반부 인생에게는 우주가 추는 총체적 춤의 한 부분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다. 춤마당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거나 더 잘 추는 모습을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의 인생의 의미는 자기를 돋보이는 데 있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데 있다. 자기를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모든 일을 경영하고 계신다. 지금 여기 안에서 밝음이 솟아난다. 그 밝음 하나에 모든것이 충만하여 차고 넘친다. 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추지만 그것을밝게 빛내주는 무아(無我)의 자유가 함께 춤춘다. 1940년대의 부드러운피아노곡에 맞추어 늙은 두 연인이 상대방 팔에 몸을 맡기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조용하게 춤추는 장면을 그려보라. 말 그대로,춤이 저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절망도 사물의 실체를 변경하거나 항상 거기에 있는 우주의춤에서 오는 기쁨을 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의(故意)로 자기 자신을 잊고, 체면 따윈 바람에 날려 보내고, 총체적인 우주의 춤판에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모든 일, 모든 사건에 대하여 강하고 최종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건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면 기뻐하고 슬프게 하면 슬퍼한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다른 누구를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이전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위치에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느끼지 않고, 그것이 모든 것을 달리 만든다. 우리는 행위(doing)에서 존재(being)로, 유기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삼투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

당신이 ‘빛‘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만큼 당신의 그늘은 짙어질 것이다. 어쩔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사람들이다.
‘그늘‘을 ‘죄‘와 혼동하지만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훨씬 더 잘 섬길 수있을 것이다. 죄와 그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건좋은데, 그래서 자신의 그늘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자기도모르게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다.

레이디 줄리안의 말이 참으로 명언이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당신이 당신의 후반부 인생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그것을 원치 않아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그것을 정확하게 주신다. 그런즉, 당신은 분명하게갈망하라. 깊이 갈망하라. 당신 자신을 갈망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라. 모든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라.
모든 ‘비워냄‘(emptying out)은 오직 ‘큰 쏟아져 나옴‘(a Great Outpouring)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이 그렇듯이, 모든 공백들을 싫어하여급히 그것들을 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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