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잠결에 뒤척이는 것, 걷는 것, 눕는 것, 양말 신는것, 의자에 앉는 것, 운전 중에 핸들을 살짝 트는 것조차 그동안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 몸의 잔근육, 온몸의 연결상태를 고통이 비춰준다. 어찌 보면 참으로 복된 고통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치 전과 23범이라도 된 듯이 내가고통의 수갑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찬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동의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오늘 내내 생각했는데, 야뽁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축복해 달라고 떼쓰던 야곱이 나였다. 아마도 곧 나도 환도뼈를 다치고 커다란 축복을 얻겠지.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
이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내게 남았다. 내게 있어서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 혹은 결핍 대신.

원래 저런다, 혹은 원래 그랬다. 참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이 한 문장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학대와아픔을 지나쳐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혹은 죽지도 못할 만큼절망에 빠뜨리는 것인지.

그렇구나. 그래서 가끔 하느님이 답답했구나. 전지전능하다면서저 나쁜 놈들에게 벼락도 내리지 않기에 나는 무력한 신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삼갈 일이 많다는 거구나. 아기를 재운 엄마가 아무리 나쁜 놈이 와도 큰 소리로 싸우기를주저하듯이, 함부로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못하는 거구나. 그래서악은 일견 시원해 보이고 사이다 같고 힘이 세 보이는 거였다. 거칠게 없지 않나. 누가 다치든 상처 입든 상관이 없을 테니.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삼가야 할 일이 많고 헤아려줄 일이 많고 그래서 많이 약해 보이는 것이었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동백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는 동백이와 함께 꼬박 하룻밤을 앓았다.

아잔 자야사로 스님은 유창한 태국어로 차분하게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된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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