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인사이드 - 파타고니아가 그리는 책임경영 기업의 미래
이본 쉬나드.빈센트 스탠리 지음, 이영래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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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초기 사명 선언인 "우리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되 불필요한 환경 피해를 유발하지 않으며, 환경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형성하고 해결 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사업을 이용한다"는 이때부터법의 힘을 빌려 소유주와 별개로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인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이 선언문의 변경은 회사 주주 100퍼센트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초크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클린(Clean)‘이라는 단어다. 확보장비로 너트와 러너만을 사용하는 등반을 클린 클라이밍이라고한다. 지나가는 등반가가 바위를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에 클린이다. 암벽에 아무것도 박아 넣지 않고 다시 빼내지도 않아 다음 등반가가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경험하지 않으므로 클린이다. 등반가의 확보 장비가 등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기 때문에 클린이다. 암벽에 변화를 주지 않는 등반, 자연의 일부로서 친환경 등반에 한 발 가까워지는 등반이 클린 클라이밍이다."

우리가 성찰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환경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방식으로 의류를 만드는 방법을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가 유발하고있는 다른 피해는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사업 방식은 다른 의류 회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질감과내구성이 좋은 면직물을 고르고, 재단 공장과 봉제 공장으로 샘플을 보냈다. 이 공장들은 가격에 따라 여러 나라에서 대량으로 원면을 사들이는 중개상들로부터 납품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면이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마감처리가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회사 내 여러 새로운 커뮤니티 그룹의 조언을받아 업무 문화에 새롭게 입문한 사람들이 환영받고 소속감을 느끼며 인정과 승진의 기회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웹사이트에는 백인, 이성애자, 시스젠더(cisgender,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일치하는 사람-옮긴이), 젊은 사람이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스포츠를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는 30년 동안 ‘품질, 진정성, 환경보호, 탈관습‘이라는 네가지 핵심 가치를 공유해 왔다. 마지막 가치관은 언제나 직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이제 직원들은 이 네 가지 가치관에 정의,
형평성, 인종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가했다.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골먼은 "자신의 영향력을 알고, 개선을 도우며, 배운 것을 공유하라"고 말했다.
환경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이런 원칙들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행동을 시작하거나 지속하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원칙은 순차적으로 따라야 한다. 우선 부정적인 영향을 파악한 후 개선책을 마련하고 배운 내용을 공유해야 한다.

구매하는 제품의 품질에 더 신경을 쓰는 고객의 상당수는 제품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졌는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기업의 투명성은 이런 고객들의 충성도를높인다. 뿐만 아니라 기업이 공유하는 지식은 저렴한 제품에 끌린고객에게 실제 어떤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 알려 준다. 빠듯한 예산에도 패스트푸드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패스트패션(fast fashion,
최신 유행을 빠르게 반영한 디자인, 저렴한 가격, 빠른 상품 회전율로 승부하는패션 또는 패션 사업-옮긴이)보다 내구성이 있는 옷을 선호해야 하는이유를 알려 준다.

새 외투는 5년 또는 10년마다 사면 되지만, 밥은 하루에 세 번 먹는다. 지구를 구하는 일은 음식에서 시작되고 음식은 토양에서 시작된다. 흙을 죽인다면 우리에겐 파멸뿐이다. 화학물질 없이 흙을 보살피고 생명의 원천인 흙의 타고난 풍요로움을 존중하는 데에서 우리 지구를 구하는 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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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이제는 휠체어도 없이어슬렁어슬렁 기어서 무대에 오르고 내린다. 몸을 움츠려온긴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꽤 즐거울 뿐아니라, 예상보다 잘할 수도 있었다. K팝 댄스를 추거나 발레무용수들처럼 움직일 수는 없다. 여전히 2000년대 중반 그동아리방, 술자리, 캠퍼스 한가운데로 돌아간다면 나는 장애가 없는 친구들에 비해 효율적으로 어떤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춤추고 춤추는 몸을 가까이서 볼수록, 함께 춤을 출수록 (미약하게나마) 몸이 간직한 어떤 ‘힘‘을 느낀다.

어린 시절을 지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보내는 일은 중요하지만, 나의 불만은 ‘능력‘에만 집중한 결과였다.
춤과 연극 공연을 하고, 워크숍에 참여해 몸을 쓰며 다른 몸을 만나는 일이 늘어갈수록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깃든 오랜힘을 자각한다. 아픈 나를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가 안아주고, 쓰다듬고, 업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들은 내 안에무엇인가를 남겨주었다

.베토벤을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어도, 한문학자가 아니라도 돌보는 몸은 돌봄을 받는 몸에게 자기보다 더 큰 힘을 전해준다. 청소년기를 보낸 특수학교에서,장애가 있는 우리는 원어민 선생님에게 외국어를 배우거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본 적은 없어도 각자의 몸짓과 말하기 방식,삶을 향한 독특하고 드문 태도를 나누었다. 계단과 언덕으로가득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내 휠체어를 밀어준 친구들의 몸은 내 몸의 한곳에 새겨졌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우리의 몸에는 늘 구체적인 타인이 깃든다.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작은 단서로부터, 이를테면 호텔 앞을 산책하다 들은 작은 모깃소리처럼 사소한 생각에서 시작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러므로 첫발을 내딛기로 하고줄 앞에 섰다면 오로지 저 건너편을 향해 걸어가는 일만을 생각한다.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운채,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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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르디니가 말하는 ‘믿음‘을 받아들이려면 이성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성을 희생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가장우수한 재능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는 과르디니 같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은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줏대라고는 없이 그저 강력한 이념이 있는 종교나 정치 공동체에 속하려 드는 충동입니다."

욕망이 담긴 시선은 불순하고 왜곡되어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사물의영혼, 즉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자신이 소유하거나 빌린 숲,
나무를 베고 사냥도 하고 돈을 빌릴 담보로 삼고 싶은 숲을 바라본다면, 숲은 숲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 욕망, 계획, 걱정,
주머니 사정을 해결해 줄 사물로만 보인다. 그럴 때 숲은 그저땔감이며, 젊거나 늙었거나 건강하거나 병든 모습이다. 하지만숲에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숲 깊숙한 곳의 녹색을 바라보면, 그제야 비로소 숲은 숲이고 식물이고 자연이며 아름답다.

욕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관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채우면, 상대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집중하려는 시선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비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더 이상 유용하거나 위험하게, 재미있거나 지루하게, 온화하거나 거칠게, 강하거나약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사람은 본질적인 존재가 되고아름다워지며 독특해진다. 관찰은 연구나 비판이 아니라 애정이다. 영혼의 가장 숭고하고 바람직한 상태, 욕망 없는 사랑인 것이다.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일치하는 것과 일치에서 벗어나는것)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축복받은 다양성이 얼마나 황홀한지 끊임없이 언급하고 싶고, 그 다양성의 근본에는 일치가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다.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두움, 성스러움과 죄악은 아주 잠시만 대립할 뿐 줄곧서로 뒤섞이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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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개정판 아주 사적인, 긴 만남 1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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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람만 만나게 되면흔들리는 그거라도 옷자락에 묻혀와야지,
그 바람 털어낼 때마다 네 말이 들리겠지,
내시를 그렇게 좋아해준, 너는 그러겠지,
형, 나도 잘 알아듣게, 쉽고 좋은 시 많이 써.
이제 너는 죽고 나는 네 죽음을 시쓰고 있구나.
세상사는 일이 도무지 어처구니없구나.
시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도 하염없구나.
-「동생을 위한 조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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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내 안의 뭔가를건드렸기 때문이다. 걸작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받는 작품이 아니어도, 심지어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작품이어도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릴 때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어뵤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내가 몰랐던 감정을 발견할때도 있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사건이 솟아날 때도 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끌고 간 다음 이리저리 뒤흔들다가 아무 데나던져버린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알 수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작보다 글을 쓰게 만드는 범작을 나는 더 좋아한다. 물론 대부분의 걸작은 말을 하고 싶게한다. 영화는 내게 계단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 영화는 내게 목적지가 아니라 환승역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글을 쓴다. 몇 가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주인공의 행동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영화 속에나왔던 장소를 그려보고, 음악을 흥얼거리며, 대사를 읊조린다. 나만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 문장은 어떤 게 좋을까? 방금 본 영화에서 어떤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집에서 OTT로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기쁨을 온전하게 누리고, 슬픔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고, 몰랐던 일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돌아오면서 글을 쓰는 일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때로는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를보고 난 다음 원고를 보내야 할 마감이 없는데도 머릿속으로 첫 문장을 써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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