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주장하자면 영어는 그 본질 자체가 경제성에 있는 언어입니다. 모든 것이 경제성으로 향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할 줄 알지요. 이제 여러분은 제가 왜 그렇게 독일어를 사랑하는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독일어는 경제적인 언어가 아니라 철저히 시적인 언어입니다. 독일어는,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말했듯, 철학과 자연스럽게 닮아 있는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이 점을 대놓고 자랑하지는 않지만 독일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어를 말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친절합니다.
모든 아름다움은 모순입니다. 모순 없이는 아름다움도없습니다. 저는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진실은 이러한 아름다움 안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의 음조 역시 이러한 모순입니다. 저는 제 생각의 음조를 ‘어두운 빛‘ 또는 ‘어두운 영롱함‘ ‘밝은 슬픔‘과 같은 역설적 표현으로 부릅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너무 많이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들은제 책들이 반복보다는 변주곡에 가깝다는 점은 모르고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쓰면서 동시에 하나의 큰융단을 짭니다. 그 융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밀도가 높아지고 색감이 깊어질 것입니다. 짜임의 패턴은 동일하지만 말입니다. 동일한 패턴은 서로 다른 패턴이 뒤섞인 것보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론은 항상 동일한 것을 전제하고 거기에 변주를 허용합니다. ‘같은 것‘과 ‘동일성을 전제한 것‘ 사이를 구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같은 것‘은 변주가 불가능합니다.
제 책들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닮아 있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멜로디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변주곡은 32개의 베이스 노트로 되어 있습니다. 제책들도 이 곡처럼 ‘밑음‘을 갖춘 베이스라인을 따라갑니다. 책에서는 ‘밑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만일 제가 2010년에 출간한 《피로사회》를 전체 곡의 아리아로 삼는다고 한다면, 거기에 30개의 변주용 에세이를 더쓸 것입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아리아는 초반에밑음 베이스를 제공하고 마지막에 다 카포da capo 로작품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강연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주인공은 저한병철이 아니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가 되겠습니다.
사진은 부재함으로써 더욱 빛났습니다. 사진 속그의 어머니는 다섯 살짜리 소녀였고 다섯 살 어머니는겨울 정원에 서 있었습니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겨울 정원의 뒤쪽에 나의 어머니가 서 있다. 얼굴은흐릿하며 희미하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어머니다! 어머니야! 어머니를 찾았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를 분리했습니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입니다. 스투디움은 사진을본 사람이 거기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연구studieren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푼크툼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찔린 것Gestochene‘입니다. 푼크툼은 ‘찌르다‘라는 뜻의라틴어 단어 ‘푼게레pungere‘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관객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슈만의 유모레스크 Humoreske〉에는 마치 피아니스트의귀에는 들리지만 실제로는 연주가 되지는 않는 ‘내면의목소리‘를 위한 음표선이 있습니다. 글에도 그러한 내면의 목소리, 의미를 특정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을 찌르는 내면의 목소리가 존재해야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가 없는 글은 죽은 글입니다. 그런 글은 정보로만 구성된 글입니다. 반면에 내면의 목소리는글이 가지고 있는 푼크툼입니다. 저는 <사라방드>를 좋아하는데, 제 글이 가진 내면의 목소리를 ‘사라방드‘로부르고 싶습니다.
일 년에 한 번만 심장이 뛰는 심해의 물고기. 아무도 아니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는 시대. 오늘날 연필은 멋진 고요를 발산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살아가는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오래된 탁상시계는 메트로놈처럼 시끄럽게 똑딱인다. 구원의 멜로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랜드피아노의 래커는 항상 겨울 방에 약간의 반짝임을, 행복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랜드피아노의 검정색 래커가 나에게 가르쳐주는것이 있다. 어두운 빛이 존재한다는 것. 나는 유리창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좇아 바라본다. 그건 나에게 존재의 기쁨을 준다.
우리는 오늘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산합니다. 이런 자기생산은 시끄럽습니다. 고요해지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고요함은 이름 없음無名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주인도, 내 이름의 주인도 아닙니다. ‘나‘ 는 내 집에 머무는 손님일 뿐입니다. 이 이름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많은 소음을 발생시킵니다. 강해지는 자아는 고요를 파괴합니다. 고요는 내가 뒤로 물러나 이름 없는 채로 있을 때, 내가 완전히 약해질 때, 또는평화롭고 친절해질 때 존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