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면서 바닥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깊디깊은 우물을 상상해 보자고 말한다. 그 우물 속으로 불붙인 종이를 떨어뜨리면 그 불빛이 비추는 우물 안 벽의 모습을 드문드문 한 조각씩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곰브리치는 그 불완전한조각들을 모아 우리가 그려내는 우물 속의 모습,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이야기한다. 종이가 우물 깊이 멀어질수록 불빛은 희미해질 것이고, 우리에게 보이는 우물 속의 풍경은 더욱더 부정확해질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로 시간이란 인류로 하여금 과거를 잊을수밖에 없게 만드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인류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인류는 자연이 인류에게 강요하는 우리 능력의 한계와 끝장을 볼 때까지 싸워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력에 대항하는 ‘기록‘이라는 무기를만들어 냈고, 이 무기 덕분에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진보하고 있다.
그 의미에서 더 적합한 답은 "과학이란 새로운 것을 찾게 해주는 생각의 방식이다"라고 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아직 본 적이없는 것,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인간이 갖고 있는 호기심과시너지를 일으키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는 시공간을 열어나가게 해주는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을 마음에 새겨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과거에는 과학 서사SF에 ‘놀라운amazing‘, ‘기막힌astounding‘ 등의 수식어가 붙었던 것이겠죠. 일상에서는 일어나지않을 법한 이야기들이니까요. 금성에 사는 외계 종족의 대표들이지구로 온다는 이야기 같은.
있습니다. 폴은 우주 최고의 명문가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사막의 행성으로이주하면서 그의 운명은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처럼 한 치 앞을볼 수 없게 됩니다. <듄>은 ‘왜 모자람이 없는 명문가 출신이 그러한 곳에 가는가?‘를 묻고 영웅의 탄생과 그 과정에 겪는 비극을통해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는 서사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사막의 거대한 모레벌레, 즉 SOD입니다. 모래벌레는 지구의 사막에서 관측된 적이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주인공이 생존을위해 맞붙어 이겨내야만 하는 사막이라는 환경에 역동성을 입히는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작품 후반 주인공이 모래벌레를타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사막을 정복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그 기반에는 사막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작가 프랭크 허버트의 과학적 이해가 있었지만, 모레벌레는 SOD로서 작품 속에서 사막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성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영웅의 탄생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훌륭한 과학 서사의 한 가지 특징은이처럼 SOD로 단순히 볼거리를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서사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사막의 거대한 모레벌레, 즉 SoD입니다. 모래벌레는 지구의 사막에서 관측된 적이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주인공이 생존을위해 맞붙어 이겨내야만 하는 사막이라는 환경에 역동성을 입히는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작품 후반 주인공이 모래벌레를타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장면은 주인공이 사막을 정복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그 기반에는 사막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작가 프랭크 허버트의 과학적 이해가 있었지만, 모레벌레는 SOD로서 작품 속에서 사막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성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영웅의 탄생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훌륭한 과학 서사의 한 가지 특징은이처럼 SOD로 단순히 볼거리를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서사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왜 서로 다른 두 계가 접촉할 때 새로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걸까?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몸을 한번 바라보자. 호흡과 신진대사를 하며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몸은 단기적으로 볼 때 아무런 큰 변화를 겪지 않는데, 이렇게 ‘하던 대로 하는‘, ‘있던 대로있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정상상태stationary state‘ (엄밀한 물리학적 정의에서는 ‘영원한 시간‘ 동안 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을 뜻하지만, 현실에서 영원이란 것은 없다)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상태라고 해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정상상태에 있을 때도 몸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자연현상이 벌어진다. 몸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는 열역학의 법칙을 따라 떠돌거나(액체), 진동하고(고체), 세포들은 끊임없이 분화하고 사멸하며, 두뇌는 쉴 새 없이 사고하고 판단을 내린다. 다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눈에 보이는 큰 변화가 단시간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정상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두 계가 만나면 그 경계에서 생기는 ‘섭동perturbation‘(흔듦)이각계의 정상상태에 충격을 가하면서 진정으로 새로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섭동의 결과는 기존 정상상태의 완전한 파괴일 수도 있고, 아주 약간의 변이가 가미된 새로운 정상상태일 수도 있다. 1월 1일이 되면 누군가는 행복한 새해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누군가는 새해는 음력설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일이 매년 반복되는 것을 그러한 ‘새로운 정상상태‘의 한 가지 예로 볼 수 있다.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계‘와 양력이라는 ‘외부계‘가 만나 만들어진 새로운 정상상태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을 나는 예전 한국식 나이 세는 법을 외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면서도 겪었다. ‘나이‘와 ‘age‘는 같아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한국의 ‘세는나이‘는 태어난 해를 1년으로 쳐서 계산하지만, 영어의 ‘age‘는 실제로 살아온 햇수라는 차이를 설명해 줄 때, 헷갈려하는 친구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두 계가 충돌하며 벌어지는•섭동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갈 수 없던 곳들의 다양한 풍경을 직접 관찰하고 그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스타일만을 고집하지도, 변화에 압도당해 길을 잃지도 않았던 ‘경계인‘모네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모네처럼 새로운 화풍을 창시한 다른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을 보아도 젊은 시절에는 당대에유행하는 화풍을 착실히 따라가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서서히 자기만의 독창적 스타일을 확립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기존 질서와 새로운 자극이 만나는 경계에서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복합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존케이지는 이와 비슷한 일을 음악에서 이루어 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두 주자로서 그는 악기들을비표준적인 방법으로 연주하거나 악기 안에 새로운 부품을 끼워넣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433">, 즉 ‘4분 33초‘라는 제목의 곡은 그의 실험의 최고봉으로 알려져있다. 제목처럼 악보상으로 4분 33초 동안 연주하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곡에 인위적으로 연주하는 음은 없다(연주자는 무대에나와서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왜 음악인가?‘ 하는 질문에케이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무런 음도 연주되지 않는 공연장은 고요할 것 같겠지만, 사람의 신경계가 만드는 고주파음과순환하는 피가 만드는 저주파음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기도 하고,그 공간은 관객들의 숨소리, 기침 소리, 부스럭거림, 바람에 창틀이 흔들리는 소리,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등으로 가득 차
"세상은 우리의 감각, 지각, 그리고 기억이 만들어 낸 구성체다. 세상이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편리한 입장이다. 그러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별개의 일이다. 세상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두뇌라는, 세상의일부인 특별한 한 물체 안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과정으로 인해 비로소가능해진다."
1. 이런 것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 사람들이 잘못됐다. 2. 이런 것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됐다. ‘이 사람 편하게 산다‘, ‘우리 애도 그리겠다‘, ‘너무 멀리 간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1번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앤디워홀이 서명한 캠벨수프 통조림을 보고 내가 보였던 반응도 같은종류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뒤 지인과 현대미술ㅓ가치를 주제로 나눈 대화 끝에 나의 인식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늦은 시간까지 술과 음식을 즐기며예술, 과학,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에 대해 중구난방 이야기하던그 자리에서 나온 결론은 예술의 가치를 정해진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힘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은 내가 나의가치관대로만, 나의 방식대로만 예술을 이해하려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캠벨수프 통조림에 서명한 앤디 워홀이나 기성품인 소변기를엎어버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창작‘이 예술인까닭은 그것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어려운 물리적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즉,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다른 배관들과 맞추어 튼튼하게 설치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킬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었던 소변기를그러한 제약에서 해방시켜 버리거나, 통조림 광고를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전시했다가 다시 실물로 만든 엉뚱하지만 창의적인 행위가 그것들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쉴새 없이 ‘가치‘를 만들고 찾아내는 존재들이다.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만큼 그 일이 내게도 조금 더 재미가 있었으면 싶어서 교장 선생님들의 눈길을 모을 만한 방법이 무엇일까 곰곰이 궁리해 보았다. 그러다 나의 자유분방한 평소 모습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곱슬머리 장발을 묶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머리에 물만 들이면 완벽하지 않을까 싶었다. 교장 선생님들을 만나러 가니까염색을 해달라는 말에 스타일리스트 선생님은 적지 않게 걱정했지만, 나는그분들과 내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고 난생처음 머리를물들였다. 파랗게. 그러고 나서 ‘바이크에서 내린 염색 머리‘가 알고 보니 강연하러 온 교수라는 반전에 교장 선생님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며칠동안 혼자 키득거렸다
Jobs (1955~2011)입니다. "창의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잡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창의란 그저 이미 있는 것들을 연결해 내는일이다. 그래서 창의적인 일을 해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비결을 물어보면 살짝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존재하는 무언가를 남들보다 먼저 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데이비드 봄처럼 스티브 잡스도 창의성을 ‘남들과 다른 연결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말한것입니다.
곧이어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일침이 날아왔다. "언어 AI가 처음 나왔을 때는 우주와 자연과 철학을 논할 수 있다면서 열광하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표준화된 자격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열광하고, 이제는 컴퓨터 문서를 잘 만든다고 열광하네. 그런데 이렇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들이더라."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논하는 능력을 고차원적인 언어 구사력으로 여기는 상식에 역행해, 챗GPT에 대한 평가는성능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철학을 논할 수 있는 대화 상대‘에서 ‘문서 작성 도우미‘로 달라진 것이다. 앞장서서 이 신기술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만든 ‘어떤 사람들‘, 즉 호사가들에게는 이 문제가보이지 않는 걸까?
"컴퓨터를 키보드 말고 마우스로 깨우면 돼."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다니! 단 몇글자로 AI가 내놓은 기나긴 8000자를 이겨낸 인간 ‘경험‘의 힘이었다. 다시 교육자의 마음이 되어 이 이야기를 해주자 챗GPT는 또 "그럴 수 있습니다. 마우스로 컴퓨터를 깨우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라면서 불필요한 말을 장황하게 시작한다. 문제의 해결책을 아는 사람과 그 해결책을 쓰는(컴퓨터를 마우스로 깨우는) 사람이같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추론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확실히 대화가 아니다. 남들은 이미 이런 의미 없는 반복이 싫어서 챗GPT와놀기를 그만뒀는데, 나 혼자만 계속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AI가 발달한다 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손가락 끝에 살갗이 닿는기분 좋은 감촉을 아는 진짜 인간들과 놀고 싶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가 흔히 사과로 묘사되고, 뉴턴이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전해지듯이 사과는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지혜와 각성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이것을 몰랐을 리 없는 튜링이 마지막 행위로 사과를 베어 먹은 것은 지식의 탐구를 못 하게 강제한 세상을 향한 과학자로서의 항의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에게 ‘튜링상‘이 수여되고, 수많은 사람이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로고가 새겨진 애플의 스마트폰과 일상의 매 순간을 함께하고 있고, 영국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50파운드 지폐에도 튜링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니 그가 뒤늦게나마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할 수 있을까?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에 나온 다음의 경구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경외감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도랑에 빠져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We are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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