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이제는 휠체어도 없이어슬렁어슬렁 기어서 무대에 오르고 내린다. 몸을 움츠려온긴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꽤 즐거울 뿐아니라, 예상보다 잘할 수도 있었다. K팝 댄스를 추거나 발레무용수들처럼 움직일 수는 없다. 여전히 2000년대 중반 그동아리방, 술자리, 캠퍼스 한가운데로 돌아간다면 나는 장애가 없는 친구들에 비해 효율적으로 어떤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춤추고 춤추는 몸을 가까이서 볼수록, 함께 춤을 출수록 (미약하게나마) 몸이 간직한 어떤 ‘힘‘을 느낀다.

어린 시절을 지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보내는 일은 중요하지만, 나의 불만은 ‘능력‘에만 집중한 결과였다.
춤과 연극 공연을 하고, 워크숍에 참여해 몸을 쓰며 다른 몸을 만나는 일이 늘어갈수록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깃든 오랜힘을 자각한다. 아픈 나를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가 안아주고, 쓰다듬고, 업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들은 내 안에무엇인가를 남겨주었다

.베토벤을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어도, 한문학자가 아니라도 돌보는 몸은 돌봄을 받는 몸에게 자기보다 더 큰 힘을 전해준다. 청소년기를 보낸 특수학교에서,장애가 있는 우리는 원어민 선생님에게 외국어를 배우거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본 적은 없어도 각자의 몸짓과 말하기 방식,삶을 향한 독특하고 드문 태도를 나누었다. 계단과 언덕으로가득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내 휠체어를 밀어준 친구들의 몸은 내 몸의 한곳에 새겨졌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우리의 몸에는 늘 구체적인 타인이 깃든다.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작은 단서로부터, 이를테면 호텔 앞을 산책하다 들은 작은 모깃소리처럼 사소한 생각에서 시작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러므로 첫발을 내딛기로 하고줄 앞에 섰다면 오로지 저 건너편을 향해 걸어가는 일만을 생각한다.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운채,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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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르디니가 말하는 ‘믿음‘을 받아들이려면 이성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성을 희생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가장우수한 재능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는 과르디니 같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은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줏대라고는 없이 그저 강력한 이념이 있는 종교나 정치 공동체에 속하려 드는 충동입니다."

욕망이 담긴 시선은 불순하고 왜곡되어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사물의영혼, 즉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자신이 소유하거나 빌린 숲,
나무를 베고 사냥도 하고 돈을 빌릴 담보로 삼고 싶은 숲을 바라본다면, 숲은 숲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 욕망, 계획, 걱정,
주머니 사정을 해결해 줄 사물로만 보인다. 그럴 때 숲은 그저땔감이며, 젊거나 늙었거나 건강하거나 병든 모습이다. 하지만숲에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숲 깊숙한 곳의 녹색을 바라보면, 그제야 비로소 숲은 숲이고 식물이고 자연이며 아름답다.

욕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관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채우면, 상대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집중하려는 시선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비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더 이상 유용하거나 위험하게, 재미있거나 지루하게, 온화하거나 거칠게, 강하거나약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사람은 본질적인 존재가 되고아름다워지며 독특해진다. 관찰은 연구나 비판이 아니라 애정이다. 영혼의 가장 숭고하고 바람직한 상태, 욕망 없는 사랑인 것이다.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일치하는 것과 일치에서 벗어나는것)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축복받은 다양성이 얼마나 황홀한지 끊임없이 언급하고 싶고, 그 다양성의 근본에는 일치가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다.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두움, 성스러움과 죄악은 아주 잠시만 대립할 뿐 줄곧서로 뒤섞이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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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개정판 아주 사적인, 긴 만남 1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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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람만 만나게 되면흔들리는 그거라도 옷자락에 묻혀와야지,
그 바람 털어낼 때마다 네 말이 들리겠지,
내시를 그렇게 좋아해준, 너는 그러겠지,
형, 나도 잘 알아듣게, 쉽고 좋은 시 많이 써.
이제 너는 죽고 나는 네 죽음을 시쓰고 있구나.
세상사는 일이 도무지 어처구니없구나.
시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도 하염없구나.
-「동생을 위한 조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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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내 안의 뭔가를건드렸기 때문이다. 걸작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받는 작품이 아니어도, 심지어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작품이어도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릴 때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어뵤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내가 몰랐던 감정을 발견할때도 있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사건이 솟아날 때도 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끌고 간 다음 이리저리 뒤흔들다가 아무 데나던져버린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알 수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작보다 글을 쓰게 만드는 범작을 나는 더 좋아한다. 물론 대부분의 걸작은 말을 하고 싶게한다. 영화는 내게 계단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 영화는 내게 목적지가 아니라 환승역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글을 쓴다. 몇 가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주인공의 행동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영화 속에나왔던 장소를 그려보고, 음악을 흥얼거리며, 대사를 읊조린다. 나만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 문장은 어떤 게 좋을까? 방금 본 영화에서 어떤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집에서 OTT로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기쁨을 온전하게 누리고, 슬픔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고, 몰랐던 일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돌아오면서 글을 쓰는 일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때로는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를보고 난 다음 원고를 보내야 할 마감이 없는데도 머릿속으로 첫 문장을 써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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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관습과 멀어진 지 오래지만 여행자로 살면서도 나는여하튼 기도하는 삶이라는 중심축에 계속 의지했다. 신의 존재 앞에 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을 나는 넓은 의미의 기도로 받아들였다. 그 정수 안에 깃들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이 기도였다.

성배 찾기는 또한 이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집중하고 몰입함으로써 통찰과 환희와 교감에 마음을 연 상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배 찾기는 오로지 하나에 굳게 몰두하는경건한 태도로, 추구해나갈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장소에 도착해 의식에 다다르고 다시 어떤 이해로 나아가면, 거기서부터 세상이 당신에게 열리고 당신은 세상에게 열린다. 아마도 그렇게, 마침내 당신은 관계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거듭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주의attention‘다. 이 단어는 참석, 수행, 시중을 뜻하는 ‘어텐던스attendance‘와 뿌리가 같고 ‘기다리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탕드르attendre‘에 뿌리를두고 있다. 기다리기, 참석하기, 주의 집중하기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똑같은 행위다

이해하기를 기다리기, 알아가기를 기다리기, 연결이 형성될 때까지 머무르기, 알아차림으로 시작되는마음 내주기. 어쩌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말은 "신의 존재 앞에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의는 배리가 타인들을 대하며 탄복하는 능력이고 독자들에게 강권하는 실천이며 스스로 체현해 보이는 소통의 방식이다.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초심자가 자아 외부의 더 큰 세계, 지혜 자체가 깃든 경관을발견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내 기억으로는집 밖에서 주의를 기울인 날 중 어느 하루도 내가 모르는 무엇,
새로운 무엇이 내 앞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밑을 내려다보니 그가 남긴 온전한 발자국이 보였고, 그 자국안에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그려진 작은 질그릇 유물 조각이드러나 있었다. 생긴지 1분도 되지 않은 발자국과 500년 동안 그자리에 있었을 파편에 두 종류의 과거가 압축되면서 눈부신 조우가 생겨난 것이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라는 말이 일순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던 것은, 오래전 내가 감히 무엇을 목표로 글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나에게 넌지시 일러준것이 바로 이 작가의 글이었던 까닭이다.( 리베카 솔닛)

내게는 이제 나의 길이 있지만, 그가 그 길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글에서 기대하는 것이 늘 그런 역할이니, 어쩌면나는 그가 그걸 해주었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가 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방향으로 난 발자국들이고, 하나하나에발자국보다 더 오래된 물질이 깊이 파묻혀 있다. 이 발자국이닿는 데까지만 따라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스스로 땅과 언어의 관계를 더듬고 의미를 탐색해가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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