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관습과 멀어진 지 오래지만 여행자로 살면서도 나는여하튼 기도하는 삶이라는 중심축에 계속 의지했다. 신의 존재 앞에 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을 나는 넓은 의미의 기도로 받아들였다. 그 정수 안에 깃들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이 기도였다.
성배 찾기는 또한 이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집중하고 몰입함으로써 통찰과 환희와 교감에 마음을 연 상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배 찾기는 오로지 하나에 굳게 몰두하는경건한 태도로, 추구해나갈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장소에 도착해 의식에 다다르고 다시 어떤 이해로 나아가면, 거기서부터 세상이 당신에게 열리고 당신은 세상에게 열린다. 아마도 그렇게, 마침내 당신은 관계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거듭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주의attention‘다. 이 단어는 참석, 수행, 시중을 뜻하는 ‘어텐던스attendance‘와 뿌리가 같고 ‘기다리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탕드르attendre‘에 뿌리를두고 있다. 기다리기, 참석하기, 주의 집중하기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똑같은 행위다
이해하기를 기다리기, 알아가기를 기다리기, 연결이 형성될 때까지 머무르기, 알아차림으로 시작되는마음 내주기. 어쩌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말은 "신의 존재 앞에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의는 배리가 타인들을 대하며 탄복하는 능력이고 독자들에게 강권하는 실천이며 스스로 체현해 보이는 소통의 방식이다.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초심자가 자아 외부의 더 큰 세계, 지혜 자체가 깃든 경관을발견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내 기억으로는집 밖에서 주의를 기울인 날 중 어느 하루도 내가 모르는 무엇, 새로운 무엇이 내 앞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밑을 내려다보니 그가 남긴 온전한 발자국이 보였고, 그 자국안에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그려진 작은 질그릇 유물 조각이드러나 있었다. 생긴지 1분도 되지 않은 발자국과 500년 동안 그자리에 있었을 파편에 두 종류의 과거가 압축되면서 눈부신 조우가 생겨난 것이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라는 말이 일순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던 것은, 오래전 내가 감히 무엇을 목표로 글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나에게 넌지시 일러준것이 바로 이 작가의 글이었던 까닭이다.( 리베카 솔닛)
내게는 이제 나의 길이 있지만, 그가 그 길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글에서 기대하는 것이 늘 그런 역할이니, 어쩌면나는 그가 그걸 해주었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가 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방향으로 난 발자국들이고, 하나하나에발자국보다 더 오래된 물질이 깊이 파묻혀 있다. 이 발자국이닿는 데까지만 따라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스스로 땅과 언어의 관계를 더듬고 의미를 탐색해가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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