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텔하임은 이 같은 퇴행적 행동이 일어난 이유를 ‘슈필라움’의 부재로 설명한다. 베텔하임의 용어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정을 위한 슈필라움Entscheidungsspielraum’의 부재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수용소의 삶이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때 ‘슈필라움’은 ‘심리적 여유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여유 공간’은 오히려 사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뜻한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수용소 생활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공간이 박탈된 유대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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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연은 고도의 자기 통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 번지점프에 도전하고,가장 얕은 물에 빠져 죽기를 직접 선택하는 인물. 그러나 그런 그녀도극복할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 되는 일 역시 두렵기에 결행하여 극복하고 싶지만 섣불리 할 수 없다. 장애인이 된 후에 자살하면 사람들이 ‘장애를 비관하여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성찰성, 즉 고도의 자기통제와 자기 연출에 탁월한 인물이라도 ‘장애인 되기를 연출할 수는 없다. 목숨을 끊을 수는 있지만, 장애인이 되는 삶은 단행할 수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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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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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인 나의 두 지인(한 사람은 장애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
한 사람은 없다)은결혼한 사이인데, 어느 날 그들이 함께 택시를 타자 기사가 말해 "세상에 장애인이랑 결혼하신 거예요?
사모님이 진짜진짜 대단하시네. 내 택시 30년 몰면서 장애인이랑 결혼한 여자는 또 처음 보네. 어머니, 아버지도 아시나?
대단하네, 대단해. 택시비 안 받을게요! 아내가 도망가기 전에 빨리 애 낳으세요!"두 사람은 그대로 택시에서 내렸다. 어떻게 더 노련해지란 말인가. 노련함의 가장 고차원적 단계는 바로 이 모든 모욕적 대우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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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 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은희경 ‘새의선물’)

수치스러운 상황을 맞았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한 나머지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행동한다면 수치심은 더 커질뿐이다. 그러니 ‘바라보는 나를 안전한 곳에 모셔다 두고 ‘보여지는 나‘를 지켜보며 냉정을 찾는 것이다. 자아를 둘로 분리하면 ‘보여지는 나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행동하게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서 나의 자존감을 보호하는 전략을 취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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