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은행나무, 2011)을 다시 읽는 버릇이 있다주체할 수없는 열정으로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에 대한 사랑을 삶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며, 우리는 길을 잃은 뒤에야, 세상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는 소로의 속삭임이 다시금
가슴을 아프게 두드린다.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한의 조건만 갖춘 강인한 스파르타인처럼 살고 싶다는 소로의 결심은 매번 싱그러운 울림으로 다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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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성적인 본래 모습을 숨기지 않을 때 가장 편안함을느낀다. 그렇게 솔직한 내 모습을 표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뜻밖의 외향성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도완전히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지킬과 하이드처럼 한 인격 내부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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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라고 따끔하게 지적하는 상징계의 회초리가 있기에, 우리는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고 뼈아픈 감정노동도 버텨낸다. 달콤한 동화적 환상에 만족하는 상상계를 넘어, 현실의 냉혹함을 이겨내는 철든 어른들의 상징계를 넘어, 마침내 인생을 통째로 올인하는 최고의모험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실재계의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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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계는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는 어른들의 세계다.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더욱 성숙한 사랑은 시작된다.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기 위해 감수하는 고통,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견디는 것이 바로 상징계의 사랑이다.

실재계는 인간의 무의식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다. 안데르센 원작 <인어공주>에서 왕자가 다른 여인과 결혼해버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게 된 인어공주가 왕자를 죽이면 자신은 살 수 있음에도, 왕자를 살려내고 자신은 물거품이 되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계의 감동이다.
물거품이 돼버린 인어공주는 더 이상 이 세상, 상징계에 속할 수 없지만,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생이 끝나도 계속되는 진정한 사랑의 상징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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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주관적으로는 어떻게든 반드시 그걸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 느낌을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라캉의 실재계임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공포의 문턱을 넘어서는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유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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