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작 돈을 내고 살 만한 값어치가 있는 바구니를 만들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구니가 가치 있는 물건이라 느끼게끔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물건을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결이 섬세한 바구니 종류를 하나 엮어 두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바구니 엮는 일이 보람되다고 생각했기에, 남들이 살 가치가 있을 만한 물건으로 만드는 일을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바구니 파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적이라 간주하며 칭송하는 삶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오직 한 종류의 삶만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왜 시에 대해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나는 지금 시를 특별대우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시가 평범해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드물지만 그런 자리가 마련될 때가 있다. 본격적이지 않아도 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당당하진 않아도 자신이 쓰고 외운 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공유할 때가, 전부는 아니라도 비밀의 일부를 서로에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가 직업이기에 앞서 하나의 독특한 언어활동, 언어적 쓸모와 경험을 확장하는 소통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다른 모습, 조금은 경이롭고 매혹적이고 근사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시인은 없어져도 시 쓰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안에 우리를 넘어선 존재가 숨어 있는 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요새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서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서러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원통하고 슬프다’라는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이 정의는 부족하다. 나는 서러움을 ‘상실감에 머물면서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실을 겪으며 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른 세태 변화 속에서, 사건들의 범람 속에서 숱한 사물과 사람을 상실하며 사는 이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도 상실감은 우리의 공통 감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실을 상실했다. 나는 백석과 파베세가 부럽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린 것들과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상상과 사유가 있다. 그들에게는 서러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서러움이 없다.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고개 한번 돌리면 모든 것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 미디어를 접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끼다가도 바로 다음을 클릭하면 그런 감정은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 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