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 하이제라는 여류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편지를 아직도 인간들 사이의 가장 멋지고 풍으로운 교제 수단으로 생각하는 구시대풍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 편지 쓰기는 단순한 교제 수단 이상이 의미를 지녔다. 편지 쓰기는 그에게 그 자신의 사고의 편린들을 상대방에게 토로하는 마당이 되어 주었다. 특히 편지라는 표현 수단은 외적 발산과 행동보다는 내면성에 경도된 그의 소질및 세계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독한 한 개인인 그에게 인간적인 소통을 가능케 해주었으며 시적 창조가침묵과 고갈의 궁지에 빠졌을 때 창작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연습의 장이 되어 주었다. 그런 까닭에 작품을 쓰지 못할수록 그는편지 쓰는 일에 매달리곤 하였다.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위로하려 애쓰는 이 사람이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 역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 니까.

그에게 있어서 참된 것은 쉬운 것 혹은 가벼운 것에 매달리지 않고 어려운 것 혹은 무거운 것을 향하는 데 있으며 이것은 고독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된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하는 사랑입니다." 그 결과 릴케가 내세우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 의 개념은 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나아가서 고독과 거의동의어가 된다. 또한 고독을 강조하는 그의 생각의 밑바탕에는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식이 숨어 있다. 당시 여성이 사회적으로 당했던 차별에 미루어 그의 사고 가사뭇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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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소비할 때 큰 죄책감을 낀다고 고백합니다.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이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욕망을위해서 끝없이 소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생태 교육이 매우 중요시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의식, 생태적 감수성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그레타 툰베리가 불러일으킨 청소년의 ‘생태 반란은 모두 이런철저한 생태 교육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과연 한국에서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청소년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의 성교육은 우리의 이러한 성교육과 전혀 다릅니다. 성의 영역도 68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지요. 68혁명은 일종의 성 혁명이었으니까요. 독일은 성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갖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 이므로 성과 관련하여 충분한 책임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속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필요합니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습니다. 왜한국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취약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아도르노의 에세이에서 본 이 말은 저에게 개안의 충격을 주었지요.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것이니까요. 저는 이 말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왜 취약한지를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요?

자아, 에고가 형성되는 시기는 곧 리비도가 발현되는 시기입니다. 바로 이때 인간은 처음으로 리비도와 슈퍼에고 사이에서 분열된 에고를 체험하게 되지요. 리비도는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인간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런 생물학적 충동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문제이지요. 성에 대해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윤리적으로 공격하고, 이른바 ‘악마화(dimonisieren)‘합니다. 성적 본능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윤리적으로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이지요.
이러한 성적 본능을 나쁜 것이라고 공격한다고 리비도가 사라지나요? 아닙니다.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하면 할수록 리비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면,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하는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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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쾰른의 한 지하실 창고있던 기도문에 이 곡을 붙였습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이있던 곳으로, 이 기도문은 곧 많은 이에게 알려졌고 비극의현장인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도 발견됩니다. 두려움과 절망속에서도 신앙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은 이렇게 기도했겠지요.

나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믿습니다.
나는사랑이 주변에 없는 듯 느껴져도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침묵하신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습니다.

아르네센의 곡을 세인트올라프대학 합창단의 목소리로 들으며 슬픔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의 침묵‘ 속에서도 그들이 잃지 않았던 신앙과 희망을 경외의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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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판 교육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 삼기 때문에 학생에 대한 평가 방식도 우리와는 상이합니다. 우리처럼 사지선다 오지선다 하는 선다형 문제는 전혀 없고, 단수한 지식을 묻은 ‘단답형‘ 문제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식의 평가방식 자체가 반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보다는 사기‘에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러니까 글자를깨우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교육을 받습니다. 국어 교과서를 예로 들었지만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쓴 작가가 어떤 시대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의도로 그런 작품을 썼는지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 즉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이에 대해 자신의비판적 견해를 표명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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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번이으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청소년들이 굉장히 비판 의식이 강합니다.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배후를 의심해라.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성숙한 민주시민이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저는 독일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제1장의 제목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는가(Gibt es eine richtige Interpretation)?‘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 우선 옳은 해석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미 해석학의 대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문학이라는 다의성의 세계에 초대장을 건네는 것이지요.
「님의 침묵」에서 님이 연인인지, 조국인지 고르라는 우리의 해석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문학작품의 해석을 마치 작가의 의도를 찾는 보물찾기로 생각하는 우리 교육과는 아주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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