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은 무거운 짐을 상징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내게 지워진 짐을 내려놓으려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짐을 찾아 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지고 있는 무게야말로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비밀이라는것을 느끼게 합니다. 자유 역시 그 무게가 있는 곳에서 숨 쉴수 있다는 역설을 엿보게도 합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중력이라는 상징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짐과 무게와 책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성인이란 결국 사랑의 무게를 열정과 자유로써 기쁘게 지고 간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두려움 없이 선택한 ‘사랑의 중력‘은때로는 순교에 이를 때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디모 4.7)’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은총을 통한 하강의 법칙이란 사랑의 질서 안에 자신을 온전히 던짐으로써 낮아지는 삶‘을 뜻한다고 알게 됩니다. 이러한 전적인 투신 속에서 육신의 조건을 상징하던 중력은 은총속에 변용되어,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따른 움직임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그 아름다운 경구의 참뜻을 만나게 됩니다.
Amor Meus Pondus Meum.

스스로를 낮추기, 그것은 정신의 중력에 있어서는 올라가기이다. 정신의 중력은 우리를 높은 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력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유의 명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서 배우듯, 은총과 함께 상승하여 탈속하려는 갈망과 중력에 몸을 맡겨 나의 욕망과 함께 하강하려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운동을 넘어서서, 사랑의 중력과 함께 자신을 비우고 하강하는 삶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일상 안에서 우리가 도피가 아닌 진정한 초월의 길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삶의 중력을 사랑의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지는 여정을걸어보도록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더듬어 간다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감지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묻게 될 때도있습니다. 내게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는 것은이제 더 확인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문득,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미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들이, 내 손이 어루만질 얼굴들이 나의 인생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상한 체험도 아니고떠들썩하게 소문내거나 정색을 하고 심각하게 만들사건들도 아닙니다. 그냥 눈이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오듯, 어린아이처럼 눈밭에서 장난을 하듯, 인생의 가장 작은 모서리에서부터 회의와 체념이 희망에 물들어가고 생기로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그런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 기억과 함께 ‘지금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독자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신비로운 손에, 독자분들의 손이어루만지는 신비스러운 얼굴에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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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
최대환 지음 / 파람북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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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 우리의 비참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은 오락이다.
한데, 그것은 우리의 비참 중에서 가장 큰 비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 자신을 서서히 잃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락이 없으면 권태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 권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더 강력한 방법을 찾도록 부추길 것이다. 그런데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죽음에 이르게 한다. (팡세)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좋은 약이 됩니다. 우리에게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작별의 자리에서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되게 철학을 수행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자, 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씨앗 안에서 자란다는 것을 고대 철학의 현인들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스승들이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말기 이래 근대와 현대까지 많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영적 동반자가 되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준주성범』에서도다음과 같이 ‘죽음의 연습‘을 통해 영적 회심과 성장에 이르라는 권고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너의 삶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네가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오늘 살아 있으나 내일 죽으며, 곧 잊힌다. 오! 사람의 마음은 어찌 그리아둔하고 완고한가! 지금 순간만 생각하고 장래 일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모든 행동과 생각을 함에 있어 바로 오늘 죽을 것처럼 하고 있어라."
- 23장 죽음에 대한 성찰 중 3항

하지만 우리는 『준주성범』에서 삶의 무상함과 죽음 후에 올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진지함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참 기쁨을느끼라는 권면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때에 찾고자 하는 삶의 모습대로 지금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며 슬기로운가!"
- 23장 죽음에 대한 성찰 중 4항-

지금 주어진 삶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과 함께,
삶의 마지막에도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살아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의 긍정은 죽음을 생각하고 연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무기력과 탈진의 시대라 일컫습니다. 이런 시대에 각 개인에게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바꿀 거창한 계기를 헛되이 기다리거나 자괴감만 남길 자극적 쾌락에 탐닉하는 대신 자신의 일상을 감사와 경이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더나아가 그런 눈을 가진 이들만이 평범한 일상이 품은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하는 한 우화가 이러한 삶의태도를 잘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한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두 제자를 하산시켜 세상으로 보내며, 만일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인생은 복될 것이라 이릅니다. 하산 후 서로 다른 길을 가다.
가 한참이 지나 두 제자가 다시 만났을 때, 한 제자는 세상의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씁쓸해합니다. 여기에 다른 제자가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존재하는 것이지."

구약성서 중 지혜문학에 속하는 집회서를 보면 후대인의 시각에서 다윗의 생애를 평가하고 그의 삶을 신앙의 관점에서묵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집회 47). 그중에 아름답고 감명 깊은 구절이 있는데, 다윗은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 8)‘라는 대목입니다. 이 한 구절에 다윗이 겪은 수많은 비극과 고통 그리고 스스로 범한 큰 죄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지요.
죄를 고백하고 수치심에 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처분을 맡기는 가난한 모습을 보인 것은 참으로 온전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해질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신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윗이 삶의 여정에서겪은 수많은 인생의 사건을 관통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사르트르의 이 명제는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단순한 명제로, ‘인간은 역사와 삶 속에 존재하며, 상상하고 변화할 자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 본질중심의 사고는 실패의 미덕과 모순된다. 만약 실패로 우리가 변화한다면, 실패를 통해 우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패 자체로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된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실패를 인정하면 앞으로 펼쳐질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페팽에 의하면 실존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삶을 가능성으로이해하는 것이며, 한 방향으로만 성공하려 애쓰거나 그 성공을 보존하며 일체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신, 실패를 가능성의 장이 열리는 사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실패는 더 풍부한 실존적 삶의 조건이 되겠지요.

위대한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의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인용합니다.
한 음이 연주되었을 때 그 음이 정확한 음인지 틀린 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음 음이 연주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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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자신만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면서 결코 특정 이념이나 타자의 일방적인 억압 에 끌려 들어가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개성이 부족한 집단 주의에 대항하면서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는 개념 장치를 제시했다. 거리를 두는 파토스’란 쉽게 이야기해서시시한 유행이나 좇는 집단과 대중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라는 의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강한 시대의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과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극단적인 것 자체가 희미해져결국은 유사하게 되어버린다. (우상의 황혼)

니체에 의하면, ‘좋음’ 이란 누군가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만 한다. 이런 사람을 니체는 고귀한 인간이라 불렀다

저것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이것이라고 하는 데서 생긴 것이고,
이것이라고 하는 것도 저것이라고 하는 나와 대립해서 생긴것이다. 즉 저것과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나란히 아울러생긴 것이다. 보는 방식을 바꾸어 보면, 생生’과 아울러 사死’있다. 가능함과 아울러 ‘불가능함‘이 있다. 옳음‘에 의해그름이 존재하며, 그름에 의해 ‘옳음이 존재한다.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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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장례미사 때 읽었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기도시 이끄소서, 온유한 빛Lead kindly light」의 첫 구절을 오늘 밤에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끄소서, 온유한 빛이여, 온 데가 어둠 속이오니 / 그대나를 인도하소서. 밤은 어둡고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 나를 인도하소서. / 내 발을 지켜주소서. 먼 경치를 보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오니 / 한 발치면 족하나이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팡세』에 나오느 ‘숨은 신Deus Absconditus‘의 개념을 떠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파스칼은 구원과 은총이 우리의 삶 안에 실재하지만 누구에게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숨은 신‘이라는역설적 방식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이라고설명합니다. 파스칼은 ‘믿고자 하는 이는 이에 충분한 빛을볼 것이며, 믿지 않으려는 이 역시 그에 충분한 어둠을 보게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빛을 보는가 어둠을 보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파스칼의통찰 속에 현상학, 곧 나타남‘을 보여지는 대로 바라보는 인식과 실존의 방식이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의 손은 / 몸 가눌 곳으로 향하고 그리고 발견한다네.. /
그리고 발견한다네. / 오직 장미 한 송이가 지지대인 것을
(힐데 도민)

소망을 기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단련되고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될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가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덕은 하느님의선물입니다. 교회가 희망을 사랑과 믿음과 함께 ‘신학의 덕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희망을 담을 만할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조형‘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재난의 시대에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닌 진정한희망을 믿는 개인들이 함께 희망을 조형해가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구원의 희망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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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양승권 지음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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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가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바킷살이 바퀴 가운데로모이는 곳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집에는 창문이있어야 빛을 받아들일 수 있고 환기시킬 수 있다. 머리가 복잡한사람들은 방 안의 가구를 최소한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이는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누군가가 나에 대해 비판을 할 때 곧바로 반응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배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욕에 매번 반응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잠시 멈추거나 비우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 역설적인 농담이지만 "밥을 굶으면 기분이 좋아 죽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니체의 능동적 망각‘이나 장자의 ‘잡념을 버리고 무아의경지에 들어선 상태는 명상과 비슷하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제2장 자기실현’람들은 생기를 되찾고자 정기적으로 은둔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무의식의 자원을 활용한다. 명상은 사회적 번잡함을 약화시키고 내 속에 잠재해 있는 순수한 생명력을 불러올 기회다.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잘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전진 밖에 모르는삶은 사람을 웃지 못하게 한다. ‘물러남‘은 다시금 생기를 되찾기 위한 ‘치유‘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잠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의 깊은 내면에 침잠하면 새로운 경험이 정신속에 들어와 현실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균형을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퇴화‘는 단지 여러 가지 문제로부터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새로운 힘을찾아낼 기회를 가지라는 뜻이다. 이 새로운 힘은 현실을 발전적으로 재구성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세속적인 번잡함을 비워내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 고요하게 침잠하면, 현실은 나의 참모습을 북돋아 주는 방향으로 재조정된다.

이란에서는화려한 무늬로 촘촘하게 짠 카펫에 일부러 흠을 하나 남겨놓는다고 한다. 이것을 ‘페르시아의 흠‘ 이라고 부른다. 또한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완벽한 구슬들 틈에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고 한다. 전혀 흠결이 없는 목걸이에는 영혼이 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돌담을 살펴보면, 돌과 돌 사이를 촘촘히 메우지 않고 일부러 엉성하게 빈틈을 둔채 그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게 한다. 겉으로는 금방 무너질 것같지만 이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풍연심 風憐心’이라는 말이 있다.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라는 뜻으로, 『장자』의 「추수」에 나오는 우화다. 옛날 전설적인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동물이 있었다. 이 동물은 발리 100여 개나 되는 지네를 매우 부러워했다. 그 지네에게도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이었다.
발이 없어도 잘 돌아다니는 뱀이 부러웠던 것이다. 반면 뱀은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을 부러워했다. 그저 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에게도부러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눈이었다. 그런데 이런 눈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 채, 그저 자신에겐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타인을 부러워한다.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부러움’에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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