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장례미사 때 읽었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기도시 이끄소서, 온유한 빛Lead kindly light」의 첫 구절을 오늘 밤에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끄소서, 온유한 빛이여, 온 데가 어둠 속이오니 / 그대나를 인도하소서. 밤은 어둡고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 나를 인도하소서. / 내 발을 지켜주소서. 먼 경치를 보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오니 / 한 발치면 족하나이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팡세』에 나오느 ‘숨은 신Deus Absconditus‘의 개념을 떠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파스칼은 구원과 은총이 우리의 삶 안에 실재하지만 누구에게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숨은 신‘이라는역설적 방식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이라고설명합니다. 파스칼은 ‘믿고자 하는 이는 이에 충분한 빛을볼 것이며, 믿지 않으려는 이 역시 그에 충분한 어둠을 보게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빛을 보는가 어둠을 보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파스칼의통찰 속에 현상학, 곧 나타남‘을 보여지는 대로 바라보는 인식과 실존의 방식이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의 손은 / 몸 가눌 곳으로 향하고 그리고 발견한다네.. / 그리고 발견한다네. / 오직 장미 한 송이가 지지대인 것을 (힐데 도민)
소망을 기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단련되고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될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가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덕은 하느님의선물입니다. 교회가 희망을 사랑과 믿음과 함께 ‘신학의 덕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희망을 담을 만할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조형‘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재난의 시대에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닌 진정한희망을 믿는 개인들이 함께 희망을 조형해가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구원의 희망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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