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재회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치유란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활기를 되찾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능동적 여가 활동은 그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은 녹슨다. 행복을 미루는 것이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애초에 생각했던 어떤 조건이나 기준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행복을 미루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오늘을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과 놀이 중에 노는 것부터 한다면 그 사람은 철이 없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우화에서 개미는 정상적 인간이고 베짱이는 비정상적 인간이다. 물론언제 어디서든 주류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기꺼이 베짱이로 살아갈 것을 선택한다. 골수 베짱이들은 당장 굶어죽더라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개미인가? 베짱이인가? 둘 중에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든다. 그러나 의문을 품어보자. 우리는 왜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자. 하루는 개미로 살고, 또 하루는 베짱이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반나절은 베짱이로 살고 반나절은 개미로 살 순 없을까? 혹은 평일은 개미로 살고, 주말은 베짱이로 살 수는 없을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은퇴 후 시간을 쪼개서 미리 앞당겨 쓸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은퇴 후 시간이 20년이라면 그시간 중에 1~2년을 미리 쓰고 조금 더 은퇴를 늦추면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물론 이는 일반적인 직장인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가능한 생각이었음을 양해드리고 싶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 될 게도 내가 그린어 말리려고 해도 제대로 쉬고 싶다는없었다.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제대로 쉬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이분법에서 벗어나니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삶의 큰 변화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값진 것은 안식년 동안 몸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삶의 현재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행복을 미루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일 일은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행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숙제처럼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뛸 수밖에 없다. 지금 일이싫다는 이유로 당장 사표를 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다닐 수는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낮에는 개미에서밤에는 베짱이로, 혹은 평일은 개미에서 주말은 베짱이로 이중의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몇 시간 혹은 주말의 한나절은 자유 시간이 있다. 이 시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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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치 않은 문제에 매달릴수록 형편은 더 나빠집니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불평거리는 더 늘어납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상황은 더 심하게 꼬여만 갑니다. 은밀한 불만으로 끌어들이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정죄와 자책, 독선과 자기 거부 등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상승 작용을 합니다. 꼬임에 넘어갈때마다 자신을 거부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일단 불평불만이라는 광막한 미로에 발을 들여놓으면 순식간에 길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세상이 자신을 몰라주고, 거부하며,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불평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며 전혀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동정심을 자극하고 간절히 소망하는무언가를 얻을 욕심에 푸념을 늘어놓으면 백이면 백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매사 불만스러워하는 상대와 어울리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자기부정적인 이가 늘어놓는불평에 대처할 묘수를 터득한 이는 흔치 않습니다. 비극적인 건 한번 불평을 내뱉고 나면 머잖아 가장 두려운 상황에 몰린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내 힘으로 일으킬 수 없는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길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심리적인 깨달음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치료는 오직 위로부터 하느님이 손을 내밀어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순종적이고, 성실하고,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자기희생적이라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자질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바로 그 칭찬할 만한 태도들과 단단히결합되어 있으니 정말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 탓에 절망감에 빠질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으로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는바로 그 순간,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을 비워야겠다고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을 끌어모으는 데 집착합니다. 맡은 일을 멋지게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바로 그 순간, 왜 남들은 나만큼 헌신하지 않는지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유혹에 넘어간 이들을 은근히 부러워합니다. 고결한 자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원한에 사무친 불평꾼이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허약한 나의 진짜 모습과 마주칩니다. 나에게는 원한을 완전히 뿌리뽑을 능력이 없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내 속사람이라는 토양에 너무 단단히 박혀 있어서 그것을 힘껏 잡아당긴다는 건자신을 파괴하는 행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도덕적인 장점들을다치지 않으면서 원한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내 안의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탕자의 비유는 형제를 선과 악으로 갈라놓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어른은 형과 아우를 모두사랑합니다. 버선발로 달려나가 두 아들을 맞아들입니다. 두 자식을모두 한 상에 앉히고 더불어 기쁨을 나누길 바랍니다. 동생은 모든허물을 용서하는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큰아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몸짓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아직까지는 분노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아버지가 베푸는 치유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맡기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의내면에서 어둠을 몰아내주기를 바라면서도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를 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암흑 속에 머물 수도 있고,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사랑의 빛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거기에 계십니다. 주님의 빛이 거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용서가 거기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모두 사랑했다. 아버지는 저마다 뜻하는 대로 살 자유를 주시지만,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는 자유를 부여하실 수는 없다. 당시의 관습과는 달리 이 아버지는 자식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울러 아버지의 사랑과 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 역시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생사를 어떻게 매듭지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이야기가 올바르게 마무리되는 데 따라 아버지의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다만 그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따라 좌우될 뿐이다. 변화가 생길 때마다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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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데이비드 화이트에 대해서는 나와 미하엘 쉬나이더가일찍이 함께 주목했었다. 그는 "씩씩하게 상처 입을 수 있음(robust vulnerability)" 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이 개념에 대해 독일어 권에서는 심리분석가이자 유명 저자인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가 "억세게 상처 입음(robusteVerletzlichkeit)"이라고 말했지만, 이 개념의 중점은 "상처 입기 쉬운(verletztlich)"이 아니라 "상처 입을 수 있게 존재한다(verletztbar)"이기 때문에 "씩씩하게 상처 입을 수 있는 능력" 이라는 번역이 그 의미에 더 잘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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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원적 관점들과 감수성, 느낌, 사유, 감각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일상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독일어의 결정하다(bestimmen)‘라는 동사 안에Stimme(목소리, 의견)‘라는 어근이 들어 있다.-역주) 우리가 부모를실망시킬 때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자기 결정적 인간으로서 부모와 적절한 관계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경계선을 그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게나, 이기적으로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하려 들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줄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 염려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필요와 갈망에 대해서 예민하게 깨어 있는 감각은 필요와 갈망을 모두 얻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다.

실망은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말해준다.
기대와 희망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에 무엇이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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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의 관계에서평화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를 있는그대로 인정하면 부모의 약점과 장점, 상처와 불안과 갈망을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부모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고, 부모의 생각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행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경우라 할 수있다.

좀 가혹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인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삶이란, 사실 나 자신에겐 괜찮지 않은 삶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한 애정을 거두어들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관계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실망시킬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모가 우리에게 보내는 애정이 깃든 눈길과 축복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특히 자신의 부모를 실망시킬 수 있는 능력은하나의 기술‘이다. 즉, 건설적인 방식으로 실망시키는 것 말이다. 최선의 경우는 실망을 통하여 부모와 새롭고 더욱 깊으며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물론 부모와의 관계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부모와의관계가 각별한 성격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외에도 우정이나, 사랑, 혹은 직장에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생산적실망을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내적 자세가 있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모든 과정은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모든 착각과 환상,
기대심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이 겪는 실망들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는,
나를 둘러싼 세상과 다른 사람이실제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열린 마음에 달려 있다.

모든 실망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착각과환상, 희망사항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실망할 때 비로소 착각이 사라진다. 실망하다‘라는 독일어 단어의 구조가 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나며(ent-täuchst), 우리가 틀렸고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ent는 ‘제거‘의 의미를 지닌 전철이며, täuschen은 ‘속이다‘, (재귀용법으로) 착각하다‘, ‘속다‘의 의미-역주)이는 대단히 극적일 필요는 없다. 휴가 중에 매혹되었던 포도주를 집에 돌아와서 마셔보니 그때의 맛과 다를 때, 우리는실망한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결심이라는 것은 매우 모순적이다. 이러한 격언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결심으로 포장되어 있다."
좋은 결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성을 지닌다. 원칙적으로는 분명추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반대할 수는 없으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목표를설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과도한 이상향을 목표로 지향하는 반면 실제의 삶에 부합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하다.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삶을 간과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좋은 결심들이 데려가는
‘지옥‘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할 때 스스로에 대해 내리게되는 판단, 자기 자신 안에서 만나는 부정적 자아상 등을 의미한다. 결국에는 이제 좋아지기는 결코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기분만 쌓여갈 뿐이고, 자신은 결심한 바를 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만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 결심들에 대해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 결심의 기저에깔린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실망과 대결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나의 한계를 잘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훨씬 더 많은 공감을 하면서 다정다감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평가하기를멈추었을 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 역시 그만둘수 있다. 다른 사람을 엄격하게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으로 분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고, 무언가를 해내거나 바꾸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자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 또한 없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대로 놓아두어도 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깊고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어준다. 이것은 곧 놓아둠과 안정감의 경험이다. 내 인생을 세워둘 단단한 기초를 놓으려 애써 긴장하고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이로써 깊은영적 체험으로 모여질 가뿐함과 인생의 기쁨이 생겨난다. 내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연연하는 대신 나의 실재를 직시할 수 있는 만큼 내 인생과 나에게 정말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안의 갈망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갈망에 휩쓸리게 된다.
그때 갈망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어딘가로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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