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 가면 대개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야, 멍청한 년아, 물은 니가 갖다 먹어야지. 내가 가져다주랴." 여러분들이 이런 표현을 처음 들었다면 아마도기가 막힐 겁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그렇게 쓰이고있는 말일 뿐입니다. 여기서 ‘멍청한 년‘은 ‘머리가 나쁘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여자‘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쟁이 할머니에게 ‘멍청한 년‘은 ‘내 손녀같이 귀여운 여자’라는 정도의 친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 욕쟁이 할머니는 다른 곳에 가면 함부로 그런 욕을 내뱉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언어 사용의 이런 맥락들을 염두에 두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혼자 추측하지 말고 실제로 언어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 상황을 배우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어떤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난점은 이러한 배움을 가로막는 선입견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선입견이 아니다.(철학적 탐구)

"사랑해"라는 표현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표현이 사용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합니다. 대표적으로 애인 사이에서, 또는가족 사이에서, 그리고 친구 사이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만약동성 친구가 이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가 애인 사이에 사용되는표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문제가 또 달라지겠지요.
사실 애인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은 매우 다채롭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너무 늦었을 때, 키스하고 싶을때, 혹은 이별을 통보할 때도 우리는 이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인 중 한 사람이 이별을 염두에 두면서말을 사용했는데도, 다른 상대방이 그 혹은 그녀가 키스를 원하는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무척 난감하겠지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사실 단순합니다. 동일한 언어라도 사용되는 맥락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그래서 한 가지 의미만을 고집한다면 우리 삶에는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한국어 문법책에 통달한 한 외국인을 만났다고 해 보지요.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죽도록 친절하군요." 무엇인가 표현이 이상하지요? 물론 외국인의 말이 문법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그는 "죽도록 사랑해"라는 표현을 배운 모양입니다. 그리고 ‘죽도록‘이라는 단어가 ‘매우‘를 의미한다고 외웠을 겁니다. 이 때문에 문형에 맞게 다른 동사 앞에도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외국인에게 단호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우리는 "죽도록 사랑해"라는 표현은 타당하지만 "죽도록 친절해"라는 표현이 이상하다는 것을 어디에서 알게 된 것일까요?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모국어를 어린 시절부터 맹목적으로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 《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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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르고 싶은 산이 있고,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산이나 책은 모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너무 친숙해서 되돌아보지 못한 우리 삶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거리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산을 내려오기 위해서라는 사실, 마찬가지로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는 것도 삶을 건강하게 다시 시작하기위해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는 조망을 얻으려는 것은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혹은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긴 여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보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을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신만만했는데,

내가 이리 작아져 보잘 것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큰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관계 그물이 이다지도 복잡 미묘하고 광대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도 인생도 나도

생동하는 우주 그물에 이어진 작으나 큰 존재입니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

한 인간이 먼저, 내가 먼저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구슬처럼 빛나는 개개인을 하나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다라의 구슬처럼

지구 마을의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주체입니다



새벽 찬물로 얼굴 씻고 서툰 붓글씨로 내 마음에 씁니다

오늘부터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벽 허물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연대하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은 바로 다중의 구성적 힘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랑의 근대적 개념은 부르주아적 커플에, 그리고 핵가족의 밀실공포증적 울타리에 거의 전적으로 제한되어있다. 사랑은 엄격하게 사적인 일로 여겨져 왔다. 우리에겐 사랑에대한 더 넓고 더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전근대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기독교와 유대교는 공히 사랑을 다중을 구성하는 정치적 행위로 파악한다. 사랑은 바로 우리의 확장된 만남들과 부단한 협동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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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을 보고 땅의 지도를 그렸다. 그 지도를 따라 사람의 길을 열어 갔다.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문의 삼중주, 이것이 문명의 출발이다. 산다는 건 이 삼박자의 리듬에 다름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이 배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는 복되도다!"(루카치)라고 외친 이유다. 하지만 그 ‘복된 시대’는 산업혁명, 자본주의, 계몽주의 등과 더불어 종언을 고했다. 이제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않는다. 별을 보고 길을 찾는 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별 자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책없이 쏘아올린 조명탄과 빛공해로 인해. 하늘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땅을 살피는 안목 또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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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방적 경쟁 mimetischen Rivalitat"이라는 지라르의 개념은 폭력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다. 어원적으로라이벌 Rivale은 수로 rivus의 이용과 관련된다. 라이벌은 다른 사람들이 물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기도 물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적 행동은 모방적 욕망으로 인해 가치 있게 되는 대상보다는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를 지닌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다. 지라르의 모방 이론은돈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남들도 원하기 때문에 돈을원하는 것이 아니다. 모방적 욕망에서 돈의 가치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돈은 특별한 대상이다. 돈은 그자체가 바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방이 중요한 인간의 행동 양식에 속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모방이 없다면 사회화 과정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본 경제는 피 대신 돈을 흘린다. 피와 돈 사이에는 본질적 근친 관계가 있다. 자본은그 행태에 있어 근대화된 마나라고 부를 만하다. 인간은돈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강해지고, 더 안전해지고, 더죽음에서 멀어질 거라고 상상한다. 돈 Geld은 어원적으로도 이미 희생 및 예배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돈은 본래희생 제물이 되는 동물을 구하는 데 사용된 교환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희생 제물을 가질 수 있다. 즉, 그만큼 많은 동물을 죽여 제단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맹수 같은 커다란 살해 폭력의 소유자가 된다.

삶을 유지하려면 죽음을 준비하라
Si vis vitam, para mortem.
그러니까 삶이 죽지 않은 삶으로 굳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삶 속에서 죽음에 더 많은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우리의 생각 속에 죽음에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우리가 지금까지 그토록 세심하게 억눌러온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태도를 좀 더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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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원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 도피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닛이 말한 낙원은 현실로부터 도피한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도피한 현실의 가장 어두운 곳에 남겨진 이들이 만든 공동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자산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후 영생을 얻어 누리기를 꿈꾸는하늘의 낙원은 그것이 설령 인간에게 주어질 때조차 신의 능력이고 신이 보인 배려이다. 그러나 신이 보살핌을 거둔 곳, 즉 지옥에서 낙원이 생겨난다면 이는 오로지 인간이 인간에게 보인 능력, 인간이 인간에게 품은 희망, 인간이 인간에게 베푼 배려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철학의 거처랄까 사명 같은 것을 떠올렸다.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자발적으로, 얼음이 덮인 높은 산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한 얼음이 덮인 산정은 범속한 것들이 찾아올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다. 그러기에 그곳은 세상의 가치평가와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그 평가 속에서 추방된 것들을 발견하고음미하는 가치전복의 최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철학에 관한 섬뜩한 상징‘으로 인도의 비시바미트라 왕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혹독한 자기 고행에서 얻은 힘과 자신감으로새로운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비시바미트라 왕. 그의 이야기에니체는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언젠가 새로운 천국‘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세우기 위한 힘을 그 자신의 지옥속에서 발견했다

‘철학의 정신‘은 그런 고행과 금욕의 외투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있었다고 니체는 말했다. 이는 많은 철학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도피 욕망, 즉 번잡한 곳을 떠나 조용히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참된 철학자가 높은 산정과 얼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지금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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