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길 위의 사람들. 길은, 인간人間의 길이다. 인생이란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에서 고뇌하고 결단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내가 걷는 그 길을 따라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쉬임 없는 생성의 존재가 나, 인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탄생의 순간 이미 나다. 누구라도 이 지구별에 목숨 받고 태어난 날, 이번 생에 꼭 해야만 할 소명召命이 있어 자기 운명의 길 하나 품고 나오지 않았던가. 이 우주 역사에서 단 하나뿐이고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의 이유와 의미를 묻고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길‘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비참한 자는 길을 잃어버린 자다. 길을 잃고 나를 잃고 희망이 없는 자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은 길이 사라져 버려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이보이지 않는 것은 어둠이 깊어져서가 아니다. 너무 현란한 빛에 눈이멀어서이다. 우리가 희망이 없다는 것은 희망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너무 헛된 희망을 놓지 못해서이다. IS IS 구 SS IS그리하여 길을 잃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이 길이 되고 말았다.
다들 가니까 그 길로 달려가고, 다들 가는 그 길을 앞서가고자 비교경쟁하고 인정 투쟁하고, 잠깐 흘러 가버리는 유행과 팔림에 휩쓸려갈 때, 길은 나를 지나쳐 버린다. 나는 나를 지나쳐 버린다.

등 뒤의 그대가 있어

화산 폭발로 생겨난 비옥한 대지에서 자라는
인도네시아의 과일과 야채는 그 맛이 일품이다.
수확한 과일을 지고 나서는 아빠를 배웅하는 가족.
이것이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내가 사는 힘이다.
내 등 뒤에 그대가 있어 나는 나아갈 수 있으니.
나는 나 하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내 힘만으로 살아가는 생이 아니다.
내 등 뒤를 지켜주는 이들이 있어
그래도나는 살아갈 것이니.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내가 지금 불만에 찬 것은 대지에서 멀어진 두 발로
삶이 없고 우정이 없는 길로 쓸려가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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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 이야기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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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서울 주민)
"환경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숙제인데 무작정 화장터 설립을 반대하면 안 되죠. 해당 시설들은 어디든 반드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화장터는 필요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는 입장은 매우 이기적이죠. 설마 정부에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그러는 건아니죠?"

이미혜(화장터 예정 부지 근처 주민)
"물론 환경문제는 우리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하는 숙제죠. 그런데 왜인류의 보편적인 숙제를 일부 지역 사람들만 떠안아야 하죠? 서울사람들은 매립장, 소각장, 폐기물 처리장 등과 관련해 논란이 벌어지는 지역이 어디인지 알기나 할까요? 인류의 숙제를 도시보다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풀어야 한다니 모순이죠.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데, 왜 힘없는 사람들만 피해를 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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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숙의 잣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 나아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성숙해지고, 겉만 어른이던 사람도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의 과정을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작아지는것을, 혹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이 돌아간다는 감정적 천동설에서 벗어나 자기만큼이나 타인도 고통에 아파한다는 감정적 지동설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성숙한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겨울에 길을 가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길고양이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렇게 고통을 직면하면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고양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이미 느껴버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가느끼는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자발적 감정이자 의지, 혹은 노력은 이렇게 탄생한다. 고양이를 외면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고통보다 고양이를 집에 데려옴으로 인해 생길 나의고통이 더 크다고 판단하거나, 결국 고양이의 고통이 사무치게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내 넓적다리에 느끼는 고통만큼 고양이의 고통이 다가와야 고양이의 고통을 완화해주려는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 라는 명제로 싯다르타가 절규했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닌가.
타인의 고통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에 자비가 차오르게 된다. 자비, 혹은 그냥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새겨두자, ‘사랑의 핵심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느낀 고통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하려는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시작한다.‘ 사랑이 연민과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민은 행동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반한 실질적인 사랑은 항상 상대방에게적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그에게 밥을 해준다. 그가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외로워하면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외로우면 나도 외롭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그를 업고 병원에 간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걷기 힘들면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다. 그가 거동이 힘들면 나도 힘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하면 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떨어준다. 그가 우울하면나도 우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추우면 그에게 옷을 벗어준다. 그가 추우면 나도 춥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 배고픔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은 사랑이자 동시에 선한 일이다. 그렇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공기의 밥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고통에도, 그리고 고통의 감수성에도 중도가 필요한 이유다. 두 공기의 밥은 배고픔의 고통 대신 배부름의 고통을 선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통은 잠시완화시킬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대화가 사랑의 행위라면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무거움을 나에게로 고스란히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내와, 나는 남편과, 나는 딸과, 나는 아들과, 나는 후배와 규칙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니 돈독한 관계라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되물어야 한다. 대화를 나눈 뒤 상대방의 무거움을 자신이 충분히감당해서 무거워졌는지. 만약 충분히 무거워졌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홀가분해졌을 것이다. 당신은 마침내 제대로사랑을 한 것이다. 상대방의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켜주는 데 성공한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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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지음, 이상미 옮김 / 두란노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치유하는 일은 친밀한 빈 공간을 낯선 손님에게 마련하여 베풀어주는, 보잘것없으면서도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 공간에서손님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두려움 없이 되돌아보며, 혼란스러움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단이라는 말을 그 말 본래의 심오한 의미인 속속들이 안다(diagnosis; dia=속속들이 gnosis= 앎)‘라는 의미로본다면, 모든 치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환자를 충분히 알려는 관심 어린 노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진단이란 현재 그들의 삶을 모양짓고 형성하며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이끌었던 그들의 즐거움과 아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좌절을 알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치유란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밀한 빈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각기 처한 인간적인 상황에 부응하는 소식입니다. 또한 교회는 규칙을 따르라고강요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리는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생소한 문구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둠 가운데 하나의 빛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된 가장 심오한 인간의 경험을 상세하게 문서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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