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이 지나치게 사람 중심이라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청원이라고 봐. 지금의 동물원은 동물의 복지나 권리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이번 퓨마 사건 때도 동물원이 제대로 대처했다면충분히 생포할 수 있었을 거야. 동물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점이 됐지. 이제는 전시된 동물을 보고 좋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생각해."

100년 전, 인도의 민족 해방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는말한다. "한 국가의 권위는 그 나라가 동물을 다루는 방법으로판단할 수 있다."
동물을 바라보던 기존의 세계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83년,미국의 동물 운동가 알렉스 허쉐프트 Alex Hershaft는 간디의 생일10월 2일을 ‘세계 농장 동물의 날(World Farm Animals Day)‘로 지정했다. 오늘날에는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채식을 실천하면서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있는데, 동물원이라고 예외겠는가?

동물의 복지를 위한다고 해서, 어떤 동물에게도 손끝 하나 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주장도 아니다. 그보다 동물을 대하고 가축을 다루는 방식이 더 나아질 수 없는지 고민하자는 거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1965년, 동물과 관련된 전문가들로 이뤄진 영국의 브람벨 위원회는 동물에게 ‘5대 자유 지침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다섯 가지는 허기와 갈증에서의 자유 쉴 수 있는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충분히 움직일수 있는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인간이 동물을사육할지라도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철학자 』터 싱어Peter Singer는 1975년 그의 저서 『동물 해방』을 통해 고통은 주체가 무엇이든 고통 그 자체‘라면서 동물의 권리에 대해 주장했고, 세계는 기존의 생각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 은 동물 복지를 배려한 가축 시설을 설계했다. 자폐 증상을 앓던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능력 덕분에 동물이 도축장으로 끌려가면서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했고, 좀더 편안하게 소가 죽을 수 있는 시설‘을 설계했다. 현재 미국의도축 시설 절반이 이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에는 한국인 남성이 캐나다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성 소수자였던 그는 한국 군대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이 차별과 혐오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캐나다 정부는 이를받아들였다. 그 사람의 재산을 따지지도 않았고 ‘한국에는 개를잡아먹는 문화가 있다‘는 소문을 심사에 반영하지도 않았다. 한편 한국에는 사업차 체류하던 중에 종교를 이유로 난민 신청을한 이란인 부자(父子)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가되었는데,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는 이를 배교‘ 행위로 보고엄중 처벌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난민은 단순히 빈곤 문제에서 비롯되지만은 않는다. 그보다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존엄성이 사회로부터 탄압받는가‘가 중요한 난민 신청 사유가 된다. (참고로, 이란인 아버지는 2016년 난민 불인정 처분을 받았으며, 아들만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이제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인들을 떠올려 보자. 이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생활이 위태로워졌을 뿐이다.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잘 살다가 운명의 기로에 서야 했다. 이런 식이다. 반군이 지역을 점령하면, 정부군을 지지했던 사람은 사형시킨다. 반군을 환영하면 군대에 끌고 간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는 죽을 목숨 아니겠는가. 그러니 의사도 교사도,심지어 연예인도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특정 이미지로 ‘난민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닌 타국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자격시비를 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년 인터뷰에서 리프킨은 기후변화로 지구의 물순환이 바뀌고 생태계 교란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문명이 빈번한 재앙을 맞을것이라 경고했다. 반다나 시바 역시 2017년 인터뷰에서 지구 생물의 3분의 1이 사라진 오늘, 인간은 지구의 몸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권력에 상관없이 평등한 고통을 경험하는 지독한 시간을 겪을수 있음을 알렸다. 리프킨은 코로나 19를 가리켜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파괴된 모든 생물이 대대적인 이주를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반다나 시바 또한 지난 30년 동안 300여 개의 감염병이 숲에서나왔다는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 진실을 지적했다. 생태계 파괴가부른 인간 문명의 위기다. 바로 개발과 이윤으로 치닫는 경제 질서가 초래한 위기이며, 이 질서를 뒷받침하는 화석연료 문명의 부작용인 것이다.
코로나 19 위기는 경제를 폭풍처럼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경제질서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전면에 부상했다. 지난 10년 동안 유럽과 중국의 중앙정부를 비롯해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시민사회와 지방정부에서 구체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은 그린 뉴딜을 우리의 정책 논의 테이블 위로 올려야했다.

제러미 리프킨과 인터뷰를 했던 또 다른 이유였고, 그는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산업 인프라를 재편하는 그린 뉴딜과 3차 산업혁명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화석연료에 기반해 수직적으로 통합된 글로벌 기업은 시효를 다했다. 3차산업혁명은 "수백만의 중소기업과 지역공동체에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즉지역 중심 세계화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식량 위기까지 가늠해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했던 농업 경제학자원톄쥔 역시 세계화된 경제가 지역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 내다보았다. 다만 그의 지역 중심 세계화는 리프킨과 달리 더 큰 지역 통합으로 같은 대륙 안에서 자본과 노동, 자원이 하나의 생산 체계를 이루는 형태다. 북아메리카, 유럽, 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축이 되는 삼각형 경제 구조로 전환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탈세계화 움직임 속에서 반다나 시바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확보하는 정치 개념으로지구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모든 생명이 살아갈 권리를 확보하고 공동체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자연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생태중심 정치 체제다.

그렇다면 당장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문제를중심에 두고 외부에서 밀려드는 압력을 보고자 했다. 장하준은 같은압박 속에서도 복지가 잘된 나라의 고통의 총량이 그렇지 않은 나라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수많은 묵은 의제들이 정책테이블 위에 오른 지금이야말로 불평등이 ‘노멀’이 되어버린 사회를 치료할 기회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겪으며 이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핵심 인력의 존재를 인식했다. 장하준은 대부분이 저임금인 이들의 노동을 재평가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는 재정과 분배 정책이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부족한 사회 안전망과 계급의 세습,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등 한국사회가 봉착한 문제를 거론하며 코로나 이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지역사회 속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을때, 위태로운 공공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외면해도 괜찮은 사안으로 다뤄졌다. 자유와 안전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물리적 위협으로까지 나타난 혐오의 실체도 반드시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을 찾은 이유다.
그는 "모두가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삶의 기본을 보장받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은 줄어들 것"이고, "두려움이 줄면 혐오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손쉽게 탓할 대상을사냥한다. 누스바움은 사회가 개인을 보살필 것을 요청했다.
공중 보건 전문가인 케이트 피킷 역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 코로나 19에 대해 밝혀진 단 하나의 진실은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취약하다는 점,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앓는 질환이 코로나 바이러스 치사율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은 오직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공공의건강을 위해서는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최선의 방역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 19 위기는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모든 순간을 낚아채어 결정적으로 만듭니다. 역사는 가속도가 붙어 질주합니다. 오래된 규칙은 산산조각 나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코로나 19 이후의세상이 어떠할 것인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해졌습니다. 확실성은 바닥을 쳤고, 선택의 자유는 최고치에 도달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일들이 갑자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십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대미문의 사회적 실험을강요받고 있으며, 날것의 제안들이 권력의 회랑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근무하는 대학교에서는 몇 개의 온라인 과정을개설하는 안건을 두고 수년 간 토론해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점과 반대에 부딪혀 이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열흘 전 이스라엘 정부는 모든 대학 캠퍼스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단 일주일만에 우리 학교는 모든 과목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어제 저는 수업 세 개를 온라인으로 진행했고, 꽤 잘 운영되었습니다. 이 위기가 지나가고 저는 우리 대학이 보름 전 상태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실험들 가운에 무엇이 성공할 것이며 정확히 어떤 영향력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해 예측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대신 우리가 역사적인 웜홀wormhole(우주 공간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를 의미하는 가상의 개념으로 시공간의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고차원적인 구멍을 뜻한다)에 들어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정상적인 법칙들은 중단되었습니다. 몇 주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일이 평범한 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더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칫 폭군들이 민주주의 안에서 권력을 잡고, 그리하여 디스토피아가 도래해 우리를 짓누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에게 꿈을 갖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지금은 한참 전에 이뤄야 했던 개혁을 감행할 수 있는 시간이며, 불의한 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올해 말이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 살 겁니다. 그것이 더 나은세상이기를 희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염에 따른 인명 사고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알게 된시카고에서는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쿨링 센터‘를 비롯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여러 시설이 생겨났다. ‘일 년에 사용하는날이 며칠 안 된다‘는 이유로 세금 낭비라고 여겨졌던 시설이었다. 일정 기온 이상이 되면 냉난방이 갖춰진 공공시설까지 무료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정책도 마련되었다. 포퓰리즘급을 받던 제도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폭염에 따른 온열 질환 사망자 수가 감소했다.

후손을 생각하자‘는 식의 거창한 접근은 역설적이게도당장 시급한 과제는 아니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폭염 문제에대한 접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지구가 더워졌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프레임은, 에너지를 절약하지 않으면큰일 난다는 여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더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참는 걸 미덕으로 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에어컨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야속한결론이다. 즉, 환경문제는 더워도 죽지 않는 사람만의 추상적인구호로 그치게 된다.
넷째,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폭염을 극복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뉴스는 더위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지않고, 땀범벅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조망하며 열정과 성실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바쁘다. 이런 것조차 삐딱하게 바라보느냐고할지도 모르겠지만, 육체 노동자라면 더위 정도는 감당하는 게도리인 것처럼 포장되면 역설적으로 더위를 감당하지 못하는사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매년 더위에 지쳐 죽는노동자가 등장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이 안쓰러움 딱 거기까지만머무르는 이유다.
앞으로 폭염으로 인한 사망률은 나라마다 불평등을 어떻게다루는지를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노동의 지위에 따른 차이가 지나치게 크게 벌어지면 자연스레 직업의 귀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 잡는다. > 대기업 정규직만이희망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는 어떤 대학의 졸업장을 얻는지가 더욱 중요해진다. > 그러니 모두 각자도생하겠다며 경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고, 실패를 자기 책임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진다. > 이런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바라보기 쉽다. >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진다.
나는 정규직 전환이 절대적인 답은 아니지만 비정규직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면서, 생산적인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충분히 설득했다고 생각했지만, 강의를 듣던 누군가의 흥분한 목소리가 예외 없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부자와 빈자의 엄청난 소득 차이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소득을 직업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하자는 발상은 참으로 유치하지만, 소득 격차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양극과 현상을 내버려 두자는 태도는 참으로 잔인하다. 자본주의를 경제체제로 받아들인 나라의 학교에서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시험을 통해 사람을 평가한다. 하지만 결과를 대하는 태도는 결코 같지 않다.

시험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한 상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더욱 공정해진다. 왜그럴까? 시험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시험을 치르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부모가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다면? 어떤 이의 담임교사가 폭력적이었다면? 어떤 사람이 살았던 마을에 제대로 된 학원 하나 없었다.
면? 우리는 개인의 일생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샅샅이 알 수없다.
즉, 개인의 차이를 전부 고려해서 동일한 출발선을 만드는 시험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과‘만을 신성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빈곤을 개인의 잘못으로만판단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변화가 생기고, 나아가 성공한 이들의 사회적 책무도 엄격해진다.

반대로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는 어떨까? 서울의 한 학원에서는 ‘치킨을 시킬지(1·2·3등급), 치킨을 배달할지(7·8·9등급)는 이번 겨울이 좌우한다‘라고 적힌 광고 현수막을버젓이 걸어 놓기도 했다. 공부를 성실히 해야 고소득 전문직이될 수 있고, 게을러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으면 저임금 노동자로살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약자를위한 사회정책을 제대로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불평등을 줄이기위한 여러 제도들을 두고 ‘학교 다닐 때 놀았던 사람을 왜 도와줘? 역차별 아니야?‘라는 여론이 정의로 포장되어 일상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회와 과정에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건 중요하지만, 시험은 공정하다고못 박아 버리면 시험 결과에 따른 불평등이 개선되기 어렵다.

각자의 출발점은 다 다르다. 영국의 교육사회학자 바질 번스타인 Basil Bernstein 은 부모의 직업에 따라 학생들의 언어 습관이 어떻게 다른지를 연구했다. 부모가 안정적인 중산층인 경우, 자녀의 언어는 굉장히 정교했다. 이들은 교실에서 궁금한 점을 정확히 질문할 줄 알았고, 토론에도 능숙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띠― 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 년간 하루 십 킬로의로드윅과 새도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엑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시인의 감수성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우리는 기 드보르Guy-Ernest Debord, 1931~1994와 그의 주저 《스펙타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 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 드보르는 우리가 구경거리가 넘쳐나는 사회, 그래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소중한 삶도 돌볼 여지를 빼앗아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 구경거리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집어등集魚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가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집어등을 환하게 밝히고 오징어를 유혹하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각 가정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으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이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 존재가 되고, 또한 무자각적인 행태의 효과적인 동인이 된다. 스펙타클의 임무는 더 이상 직접 지각될 수 없게 된 세계가 다양한 전문화된 매개물들에 의해 보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스펙타클은 대화dialogue와 대립물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는 현재의 나를 넘어서 어제와 다른내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를 극복하는 길, 짐승을 넘어 위버멘쉬로 가는 길은 험하고 쉽게 나서기 어려운 길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몰락하는 길이 앞으로 나가는 길이며, 그런 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몰락은 바닥으로 영원히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는 추락이 아니다. 삶은 수많은 몰락과 극복의 연속이고,
우리는 몰락의 체험 이후 재차 몰두, 몰입하며 자기를 극복하는 방법과지혜를 배운다. 더군다나 몰락은 나를 둘러싼 허상과 허식을 걷어낸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하강체험을 해봐야만 과거와 다른 방법으로 높게 비상할 수 있는 방법을 얻는다. 몰락 두려운가?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안주하려고 하는가? 그런 결정을 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습관의 벽에갇혀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관성대로 사는 것이다. 관성대로 사는 습관도 나태의 결과가 아닌 근면의 성과이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