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작용을 살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하는 일도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종림 스님은 욕망과 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살고 싶고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없애거나 억눌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이 일어나도록 살려야 하는 대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이 어떻게 서로 억누르지 않고 어우러질 수 있을까? 종림 스님은 마음이라는 틀 안의 내용을 비우자고 제안했다. 서로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길을 비움 속에서 찾는다. 마지막으로 철학자 셸리 케이건과 함께 죽음을 마주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부른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과 끝을 충분히 인지할 때 살아 있는 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다. 로맨틱한 사랑 말이다. 정념을 미루고 차단하려 하는 오늘의 청춘들을 보며 애달픔이 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공부가 실제로 내 삶에 통찰을 준다는 것입니다. 왜 화를 냈을까? 왜 기분이 처질까? 왜 어떤 사실은 기억하면서 다른 사실은 잊어버릴까? 그리고 이는 정치, 경제, 역사와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킬까? 가장 효과적인 정부의 틀은 무엇일까? 법이 존재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무정부적 질서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돈을 꼭 각자 벌어 소유해야 하나, 아니면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런 정치적인 질문은 결국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바로 ‘뇌는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질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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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신과 친구가 되도록 스스로에게 관대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까지 나를 화나게 만드는 말씀을 다양한 면에서 살펴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친구가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인격체인 나 자신과 하느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이런 다양한 이해를 하나의 공통된 지평 안에 융합합니다.
이 새로운 지평 안에서 다른 시각으로 저의 삶을 바라보게됩니다. 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의삶과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은 항상 주관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본문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거나 단순하게 역사적인 맥락만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포함된 대화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역시 이 질문으로 성경 본문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1.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2. 나는 누구인가?
3.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정신과 의사인 알베르트 괴레스(Albert Görtes)에 따르면,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읽을 능력이 없기에 성숙하지 못한 하느님상像을 가졌는지도모릅니다. 우리는 질투, 비관주의, 방관, 벌, 권력과 같은 인간의 모든 특징을 하느님께 투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미지에 따라 하느님을 묘사합니다. 괴레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것이 크건 작건 빈약하건, 또는 순수한 지성에만 머무는것이든 아니면 모든 신화와 관련된 미신적인 요소를 거부하는 것이든, 우리가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신성 역시 성장해가는 특징을 지닙니다."

드레베르만(Eugen Drewermann)은 이 역사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유혹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레베르만은 악의 실제적인 원인을 두려움으로 보는데, 그 두려움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하느님처럼 자기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생겨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이끄는 모든 힘으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을 낯설게 느끼게 하며, 왜곡되고 병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유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절망이 생겨납니다.
하느님처럼되고 싶은 것과 한계, 비천함, 불완전함과 같은 모든 인간적인 조건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하게 될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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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삶의 모습과 우리 자신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시는 우리 안의 불을 일깨운다. 자신이 마른 지푸라기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럴수록 불이 더 잘 붙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시는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는 세상에 대해서는 처음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이든 세상이든 본질적으로 불완전할지라도,시인은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를 묻는다. 사실 그것이 전부 아닌가. ‘나‘에 진실하기가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 그토록 단순한 일인데 말이다.

날개를 주웠다. 내 날개였다.
시를 읽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상을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여러 색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게 묻는다. ‘마음챙김의삶을 살고 있는가, 마음놓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앨런 긴즈버그 (어떤 것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라이너 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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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결과물을 사랑하게 된다. 결과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보너스처럼 따라오는 것은 자기중심적 편향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은 나만큼 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 내 작품의 팬은 나 혼자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결과물을 사랑하게 된다. 결과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보너스처럼 따라오는 것은 자기중심적 편향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은 나만큼 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내 작품의 팬은 나 혼자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까 핵심은 이것이다. 좋은 관계란 거래가 아니고거래 비슷한 것도 아니다. 좋은 관계란 거래의 대척점에서거래와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관계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장기적 관점에 근거한다. 연인, 상사나 동료, 아파트 등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단기적 관계에는 굳이 에너지를 쏟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계에는 더 많은 사랑, 신뢰,에너지와 시간을 쏟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이런 투자 개념이 바로 성혼 서약의 밑바탕이 되며, 직장에서는 애사심과 충성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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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삶의 이정표를 찾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성경의 일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어떤 본문은 독자들에게 자극을 주고 어떤 경우에는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지난 2년간 일부 독자들로부터 해석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성경 본문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본문들은 주로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거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비판적인 철학자쿠르트 플라슈(Kurt Flasch)가 말한 것처럼 일부 그리스도교인이 어려운 성경 내용을 멀리하거나 무시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의 내용을 제가 아는 신학에 짜 맞추고 싶지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 본문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최선을다하고 싶습니다. 저의 수호성인인 켄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믿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생각했기에, "믿음은이해를 추구하는 것"(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읽는 성경 내용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항상 주관적인 단계를 거칩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성경이 말하는 모든 악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데서 생깁니다. 카인은 형제 아벨을죽이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악은 커져가고 하느님은 홍수로 모든 악인을 없앱니다.

첫째 근거는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다는 것입니다. 악은 유혹하고 길을 잃게 합니다. 금지된 열매는 특히 먹음직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기위해 명령을 어기게 만드는 자극입니다.
둘째 근거는 나무 열매가 소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소담스럽다는 표현에는 보기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악의미학입니다. 보기 좋다는 것은 성경에서 전적으로 하느님 창조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참 좋았다" (창세 1,31). 하지만 악의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혼란스럽게 하고 하느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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