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스 바르다하고는 세 번 사랑에 빠졌다. 방랑자)가 최초였다. 시체로 시작하는이 이상한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생은 죽음으로, 서사의 종결로도 끝나지 않는다는소식을 전해주었다. 설령 내가 평생 방랑만 하다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죽는다 해도 영화는 거기서 의미를 볼 수 있었다! 극장에서 뒤늦게 관람한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가 두 번째 매혹이었다. 이 작품과 바르다의 초기작들로 인해, 누벨바그라는 영화사적 사건은 비로소 내게 사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정작 영화기자로 취직한 다음 한동안 바르다는 책 속 거장의 이름이 되어갔다. 그러고는, 똑똑, 경이로운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가 문을 두드렸다. 21세기의 아네스 바르다는 시네마로 쓰는 에세이의 정점에 도달해 느긋이 머물렀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이어지는 바람에 나의 세 번째 사랑은 끊길 틈이 없었다. 1962년부터 2017년까지 이뤄진 스무 편의 바르다 감독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이 나를 질투심으로 괴롭힌 것도 놀랍지 않다. 특히 그의 모국어로 진행한 예술가의 인터뷰에는 대화의 깊이와 별개로 드러나는 체취와 결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 동경해왔지만 책을 덮은 이제야 그의 영화사 시네타마리스의 현관을 열고 들어간 기분이드는 이유다. 때로 내용이 겹치고 숫자가 오락가락하기도 하는 이 인터뷰들을 따라나선형으로 걷다 보면 당신도 히치하이커를 지나치지 못하는 운전자, 존경받지만투자는 못 받는 감독, 여성영화의 생동하는 정의, 장난기 넘치는 만담꾼을 만나고포옹하게 될 것이다.
바위들 사이에 작은 샘이 있고, 그 샘은 마르지 않죠. 이 철없지만 집요한 낙관주의는 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해요.
"한 여성으로서 직관에 따라 작업하고 보다 명민해지려 노력해요. 느낌과 직관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 기뻐하고, 의외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바라보죠." 바르다는 "의외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삶을 예술 속에서 꾸준히 이어왔다.
무엇이 행복에 이처럼 자연스레 끌리게 만드는 걸까? 도대체 이형용하기 어렵고, 조금은 괴물 같은 녀석의 정체는 무엇일까? (…)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왜 존재할까? 왜 사라지는 걸까? 왜 사람들이 쫓아가서 잡을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잡을 수 있는 걸까? (…) 왜 가치나 훌륭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걸까? 그런데 이 행복감이란 건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윤리적인 것 또는 그 외 어떤 것들과도 크게 관련이 없는 것같아요. 그저 누군가, 몇몇 사람들,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뿐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어요. 죽음이라는 개념을 늘 품고 사는 사람들도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준비가돼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클레오는 이전까지 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죽음을 낯설고 폭력적인 적으로간주하죠. 더욱이 클레오는 너무도 아름답고, 활기차고, 건강해 보이기 때문에 그와 죽음의 대비는 훨씬 더 무자비해 보여요. 클레오는 르누아르 그림의 모델로도 손색없어 보이죠. 그런데 갑자기 클레오의 아름다움과 나무랄 데 없는 건강함이 죽음, 즉 그의 몸을 공격하고 존재 전체를 향해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이라는 개념과 맞닥뜨려요. 클레오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겨왔는데, 갑자기 자기 입지를 잃게 돼요. 이건 사실 익히 다뤄져온 이야기예요. 고독한 상황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이 숨어 있던 병폐로 인해 클레오는 자신이 마음을 열고 있음을 느끼고, 이제까지 익숙하게 해오던 사고방식과 행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이후로 그는 하나둘씩 옷을벗기 시작해요. 결국 아무것도 걸치지 않게 되죠. 클레오는스스로를 놓아주고,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들을 하나하나 벗어던져요. 일종의 ‘떼어놓기‘라 할 수 있죠.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게 제겐 아주 흥미로웠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측면도 마음에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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